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내버려두면 세상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 간다. 거기에 저항하다보면 시끄러워진다. 도발, 균열, 파괴는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물결과도 같다. 라두 주데 감독의 <배드 럭 뱅잉>은 이러한 저항의 언어가 영화로 표현될 때 나올 수 있는 행복한 결과물이다. <일방통행>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 <실천과 빈정거림(시트콤)> 3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이 영화는 남편과 합의하에 찍은 섹스 비디오가 포르노 사이트에 유출된 후 자신을 향한 조롱에 맞서는 교사 에미의 이야기를 그린 블랙코미디다. 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한 <배드 럭 뱅잉>의 매력, “코로나19 팬데믹을 완전히 찢어버린 당당하고 도발적인 농담”(<버라이어티>)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부쿠레슈티의 명문고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는 에미(카디아 파스칼리우)에게 난데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가 남편과 찍은 부부관계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출되어 학부모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비디오의 노골적인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녀의 평판은 한순간에 곤두박질친다. 그렇지만 에미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다. 퇴직을 요구하는 학부모들의 항의에 맞서 성에 관한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며 반박한다. 이 과정에서 아마추어 포르노 비디오보다 더 추악한, 현대사회를 둘러싼 반지성적 모순의 실체가 드러난다.
현대의 루마니아 감독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아마도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의 크리스티안 문쥬일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시작된 루마니아영화의 뉴웨이브는 크리스티안 문쥬를 필두로 크리스티 푸이우, 크리스티안 네메스쿠,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라두 문티안, 컬린 페테르 네트제르, 아드리안 시타루 등의 감독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목록에는 라두 주데 역시 포함된다. 그의 영화는 정치적인 색채를 강조하는 초현실주의적 색감으로 영화제를 통해 차츰 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현실에 몰입하기보다는 현상을 관찰하고 개인의 사소한 상황을 통해 부조리한 세계의 실체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꾸준히 창작했다.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그의 아홉 번째 장편 <배드 럭 뱅잉>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이 영화는 한 학교에서 벌어지는 개인과 권력간의 위선적 관계의 실체를 매우 구조적인 방식으로 탐구한다. 유출된 비디오로 사건이 발생하지만, 정작 우리 삶에 유해한 것은 우리를 둘러싼 주변과 역사 그 자체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영화는 끊임없이 일깨운다.
혼돈에 빠진 세계 전체를 보라
내러티브는 인트로를 제외하고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타나는 인터넷 속 동영상이 충격적인 프롤로그를 형성하고, 이어서 <일방통행>이라 이름 붙은 1부 상황이 드러난다. 1부의 내용은 언뜻 단순하다. 부쿠레슈티 시내를 걷는 여주인공의 모습만이 연속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걷고, 또 걷는다. 꽃시장에서 꽃을 사서 잠시 교장의 집에 들렀다가, 쇼핑센터와 서점 등지를 거쳐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행동의 전부다. 이 과정에서 남편과의 통화를 통해 동영상이 지속적으로 인터넷에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주인공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잠시 약을 먹고 책을 읽을까 시도하지만, 이내 실패한다.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혐오 사건에 대해 개인은 그저 무력할 따름이다. 감독 역시 주인공의 고뇌에 집중하지 않는다. 롱테이크의 롱숏 화면으로, 인물을 둘러싼 주변의 환경을 더 강조해 보여줄 뿐이다. 그런 면에서 1부의 내용은 해체적이다. 도시 한가운데를 걷는 에미를 통해 관객이 느끼는 것은 인물의 내면이 아니라, 오히려 혼잡스러운 부쿠레슈티 시내의 상황에 대한 불안에 더 가깝다. 도로를 벗어나 서 있는 수많은 자동차들,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 과도하게 섹슈얼한 건물 벽의 이미지, 그리고 상업광고마냥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선거용 포스터가 훨씬 더 마음이 쓰인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거리를 횡단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들의 주변에 세계를 장악한 병마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거리 곳곳에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기호가 흩뿌려져 있다. 물론 오염된 도시 문화는 단 한명의 악당이나 단일 이데올로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진짜로 천박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포스트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임을 관객은 직시한다. 혼돈에 빠진 세계 전체를 이 영화의 첫 번째 챕터는 꾸짖고 있다.
모든 내러티브에는 순서가 있지만, 이 영화의 2부는 그것이 절대적인 법칙이 아님을 증명해 보인다. 2부의 제목은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이다. 1부가 다큐멘터리의 질감에 가깝다면, 2부의 표현법은 장뤽 고다르가 자주 사용하던 콜라주나 아카이브 몽타주의 표현방식에 더 가깝다. A부터 Z까지 71개의 단어들이 차례로 나열되면서, 감독이 고른 ‘20세기 루마니아 사회에 대한 이미지 사전’이 완성된다. 약 25분간 진행되는 이 가운데 챕터에서 몇 가지의 알파벳은 중복되며, 또한 몇몇의 알파벳은 아예 생략되어 등장하지 않는다. 이 부분의 구성에 관해서는 감독이 주간지 <파리마치>와의 인터뷰에서 의도를 밝힌 바 있다. 그는 “내러티브를 깨고 싶었다”고 말하며 “전작의 방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플로베르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고 설명한다. 이유는 그의 전작들 중 <어퍼케이스 프린트>(2020)와 방식 면에서 구분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라두 주데는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을 참고해서 2부의 연출을 시도한다. 그 결과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처럼 에세이필름의 구상을 띤 시퀀스가 완성된다. ‘여성혐오, 자유, 가부장적 사회,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 등 다양한 키워드가 등장해서 독재와 편견, 그리고 역사의 감춰진 진실에 대한 직설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영화 속 개인의 ‘동영상 유출’ 사건은 거대 담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미미할 뿐이다. 영화는 그보다는 정치적 이유에서 인류를 꾸준히 괴롭혀온 ‘전체주의’의 변형된 행태, 혹은 ‘포스트 자본주의’라 불리는 거대 자본에의 잠식을 고발한다. 과거 총탄을 다루던 그 어떤 행위들보다 더, 현대의 디지털 독재는 끔찍한 범죄를 자행하고 있다. 실제로 인터뷰를 통해 라두 주데는 ‘캔슬 컬처’의 행태가 새로운 권력이 되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터넷과 SNS가 형성하는 포스트 전체주의의 성향을 영화는 개인의 이야기로 풀어낼 따름이다. “공산주의 독재는 아주 겸손한 독재였다”는 표현에서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부와 연결되는 3부의 내용이 나타난다. 3부의 제목은 <실천과 빈정거림(시트콤)>이다. 마침내 주인공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학부모들과 마주한다. 그들과의 만남, 일 대 다수의 논의는 토론보다는 ‘종교재판’에 더 가까운 양상을 보인다. 학교에 모인 부르주아 계층의 학부모들은 흡사 루이스 부뉴엘의 인물인 양 행동한다. <은하수>(1969)와 비슷한 종교적 분위기를 띠는 교내의 공간에서, 그들은 이교도의 설교에 대항하는 신도들처럼 주인공에 대항한다. 흥미롭게도 이들이 가장 먼저 취하는 행동은 ‘태블릿PC를 통해 동영상을 반복해서 시청’하는 일이다. 그 속에는 외설적 행위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자료는 물증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주축으로 엔터테인먼트적 콘텐츠로 소비된다. 하나의 외설이 더 넓은 의미의 총체적인 외설과 마주한다. 이러한 병치는 흥미롭다. 영화와 관음증 사이의 관계가 이 과정에서 명확히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제 관객은 영화의 외부에서 영화에 대한 사유를 마음껏 떠들 수 있다. 관객뿐 아니라 주인공의 입장에서도 거리두기의 효과는 존재한다. 에미는 자신의 사생활이 외설이 되어 떠다닌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상황의 진부함도 깨닫는다. 그렇지만 이토록 몽매한 현실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어쩌면 이 상황 자체를 타파하는 것이 판타지다. 그런 면에서 라두 주데가 택한 결말에 대한 해법이 충격적이다. 그는 “아이들을 공포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부모들에게, 진정한 위험이란 이 세계를 살아가는 것 자체임을 깨닫게 만든다.
‘대중영화를 위한 스케치’란 부제의 의미
마지막 챕터는 숫자 없이 ‘세 가지 가능한 결말’이라고 적혀 있다. 영화는 차례로 세 가지의 가능성을 분리해서 보여준다. 첫 번째 결말은 ‘이 영화는 그냥 농담이었다’라는 제목이다. 다수결에 의해 에미는 학교에 머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피엔딩은 말 그대로 헛것이다. 왜냐하면 편견으로 가득 찬 이 미친 세상에 행복한 결말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두 번째 ‘잠시, 아주 잠시 당신의 시간을 빼앗았다’라고 적힌 또 다른 결론이 소개된다. 에미가 학교에 머물 것인지에 대한 부정적인 개표 내용이 공개되고, 그녀는 즉각 결과를 수용한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고, 사람들은 여전히 남의 불행을 지켜보길 선호한다. 그리고 세 번째 ‘이 영화는 그냥 농담이며 여기서 끝이 난다’라는 최종장이 등장한다. 다수결에 의해 에미는 교단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만 수긍하지 못한다. 그래서 변신한다. 남근 형상의 무기를 휘두르며 거미줄을 내뿜는, 미국식 히어로의 모습이 된다. 불가능한 결말을 유도하기 위해서 영화가 택한 방식은 거칠고 돌발적인 코미디의 역설이다. 주인공은 예수가 되지도, 순교자가 되지도 않는다. 대신 자본주의 세계의 영웅, 슈퍼히어로의 외양을 입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상대방이 던지는 멘트는 “유대인 맞다니까”라는 감탄사다.
다시금 영화의 제목을 되돌아본다. <배드 럭 뱅잉>이란 타이틀의 아래에는 ‘대중영화를 위한 스케치’란 부제가 달려 있다. 그렇다. ‘대중영화’다. 동시대 사람들이 즐겨보는 엔터테인먼트 드라마들은 섹슈얼리티의 요소를 얼마나 미묘하고 매력적으로 감추는지에 의해 성공 여부가 판가름난다. 라두 주데의 이번 영화가 ‘유출된 동영상’을 소재로 택한 것은 어쩌면 자조처럼 보인다. 시네마 역시 전세계에 넘쳐나는 자본주의의 부유물 중 하나일 뿐임을, 그는 인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스케치’의 형태로 내놓는다. 이 점에 관해서는 보도자료에 그 의미가 밝혀져 있다. 감독은 앙드레 말로가 이야기한 ‘스케치’의 의미를 자신의 영화에 적용시킨다. 앙드레 말로에 따르면 들라크루아는 완성작 외에도 수많은 밑그림을 보관했고, 그가 소장한 스케치의 예술적인 품질이 최고 수준의 완성작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한다. 라두 주데는 이 논리를 자신의 영화 제작에도 활용한다. 그리하여 형체가 완성되기 전, 원석 상태로 구성된 작품을 대중 앞에 내놓는다. 바로 <배드 럭 뱅잉>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쩌면 냉소적인 태도에 화가 날 수도, 세상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묘사에 싫증이 날 수도 있지만, 환멸을 느끼기에 이 영화의 질감은 지나치게 우스꽝스럽다. 이토록 거친 돌격이 주는 감흥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파악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를 깨닫게 만드는 일이 시네마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우아하게 저급한 것을 감추면, 우리는 포악하게 나쁜 것을 들춰내야 한다. 라두 주데는 주장한다. 이 태도를 호불호로 나누어 취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