그 이유는 삶의 행복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삶이 모여 이루어지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정말 행복한 곳이 되려면 대단히 많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커다란 전쟁도 있으면 안되고, 큰 재난도 있으면 안되고, 악당이나 범죄자가 많아도 안되고, 부유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의 격차가 너무 커서도 안된다. 반면 세상이 불행해지고 망하려면 뭔가 한 가지만 크게 어긋나면 된다. 세상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하게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도, 어느 날 짠 하고 갑자기 하늘에서 운석이 나타나 지구를 들이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 세상은 망한다. 그러니까 세상이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그 수많은 조건 중에는 “운석이 충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보니 밝고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SF보다 어둡고 망한 세상을 그리는 SF를 쓰는 것이 대체로 더 수월하다. 행복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려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대충이라도 답을 생각해놓아야 하는데, 그런 답을 만들어내기란 어렵다. 명쾌한 답을 그렇게나 잘 안다면, 소설을 쓰기보다는 정말로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을까? 세상 문제가 자기 생각대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다 수월하게 풀리는데, 답답한 멍청이들이 너무 많아서 이 모양이라는 발상은 옛 시대 사상가들의 도취라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 학자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그려보라고 하면 청나라가 망해야 하고, 노비들은 주인에게 충성해야 하고, 모든 남자들이 붓글씨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이 유토피아라고 할 것이다.
이경희 작가가 아포칼립스 이야기를 했는데, 리처드 매드슨의 걸작 SF <나는 전설이다>에서는 전염병이 아포칼립스의 원인이다.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온 세상에 퍼져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전멸했다. 주인공이 거의 유일한 생존자 같다. 주인공 말고도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긴 있다. 그러나 전염병의 부작용으로 이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저 넋이 나간 상태로 짐승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만 한다. 소설에서는 이런 감염자들을 흡혈귀 같은 무리라고 설명하는데, 사실 지금 그 묘사를 보면 흡혈귀가 아니라 요즘의 좀비 이야기와 동일하다. 즉 <나는 전설이다>는 거의 모든 현대 좀비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정작 좀비라는 말도 쓰지 않지만, 좀비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재미를 어느 현대 좀비물 못지않게 잘 살려 보여준다. 참신한 결말의 무게는 적당히 끝을 내는 어지간한 다른 좀비물보다 훨씬 낫다.
1971년에 나온 <오메가 맨>은 이 소설을 영화한 것 중에 아마도 가장 인기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소설을 가장 충실하게 옮겼다는 느낌은 아니다. 소설은 좀비같이 돌아다니는 흡혈귀 떼들과 싸우는 내용에 더 집중하는 느낌이라면, 영화 <오메가 맨>은 세상이 망했는데 주인공 혼자,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다는 외로움과 절망감에 조금 더 집중한다. 후반부로 가면 이야기 중심이 완전히 옮겨가기는 하지만, 전반부의 고독하고 황량한 분위기는 대단히 잘 만들었다. 아무도 치우지 않아 쓰레기만 나뒹굴고 있는 텅 빈 대도시 LA에 단 한명의 주인공만이 떠돌다가 옛날 영화 필름을 혼자서 극장에서 보는데, 거기에 수백, 수천명의 군중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물끄러미 화면을 쳐다보기도 하고 더이상 새 영화가 없는 세상에서 같은 영화를 골백번은 본 것인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한다. 이런 내용을 보면, 누구든 내가 저 상황이면 무슨 기분일까, 사람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 밖에 결정적인 장면에서 살짝 정통 공포영화다운 연출을 이용해 강렬한 맛을 확 끌어올리는 방식도 근사하다.
그렇다고 <오메가 맨>을 무척 교훈적이고 모범적인 영화라고 하기에는 약간 어긋나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 있다. <오메가 맨>은 곳곳에서 인종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전통적인 터프 가이 백인 남자다 보니 겉도는 느낌이 없지 않다. 주인공의 희생적인 태도 덕택에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게 되고 이때 주인공의 피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식의 종교 상징을 갖다댄 것은 영화 결말에 장중한 느낌을 주기 위해 너무 쉬운 수법을 쓴 것 같아 좀 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1960년대를 거치며 변화한 당시 사회의 여러 모습을 조금씩 무리하지 않고 풍부하게 담고 있다. 원작의 뼈대에 영화에서 특히 장기로 보여줄 만한 내용을 튼튼하게 배치하여 이야기가 흘러가는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당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던 많은 사연들이 묻어난다. 이런 구성은 사회 변화를 반영해 좀더 참신하고 와닿는 영화를 빚어내려는 노력이기도 하고, 이토록 많은 문제들이 엮여 있는 복잡한 지금의 사회가 갑자기 단 하나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박살나면 그 조각조각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