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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사랑과 희생, 그게 모성의 전부는 아니야
2022-07-18
글 : 한겨레제휴기사 (한겨레 신문 제휴기사 등록)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로스트 도터

어머니에 대한 관습적 기대 부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주인공 레다, 매기 질런홀 등 여성 제작진들, 지금껏 보지 못한 엄마됨 그려내

영화특별시SMC 제공

배우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 <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는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원작으로 한다. 페란테의 소설은 ‘위대한 모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그에 가려져 있었던 여성의 내면을 드러낸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가부장제 사회는 오랜 세월 모성을 여성의 본능으로 자연화하고 인류를 영속시키는 찬란한 속성으로 숭배함으로써 여성을 어머니의 자리, 재생산의 영역에 가두어 왔다. 이렇게 절대적인 사랑과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모성성의 신화가 인간을 행복하게 했다면 별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빈번하게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결핍된 존재로 만든다. 페미니즘이 모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엄마됨의 스펙트럼을 다채롭게 설명하고자 했던 건 이 때문이다. 모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틀에 갇혀 질식 상태에 놓인 모성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레다는 ‘이상한 엄마’가 아니다

원작 <잃어버린 사랑> 역시 이 자장 안에서 엄마됨의 다른 욕망을 묘사하는 작품인데, 영화 <로스트 도터>는 거기에서도 조금 더 비밀스러운 내면으로 파고들어간다. 주인공 레다는 세상이 그려온 어머니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종내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성에 대한 믿음을 과감하게 저버린다. 올리비아 콜먼의 흔들리는 눈빛과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 살짝 구부린 어깨는 모성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존재의 이물감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신체화한다. 그리고 자신의 심리를 구술하는 소설 속 레다와 달리 자신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는 영화 속 레다는 러닝타임 내내 서스펜스를 지고 다닌다.

대학교수인 레다는 여름방학을 맞아 그리스의 한 해변 도시로 홀로 여행을 온 참이다. 반짝이는 해수면이 고요하게 일렁이는 바닷가에서 책을 읽고 메모를 하는 레다의 시간은 평온할 법도 하지만, 어쩐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늘 주변과 조금씩 갈등하고 불화하는 그의 행동은 계속해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보기엔 먹음직스럽지만 속은 썩어버린 과일이나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 갑작스럽게 출몰하는 벌레들은 무언가 불길한 앞날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얼마 후,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레다는 서너살 쯤 된 어린 딸 엘레나를 키우고 있는 니나(다코타 존슨)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선망인지 동일시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던 중 엘레나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와 함께 레다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데, 두 딸의 엄마였던 그 역시 딸 비앙카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결국 레다가 엘레나를 찾아주게 되고, 레다와 니나는 이 일을 계기로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기 시작한다.

이후로 불쑥불쑥, 레다의 과거가 현재의 시간 속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엄마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고를 치는 비앙카, 단 10분을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던 시간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 커리어에 대한 열망…. 규칙 없이 끼어드는 플래시백은 레다를 둘러싼 공기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레다는 엘레나의 인형을 훔친다. 인형을 잃은 아이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울어대고 엘레나의 온 가족이 인형을 찾아 헤맬 때에도, 레다는 인형을 내놓지 않는다. 도대체 왜?

영화는 지속적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고, 그와 함께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예상하도록 유도하는 예술 장르다. 그 기대에 부응함으로써 사랑받는 영화도 있고, 처절하게 배신함으로써 영원토록 기억되는 영화도 있다. <로스트 도터>는 관객의 기대를 가지고 놀면서 자신의 주제의식을 향해 서서히 고양되어 가는 영화다.

영화특별시SMC 제공

제목에서부터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로스트 도터’, 즉 잃어버린 딸이라는 ‘사건’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레다의 행동과 불안이 그 특정한 사건과 관계있는 것이 아닐까 예상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엘레나의 인형 역시 잃어버려서 결국은 되찾지 못한 딸에 대한 기억과 연루된 일종의 대체물처럼 보인다. 인형을 닦고 입히는 행위는 완수되지 못한 모성성의 뒤늦은 수행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엔딩에 다다라 영화는 다른 결말을 내놓는다. 딸들은 별 탈 없이 성장한 상태고, 레다는 니나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인형을 돌려준다. 니나가 “도대체 이걸 왜 가져갔느냐?”고 묻자 레다는 답한다. “그냥 장난 좀 친 거예요. 나는 비뚤어진 엄마니까요.” ‘잃어버린 딸’은 레다가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 레다의 기질, 그 자체였던 셈이다. 레다의 이상한 행동은 엄마로서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레다는 애초에 그냥 그런 사람이다. 그의 말마따나 “비뚤어진”, “아주 이기적인” 사람.

원작자가 내건 유일한 조건은…

모성은 여성 행동의 거의 유일한 동기처럼 여겨져왔다. <로스트 도터>는 이런 관습적인 기대를 이용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레다의 엄마 정체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건 사건의 본질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건 엘레나에게 잃어버린 인형이 돌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마음대로 폭력성을 분출할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여자아이들의 인형놀이를 모성 본능의 증거로 믿고 싶어 하지만, 아이들은 수만가지 이유로 인형을 가지고 논다. 예컨대 원작 소설에서 어린 시절 레다가 가지고 놀았던 인형은 아이의 대체물이 아니라 곁을 주지 않았던 어머니의 대체물이었다.

매기 질렌할이 소설 <잃어버린 사랑>의 판권을 사고 싶다고 연락했을 때, 엘레나 페란테가 영화화를 수락하면서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질렌할 본인이 연출할 것.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성들이 만든 새장 안에 갇혀 있었다. (…) 여성 아티스트는 자율적이어야 하고 어떤 장애물도 그를 막아서는 안 된다.” 페란테의 판단은 정확했다. 원작자와 감독, 촬영감독, 그리고 주연배우들까지, 여성으로 이루어진 제작팀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엄마됨의 이야기를 근사하게 그려낸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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