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당선자. 20세기의 공포는 끝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이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알려지지 않은 요소로서 무의식을 발견해야만 했다면, <배드 럭 뱅잉>에서 인용된 무의식에 관한 농담은 그것이 또한 사회적인 구성물임을 이야기한다. 다음은 영화의 2부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의 ‘무의식’ 항목이다. 별다른 의학적 원인 없이 팔을 쓰지 못하던 노인이 정신분석가를 찾는다. 하지만 “하일 히틀러!”라고 정신분석가가 외치자 노인은 팔을 들어올려 나치 경례를 한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마비와 정상성의 상태를 오가는 노인의 팔이다. 나치 경례에 대한 금지 유무에 따라 마비되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던 팔이 다시 결합의 상태를 갖는 것처럼, 인간 신체의 부분들은 그것이 기입된 사회적 맥락에 의해 몸에서 분리되기도 하고 결합을 유지하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 포르노와 다를 바 없는 섹스 비디오에서 에미(카디아 파스칼리우)의 신체가 마치 절단된 것처럼 각각의 부분으로 분절되고 확대되어 보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배드 럭 뱅잉>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은 에미가 남편과 함께 찍은 섹스 비디오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그 이후, 오프닝 타이틀이 지나가고 난 뒤에 에미의 유기적으로 연결된 몸 전체가 출현하면서, 포르노 영상에서 특히 성기 노출을 목적으로 신체의 일부분만 클로즈업한 이미지들과 충돌할 때다(물론 국내 개봉을 위한 감독의 자기 검열 버전보다 무삭제 버전이 이를 확인하기에는 더욱 적절하다).
절단된 신체들
절단된 신체의 이미지는 결말에 등장하는 딜도에 이르기까지 영화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겨놓는다. 이를테면 영화의 1부 ‘일방통행’의 한 신에서, 카메라는 교장이 사는 집의 벨을 누르는 에미에게서 이동하여 한쪽 다리만 남은 부서진 마네킹과 길가의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올라온 식물을 차례로 보여준다. 세 가지 이미지의 조합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마네킹의 한쪽만 남은 다리가 앞선 비디오에서 나타난 에미의 절단된 신체를 상기시킨다는 것, 그리고 이를 상기시키는 과정은 결합된 신체로 존재하는 에미로부터 카메라가 시선을 돌리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1부에서의 지배적 양식이다. 거의 모든 숏이 시작될 때마다 카메라는 에미를 따라가는 듯 보이지만 이내 그를 시야에서 놓치며 주변의 사물들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에미의 결합된 신체를 보는 것을 중단시킨다. 이때 그 신체를 대신해서 보게 되는 주변의 사물들이란, 대부분 상품들과 그것들이 진열된 상점의 간판, 광고판들이다.
상품들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에미의 사적인 비디오가 인터넷을 통해 유출되어 포르노 영상으로 소비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인간의 신체 또한 절단하고 물신화함으로써 교환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이해된다(2부 ‘소사전’의 ‘포르노그래피’ 항목에 따르면, 이 단어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비롯되며 매춘부의 초상화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에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3부 ‘실천과 빈정거림(시트콤)’에서 벌어지는 마녀재판 이전에, 그에게 절단된 신체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의 억압이 거리마다 어떤 모습으로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1부에서 먼저 드러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에미가 자신의 진로를 중단시킨 자동차 주인에게 항의하는 신이다.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그는 뜬금없는 차주의 욕설에 의해 성기로 환원된다. 카메라는 그곳을 어쩔 도리 없이 빠져나가는 에미로부터 패닝하며 도로 맞은편을 비추고, 이번에는 양팔이 떨어져나간 마네킹이 거리에 버려져 있다.
하지만 1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마지막에 등장하는 낡은 영화관이다. 에미에게 요구되는 절단된 신체의 이미지는 결정적으로 지난 세기에 영화가 생산하고 분배해온 이미지들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부 ‘소사전’의 ‘클로즈업’ 항목에는 파솔리니의 사례가 언급된다. 그는 영화 <마태복음>을 찍으면서 바리새인들을 파시스트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캐스팅하고자 했다. 그러나 캐스팅된 배우들은 모두 공산당원과 노조원이었다. 여기에서 텍스트는 에미가 거울을 들고 있는 이미지와 조합된다. 더 정확하게는 에미의 정면 모습과 자신이 들고 있는 거울에 반사되어 몸으로부터 떨어져나온 듯 보이는 그의 옆얼굴이다. 표제어 ‘클로즈업’은 바로 이 옆얼굴의 절단된 거울상이, 그것이 원래 결합되어 있던 신체와 맺는 관계를 의문에 붙인다. 따라서 포르노 영상과 관객에게 영화라고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구분은 때로 무의미하다. 두 종류의 이미지는 모두 재현된 거울상이며 그 이미지와 현실이 갖는 관계에서 차이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중단의 모티프
이렇게 해서 1부의 영화관 ‘부쿠레슈티’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파사드는 단순한 농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게 된다. 2부 ‘소사전’의 ‘영화’ 항목에서 인용된 크라카우어의 말에 의하면, “극장 스크린은 아테나의 거울 방패다”. 이 방패를 이용해서 돌로 변하지 않았던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벴듯, 이것은 재현된 거울상을 통해서만 공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인간이 가진 조건에 대한 20세기적 표현이다. 크라카우어의 이 전언에 따라 <배드 럭 뱅잉>은 에미의 절단된 신체를 섣불리 회복시키려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에, 에미의 신체로부터 들여다볼 수 있는, 현재와 20세기를 비롯하여 그 이전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1부에서 언급된 찰스 레즈니코프의 시집 <증언>처럼) 온갖 종류의 공포를 긁어모은다. 그것이 특히 2부에서 아카이브 영상들과 인용된 텍스트들, 또는 감독 라두 주데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는 재료들에 주어진 역할이다.
다만,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인용들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공포의 목록을 만들어낸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루마니아 사회의 배면에 깔린 폭력의 역사다. 그 역사는 집시, 유대인, 어린이, 여성, 노동자 등 혐오의 대상을 골라가며 언제나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때 인용된 텍스트들의 역할은 단순히 목록의 표제어와 이미지에 대한 설명 혹은 주석에 그치지 않는다. 텍스트들의 인용은 오히려 이미지가 기입되어 있던 폭력의 역사를 중단시키며, 그것을 일종의 끔찍한 농담으로 만들어버린다. <배드 럭 뱅잉>에서 중단은 분명 가장 중심적인 모티프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3부 ‘마녀재판’ 또한 ‘세 가지 가능한 결말’로 인해 갑작스러운 중단을 맞게 된다. 어쨌거나 영화는 여기에서 농담처럼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들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이 영화에서 재현하고자 한 폭력의 역사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