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탐정 다아시 경>이라는 고전소설이 있다.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탐정이자 첩보원인 다아시 경의 모험을 그리는 연작 시리즈로 셜록 홈스와 007을 반씩 섞은 듯한 이야기다. 그런데 배경 설정이 조금 복잡하다. 우선 이 작품 속 영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과는 조금 다르다. ‘다아시 경’ 세계의 역사 속에서는 사자왕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에서 살아남아 서유럽을 정벌한 모양이다. 그래서 나라의 이름도 영불제국. 아무리 소설이래도 이웃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다니, 대체 남의 나라 국민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싶지만, 아무튼 ‘대체역사’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SF 장르다.
이 소설에는 대체역사 외에도 한 가지 설정이 더 붙는데, 바로 ‘마법’이다. 다아시 경이 사는 세상에는 마법이 존재한다. 그것도 ‘과학’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 속 마법은 체계적인 규칙을 따르는 일종의 지식이고 기술이다. 마법이 없으면 산업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다. 대학에서 이론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직업 전문인들도 피곤한 얼굴로 마법적인 일을 생업 삼아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마법 수사 전문가들이 찾아와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다아시 경 시리즈는 이런 설정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판타지와 SF, 추리물과 첩보물을 넘나들며 다양한 재미를 일으킨다. 이 작품의 세부 요소들을 뜯어보는 것도 물론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할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지점은 내가 왜 이 작품을 SF라고 생각하는가다. 따지고 보면 마법으로 살인범을 잡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더 깊이 따져보면 수사물이나 첩보물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다아시 경 시리즈는 판타지보다는 SF 장르로 이야기되는 편이다. 사람들이 흔히 판타지 장르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어딘지 결이 다르기도 하고.
광선무기로 유령을 퇴치하는 영화 <고스트버스터즈>는 심령 퇴마극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사람들은 SF에 가깝다고 말할 것이다. <스타워즈> 속 초능력인 ‘포스’는 여러모로 과학과는 담쌓은 개념이지만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SF라고 불린다. 특히 조지 루카스가 쓸데없이 미디클로리언 어쩌고 설정을 덧붙인 후로는 더더욱.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넘치도록 많다. 늑대인간이니 뱀파이어니 이런 것들이 바이러스나 유전자 개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식의 설정을 붙여 과학자들이 음침한 실험실에서 피를 뽑고 주사를 놓으며 과학적인 척하는 작품만도 수백편이 넘을 것이다. 그게 SF냐고 물으면 답하기 곤란하지만.
약간 다른 이야기로, <엑스맨>이 SF냐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 SF라는 데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엑스맨>의 장르가 뭐냐고 묻는다면 슈퍼히어로라는 답변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인 한국영화 <마녀>는 어떨까?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좀더 SF 같다. <염력>은? 여기서부터는 조금 의견이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SF라고 생각하며 시청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심지어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 초능력을 쓰는 데도 그렇다.
일본의 대표적인 초능력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은 누구도 SF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개 이 작품은 ‘초능력 배틀물’이라고 일컬어진다. 반면 <마녀>는 초능력자들이 영화 내내 치고받고 싸우지만 결코 ‘초능력 배틀물’은 아니다. <염력>의 장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코미디’나 ‘가족 신파극’이라고 답할 것이다. <별에서 온 그대>는 ‘로판’(로맨스 판타지)의 영역에 더 잘 들어맞는 편이고.
이쯤 되면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앞의 두 문단에는 각기 다른 기준의 분류법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이 분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층위의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는 평등한 덩어리들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이 SF면서 슈퍼히어로일 순 있지만, 통상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둘 중 하나가 더 크게 자리 잡게 마련이다.
<귀족 탐정 다아시 경>이 첩보나 추리 이전에 SF로 더 많이 이야기되는 이유는, 원래 SF에서는 첩보나 추리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추리물보다는 SF 장르에 속하는 이웃들과 더 결이 잘 맞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같은 이유로 <엑스맨>을 이야기할 때는 아무래도 SF보다는 슈퍼히어로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쪽이 공통점이 더 많으니까.
장르를 이야기할 때 흔히 소재나 주인공의 직업 같은 것을 기준점으로 삼기 쉽지만, 나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의 문관이 요괴를 쫓는 이야기더라도 그 작품은 SF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들로부터 계보를 이어받고, 영향을 주고받고, 규칙들을 접목해왔는지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작품이 SF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과학적인 소재나 과학적 탐구 방식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그간 SF라고 불린 작품들에서 으레 보아왔던 인물, 장면, 이야기 패턴 같은 것들의 유사성이 느껴지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모여서 서로를 상호 참조하는 모순의 굴레를 총칭하는 단어가 장르인 셈이다.
그러니 도대체 SF가 무엇인지 물어보아도 답을 드리기가 힘들 수밖에. 철수네 집은 영희네 옆집이고 영희네 집은 철수네 옆집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