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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imagolog 남자 인간을 뜻하는 영단어 ‘man’의 복수형 ‘men’(<멘>)이 오늘 이야기할 영화 제목입니다. <엑스 마키나>로 연출 데뷔를 하고, <서던 리치: 소멸의 땅> <데브스>를 만든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작가 출신임에도 비주얼 전략에 있어 많은 차별화를 시도해왔어요. 무의식을 동요하게 하는 이미지로 공포감을 주는 데 발군의 실력을 보여왔습니다.
김혜리 @imagolog 가랜드의 세 번째 장편 <멘>의 주연은 명백하게 두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자주인공 하퍼를 연기한 배우는 제시 버클리인데, 최근 <로스트 도터>에서 올리비아 콜맨의 젊은 시절을 연기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도 올랐죠. 남자주인공이자 하퍼 외 거의 모든 배역을 맡은 로리 키니어는 <멘>에서 굉장히 업무량이 많습니다. (웃음)
김혜리 @imagolog <멘>은 단순하게 요약할 수 있어요. 이 영화는 여성이 살면서 느끼는, 특히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일상적 공포를 다룹니다. 다양한 나이대의 남성을 등장시켜 한쪽 젠더만이 절감하는 사회적인 공포감을 일람할 수 있게 합니다. 해로운 남성성의 스펙트럼을 작심하고 넓게 보여주는 영화예요. 피가 튀고 강압적인 폭력도 보여주지만, 잘 보이지 않게 만연해 있는 여성 혐오를 보여주죠. 전혀 은근하지 않은 직설적인 화법이 보기 힘드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김혜리 @imagolog 이 영화에서 연출적으로 중요한 테크닉은 일인다역이에요.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의 고유한 캐릭터가 아니라 남성 일반을 집합적으로 가리킨다는 의미로 차용된 방식인 것 같아요. 죽은 남편이 가한 심리적인 학대 때문에 하퍼의 눈에는 모든 남자가 똑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거죠. 남자들과의 관계를 심상하게 대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여성에게는 모든 남자가 똑같아 보일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김혜리 @imagolog 남자들은 하퍼가 이혼하려고 하건, 산책하려고 하건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아요. 그런 침해의 예들은 동의받지 않은 스킨십, 노출을 통한 성희롱, 힘을 과시해서 확인하는 우월감, 자동적인 성적대상화, 죄책감의 전가, 여성을 독립적 주체로 취급하지 않는 가부장적 사고 등으로 나타나죠.
김혜리 @imagolog <멘>은 주제 면에서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하진 않아요. 그런데 새로움의 여부는 어떤 환경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대적이잖아요. ‘다 아는 얘기야’라고만 할 수 없는 면도 이 영화엔 있습니다. 또한 상징과 알레고리가 지나치게 선명하다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만, 제목을 ‘남자들’이라 지을 때부터 미묘한 뉘앙스를 내는 데 크게 관심이 없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투명하게, 공격적으로, 내가 만들고 싶은 장면을 만들겠다는 감독의 태도가 보입니다.
김혜리 @imagolog 마지막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명체가 태어나는 시퀀스는 <멘>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이미저리인 것 같아요. 러시안 인형 방식의 재생산이라고나 할까요? 이 연쇄작용이 주는 효과를 감독은 좀 다른 식으로 썼어요. 위협받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 반복은 충격을 점점 잦아들게 하고, 침착하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그러면서 일어난 하퍼의 각성, 일종의 정신승리가 영화를 보는 현실의 여성들에게도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현실의 하퍼들에게는 영화에서처럼 도끼가 없잖아요. 영화의 결말은 상당한 설왕설래가 있을 법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멘>과 함께 보면 좋을 작품
남선우 @pasunedame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헤어질 결심’을 한 여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제시 버클리가 연기하는 그는 7주 정도 만난 제이크와 이별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약속을 해뒀기에 남자의 부모를 만나러 시골 마을로 향하죠. 그러면서 점점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이 작품은 최근작 <멘> <로스트 도터>처럼 제시 버클리의 장기를 보여줍니다. 나른한 혼란 속에서 차분하게 당혹감을 표현해내는 그의 얼굴에는 ‘인생 그렇지 뭐’ 하고 체념하는 와중에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여자의 표정이 있습니다. 대사보다 이미지로 말을 거는 편이라는 점, 곱씹을수록 선명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 또한 <멘>과 <이제 그만 끝낼까 해>가 닮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배동미 @somethin_fishy_ <소름>은 2001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뒤 그해 여름 바로 개봉했다는 점에서부터 <멘>과 유사합니다. 두 작품은 가장 편안해야 할 거주지에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 소름 끼치는 순간을 귀신이나 유령 없이도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있어요. 영화는 재건축을 앞둔 오래된 아파트에서 시작합니다. 이곳에 이사 온 외톨이 택시 기사 용현(김명민)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자 같은 층에 사는 가정폭력 피해자 선영(장진영)은 서로의 외로운 처지를 단박에 알아봅니다. 함께 시간은 보내지만 믿음을 가질 수 없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죠. <소름>은 누군가와 부대끼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의 불편함을 포착한 음울한 호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