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예년처럼 단편애니메이션 지원사업을 기다리던 창작자들은 당혹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서울산업진흥원(Seoul Business Agency, 이하 SBA)에서 올해부터 예산을 대폭 줄여 단편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을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은 애니메이션 발전연대를 꾸려 단 일주인 동안 9120명의 연명을 받아냈고 7월7일,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애니메이션 발전연대와 SBA는 거듭된 논의와 조율 끝에 7월29일, 다시 지원을 이어가기로 합의했다. 애니메이션 산업을 둘러싼 제도적 뒷받침의 필요성을 돌아보고 국내 애니메이션의 확장 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장형윤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회장, 강문주 애니메이션진흥위원회 위원장, 한창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선택전공 교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 SBA에서 단편애니메이션 지원 예산금을 크게 삭감하면서 업계의 반발이 있었다.
장형윤 SBA가 설립된 이듬해인 1999년에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주력 사업 부서였다. 시간이 지나 여러 부서들이 생겨나면서 콘텐츠본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숏폼, 뉴미디어까지 지원 영역을 넓혔다. SBA 측에 따르면 전체 예산이 깎이다 보니 다뤄야 할 콘텐츠는 많고 예산은 한정적이라 전면적인 삭감율 재조정이 불가피했다고 한다. 기존의 제작 지원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듯했다.
강문주 규탄 성명서에 9천여명이 연명했다. 사실 애니메이터의 업무 환경은 열악한 편이다. 보통 산업별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드러나는데 애니메이션 업계는 독립애니메이션이나 상업애니메이션 모두 전반적으로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이 지원마저 사라지면 더 힘들어질 거라는 공동의 위기의식이 드러난 듯하다. 특정한 누군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나의 이야기라고 이해한 것이다.
- 지난 7월29일 SBA와 애니메이션 발전연대가 협의를 마쳤다. 이전에는 3300만원씩 총 10편을 지원했는데, 6천만원에 총 3편을 지원하기로 조율했다.
장형윤 많이 아쉽다. 다만 없어질 뻔한 걸 그대로 유지하게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나라 단편애니메이션 지원처로 크게 한국콘텐츠진흥원과 SBA 콘텐츠본부가 있다. 현실적으로 콘텐츠진흥원에선 지원받기가 어렵다. 창작자들이 사업자를 두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감독 본인의 인건비는 책정할 수 없다. 오직 다른 스탭에게만 인건비를 줄 수 있다. 감독이 인건비 없이 작업해야 하는 상황에서 생활의 어려움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그런데 SBA 콘텐츠본부의 지원은 당사자에게도 인건비를 줄 수 있다. 국내 단편애니메이션 중 50% 이상의 제작지원을 차지한 만큼 중요성이 크다.
강문주 지원사업을 일단 살려놨다는 점에선 희망적이다. 애니메이션 업계와 관계부처가 앞으로 계속 협력하고 소통해서 조금씩 정상화해나가는 게 우리 모두의 숙제가 되었다. 산업관계자가 상호적으로 협력하고 소통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장형윤 해외 사례를 덧붙이자면 독립영화와 독립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캐나다 NFBC(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에서는 창작자에게 촬영 공간을 제공하고 스탭, 감독의 급여를 지원한다. 기본적으로 자국민 감독을 지원하지만 때에 따라 공동 제작하는 외국인 감독까지도 지원해준다. 우리도 애니메이션 산업이 초반에 자리잡을 때 이 기관을 모델로 삼으려 했지만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앞으로 장점을 구현할 수 있도록 잘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
- 지원금을 받아서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들어도 대중에게 노출될 통로가 적다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장형윤 다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일반 단편영화만큼 단편애니메이션도 많이 상영한다. 단편애니메이션의 위상은 단편영화와 별 차이가 없다. 단편영화를 보지 않으니 지원이 무의미하다고 반문하는 사람은 없는데 유독 애니메이션에만 그런 의문을 갖는다. 이제 국내 애니메이션도 칸영화제를 비롯한 안시, 자그레브 등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이 거듭 들려온다. 과거에는 이런 자리에 초청만 받아도 난리가 났다. 1999년 이성강 감독의 단편애니메이션 <덤불 속의 재>가 처음으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비디오 공식 경쟁부문에 진출했을 때 신문마다 기사가 나고 여기저기서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빈도수가 많아지니 그렇게까지 주목하지 않는 듯하다. 이 무감함이 사실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본다. 애니메이션 변방국가에서 중심국가로 성장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중적 접근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제작지원 근거가 약하다고 말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한창완 애니메이션은 빙하와 같다. 물 위에 떠 있는 빙하 조각은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다. 그런데 그 조각 아래엔 엄청난 빙하가 숨어 있다. 그게 바로 학생들이 계속해서 도전하고 집중하는 단편작들이다. 아래의 빙하가 떠올라야만 그 위의 빙하도 볼 수 있다. 마이너 시장에서 인재가 발굴될 때 메이저도 클 수 있지 않은가. 미국에 단편영화를 다루는 영화제가 많은 이유도 단편작으로부터 인재를 찾아내는 기회와 그 가치를 잘 알기 때문이다.
- 애니메이션이 수익으로 곧장 연결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애니메이터가 웹툰 시장으로 빠져나가는 흐름이 있다.
한창완 웹툰 시장이 워낙 기업형·스튜디오형으로 커지면서 많은 학생이 그쪽을 지망하게 된 건 꽤 오래됐다. 다만 그 안에서도 변화가 있다. 예전에는 작가가 플랫폼에 직접 연재하지 않으면 그 분야에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잘 구축돼서 개인 연재 작가와 스튜디오 소속 작가가 6 대 4 정도로 바뀌었다. 내년 즈음이면 5 대 5까지 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한명의 작가가 시나리오와 그림을 자신의 IP로 모두 보장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 과 학생들도 웹툰을 직접 연재하고 싶어 하는 유형보다는 큰 회사와 작화 작가로 계약해 연봉 받으며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워라벨이 중요한 MZ세대의 특성과 환경적 변화가 맞물리면서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의지와 목표가 뚜렷한 학생들을 애니메이션 분야에 남아 있도록 하려면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목으로 애니메이션 카테고리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축소하면 결국 학생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혀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 국내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아동 중심 콘텐츠라 성인 관객 입장에서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종종 제기된다.
한창완 영유아 콘텐츠가 많은 한국 상황을 문제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 아동물 제작에 힘을 쏟는 영국, 프랑스와 달리 미국, 일본에서는 영유아물을 거의 만들지 않는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아동물은 색깔·폭력성·노랫말 등 그 규제가 엄격하고 복잡해서 제작 자체가 어렵다고 한다. 큰 자본과 노력을 쏟아 만들었는데 학부모 단체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면 한 시즌 모두 내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위험성이 크다 보니 아동물보다 성인이나 고등학생 이상의 하이 타깃 콘텐츠를 제작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영유아 콘텐츠에 편향된 게 아니라 한국의 특화된 능력인 것이다. 이 콘텐츠를 개발해서 OTT 네트워크를 타고 전세계 시장에 나가면 작은 내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이 될 것이다.
강문주 100% 동의한다. 사실 국내 영유아물은 아직 해외에 제대로 진출한 경험이 없다. 우리가 자리 잡은 부분을 더 강화시켜서 해외 진출을 제대로 한 다음에 장르 다양성에 대한 고민을 해도 늦지 않다.
- <명탐정 코난>이나 <짱구는 못 말려>와 같이 세대를 초월해 오래 방영된 시리즈물이 한국에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장형윤 <달려라 하니>나 <날아라 슈퍼보드>가 방영되던 과거부터 짚어보자. 국산 애니메이션이 막 자리잡던 때 산업 모델을 잘못 채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방송국 중심으로 돌던 시절이라 작품의 저작권이 방송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좋은 사업 모델을 세웠다면 자체 제작물이 더 성행하고 발전했을 텐데 그 기회를 잘 풀지 못했다.
강문주 만화영화라 하면 주로 아동용으로 인식한다. 아직 경제력을 갖지 못한 어린이들은 시장논리에 의해 쉽게 배제되어 이 소비층을 위한 시리즈물은 크게 조명받지 못한다. 애니메이션은 메타버스, NFT, VFX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는데도 만화영화의 손익계산으로 평가하는 건 너무 근시안적이다. 조선업이나 자동차가 발전하기 위해 철강 산업이 필요하듯 더 거시적 관점으로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국가가 애니메이션을 육성할 의무가 있다는 애니메이션 진흥법이 생겼으니 앞으로가 더 중요할 것 같다.
한창완 일본의 경우 만화 시장에서 작품이 인정받는 순간 바로 애니메이션 제작위원회를 구성해 극장판 제작에 돌입한다. 웹툰의 애니메이션화가 무척 체계적이다. 얼마 전 네이버웹툰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사 ‘로커스’를 인수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스템처럼 웹툰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IP까지도 네이버가 보유하려는 것이다. 다른 나라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맡길 경우, 일정 지분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국내 애니메이션 회사 입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좋은 작품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IP를 많이 가진 국내 플랫폼과 함께하며 몸집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