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김 기자의 미(디어)수다
※드라마 10회 ‘손잡기는 나중에’편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미드(미국 드라마)에서는 개나 소나 키스하지만, 한국 드라마는 다르다.”(웹드라마 <드라마월드> 중)
해외 시청자들에게 케이(K)드라마의 로맨스는 특별합니다. 한드는 초반에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찬찬히 따라가다가, 중반부에서 ‘첫 키스신’을 선보인 뒤 본격적인 ‘꽁냥꽁냥’ 애정신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엔에이)도 중반부를 넘긴 10회 ‘손잡기는 다음에’편(7월28일 방영)에서 마침내 우영우(박은빈)와 이준호(강태오)의 첫 키스신을 선보였습니다. 10회에 걸쳐 두 사람 사이의 호감이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함께 지켜본 시청자로서는, 절로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었죠. 이날 시청률은 전국 15.2%(닐슨코리아 집계)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진 이 에피소드에 등장한 법정 사건은 꽤 무거웠습니다. 지적 장애를 지닌 신혜영(오혜수)을 상대로 성폭력(준강간)을 한 혐의를 받는 양정일(이원정)의 재판이 나온 건데요. 양정일은 “신혜영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며, 신혜영의 장애를 이용한 성폭력이 아니라 연인 사이의 성관계라고 주장합니다. 우영우는 그의 이야기를 믿고서 변호를 맡고요.
에피소드 중간까지는 양정일이 데이트 비용을 모두 신혜영의 돈으로 해결하고, 과거에 신혜영이 아닌 다른 지적장애 여성을 상대로 비슷한 일을 벌인 사실이 드러나는 등 그의 주장이 ‘거짓’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뉴스에 등장하는 장애여성 성폭력 사건들과 비슷해 보입니다.
문제는 신혜영이 우영우와 법정 밖에서 따로 만나 “(양정일을) 사랑해요. (그가) 감옥에 가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죠. 우영우와 신혜영,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그 자체로도 참 놀라웠는데요.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한 명도 보기 쉽지 않았던 장애여성 캐릭터가 두 명‘이나’ 등장하면서, 두 마디 이상의 의미 있는 대사를 주고받기 때문이었죠. 신혜영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우영우는 양정일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서 변호를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양정일은) 제비 같은 새끼”인 걸 알고도 “사랑한다”는 신혜영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꾸는데요. 우영우는 신혜영이 법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직접 증인으로 나설 것을 설득합니다.
“장애인한테도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질 자유는 있지 않습니까? 신혜영 씨가 경험한 것이 사랑이었는지 성폭력이었는지, 그 판단은 신혜영 씨의 몫입니다. 그걸 어머니와 재판부가 대신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세요.”
■ ‘사랑이냐 폭력이냐’ 이분법 구도의 문제
사건은 양정일이 유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신혜영이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요. 10회가 품은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성)와 친밀한 관계, 그리고 폭력’이라는 화두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98년 창립 때부터 장애여성의 사랑과 연애, 섹스 등을 다양한 장애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해온 인권단체 ‘장애여성공감’(이하 공감)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공감은 2001년부터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도 운영해왔습니다.
지난 4일 <한겨레>와 전화로 만난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는 “실제 장애여성들의 연애는 신혜영에 가까운 삶을 산다”며 “10회 에피소드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랑이냐 폭력이냐’라는 이분법적 구도에만 가둬둔 채 당사자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문제의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인식 수준이 투영된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관계든 사랑만 있거나 폭력만 있는, 그런 관계는 현실에 드물다고 생각해요. 많은 관계가 그렇듯, 신혜영과 양정일의 관계에도 사랑과 폭력이 공존했다고 봤어요. 신혜영이 경찰 진술에서 ‘성행위가 시작되자 기분이 나빠졌다’고 말하는 걸 보면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 즉 성폭력으로 볼 수 있죠. 동시에 양정일과 나눈 둘 만의 친밀한 대화에서 느낀 즐거움 같은 것도 있었을 거고요.
그런데 드라마가 보여줬듯이 법정에서는 신혜영이 겪었을 복잡한 심경과 맥락, 신혜영 입장의 서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요. 신혜영이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자격’이 있는가와 관련한 신혜영의 장애 정도에 관심이 집중되죠.”
‘사랑 대 폭력’이란 구도는 유무죄를 다투는 형사사건에서 특히 강조될 수밖에 없는데요. 문제는 비장애인 시민 다수가 이러한 형사사건을 통해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 이슈를 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대표는 말합니다. “우영우의 연애가 보여주듯 장애여성들은 법정 바깥에서, 일상 곳곳에서 여러 맥락으로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고 있어요. 하지만 장애여성이 범죄에 해당하는 폭력의 피해자가 됐을 때, 혹은 폭력인지 아닌지를 증명해야 할 때야 공론화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장애여성의 다양한 섹슈얼리티 실천, 사랑과 폭력 사이의 스펙트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요.”
장애여성 피해자들이 성폭력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피해자다움’은 물론, ‘장애인다움’이란 관문을 함께 통과해야 합니다. 만약 신혜영이 양정일과의 관계에서 느낀 사랑과 폭력을 구분해서 설명했다면, 두 관문 모두 통과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성폭력 피해자 맞아?’ ‘지적장애인 맞아?’라는 의심에 시달렸을 테니까요. 폭력을 인정받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장애여성이 피해 서사 외의 이야기를 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참조: ‘장애여성다움’에 가둔 그 보호는 가해였다)
‘동료 시민’을 만날 기회의 부족
실제 공감이 지원한 지적장애 여성 상담 사례에는 신혜영처럼 연애와 폭력이 얽혀있는 경우들이 존재합니다. 경제적 착취나 물리적 폭력이 친밀한 관계, 특히 연인 관계에서 발생한 겁니다. 장애여성 당사자가 스스로 관계를 단절해야겠다고 결심하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린 사례도 있었습니다. 헤어질 결심에 시간이 걸린 이유는 장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관계 단절 ‘이후’의 삶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었죠.
이진희 대표는 통화 중간에 제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김 기자님. 양정일 같은 사람은 장애여성뿐만 아니라 비장애 여성에게도 해롭잖아요. ‘섹스를 해주지 않으면 삐진다’는 건 가부장적 사회의 성문화를 답습한 모습이기도 하고요. 연애 관계에서 폭력과 사랑이 연속선상에서 뒤섞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구분해서 매 순간 협상하는 건 비장애 여성에게도 어렵고 장애여성에게도 어렵죠. 그렇지 않을까요?”
순간, 저와 친구들이 겪은 숱한 ‘실패’의 경험들이 스쳐 지나가더군요. ‘봄날의 햇살’ 최수연 역시 “제비 같은 새끼”를 만났다는 사실도요. 이 대표는 물음에 이어 “양정일 같은 사람의 위험이 장애여성에게 극대화되는 건, 장애의 문제라기보다 장애를 둘러싼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우영우는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판타지”라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죠. 하지만 사회현실이 반영된 판타지입니다. 이 대표는 ‘우영우 판타지’가 우영우 같은 특출난 장애인의 희소성 문제가 아니라, 우영우를 둘러싼 관계, 장애인을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라고 봅니다. 우영우에게는 우영우의 의견과 욕구를 말할 수 있는 양육자가 존재하고, 연애 고민을 나누는 친구들이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장애여성들은 친밀함에 대한 욕망은 있지만, 사회적 자원과 관계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선택지 자체가 협소한 거죠. 동료 관계에서 서로 연애 실패 경험을 나누고 유사 위험을 제거하는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신혜영처럼 그런 관계가 부재한 거예요. 함께 얘기할 수 있는 동료 시민으로서의 친구 관계를 만들 기회가 부족한 것, 그게 결국 시민권의 문제고 차별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이진희 대표와의 통화를 나누며, 우영우는 신혜영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 하고, 그 목소리를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게 하려고 애쓴 게 떠오르더군요. 드라마는 우영우에게 번뜩이는 영감이 떠오를 때 고래 장면을 넣는데요. 10회에서 고래 장면은 우영우가 신혜영이 자신에게 건넨 말(“나 혼자 있어요. 바학(바리스타 학원) 가면”)의 의미를 알아차린 순간뿐이었습니다.
이진희 대표는 “우영우가 신혜영의 말을 신혜영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파악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성폭력 사건을 지원하는 상담소 활동가들이 당사자의 맥락과 언어를 파악해가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사자의 맥락과 언어를 파악해야 당사자의 욕구, 의도, 동의 여부 등을 파악하고 곁에서 조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는 또한 “드라마에서 의사의 진술이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의 말은 충분히 의미 있고 장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의 말은 어디까지나 ‘참조’용일 뿐, 신혜영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신혜영의 서사는 한 회로 끝났지만, 우영우의 연애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영우의 애정신을 볼 때마다 신혜영의 얼굴이 함께 어른거리는데요. 드라마 속 신혜영과 현실의 신혜영들 모두 ‘다음 사랑’은 더 나은 관계이기를, 그 사랑을 또 다른 드라마들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겨레 김효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