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우드스톡 1999>
여름,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 그중에서도 1969년 8월 뉴욕에서 펼쳐진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물리적인 규모로나 역사적인 의미로나 인류사의 가장 거대한 축제였다. 그리고 1999년 여름,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다시 열린다. 하지만 30년이라는 간극만큼 축제의 성패 역시 갈렸다. 평화와 사랑이란 이름의 우드스톡은 온데간데없이 99년의 우드스톡이 온갖 폭력과 혐오의 중심지로 탈선한 탓이다.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우드스톡 1999>는 이런 우드스톡의 절망적 전환을 시대의 변화에 빗대 설명한 다큐멘터리다. 약 30만명이 운집했던 축제의 열기를 생생하게 담아낸 자료화면 속엔 방화, 마약, 성폭력, 약탈 등 갖은 범죄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축제에 참가했던 기획자, 관중의 인터뷰도 3일간의 세기말 아포칼립스를 되새긴다.
<씨 비스트>
오랫동안 인간들은 거대 해양 생물종인 씨 비스트를 사냥하며 왕국을 발전시켰고, 사냥꾼은 사회에서 영웅적 대우를 받았다. 씨 비스트와의 싸움으로 사냥꾼들이 계속 목숨을 잃자 인간과 그들의 관계는 나날이 악화된다. 하지만 사냥꾼 부모를 잃은 소녀 메이지, 일류 사냥꾼 제이콥이 악명 높은 씨 비스트 ‘레드 블래스터’의 인간 친화적인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후 우정을 쌓아가면서 지난했던 싸움의 진실을 파헤친다. 동화는 늘 진중한 시론을 써야 한다. 이는 동화의 목적이 미래를 일구어갈 아이들에게 일종의 지침서가 되며 그만큼의 책임감을 수반해야 한다는 이유에 있을 테다. <씨 비스트>는 역사와 지배 관계가 어떠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뿐이며 그러므로 언제든 고쳐 쓸 수 있다는 시대의 담론을 보여주는 동화로 작동한다.
<어나더 라운드>
“십분 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이상의 <권태> 속 어구는 마치 <어나더 라운드>가 그리는 중년 남성 마르틴의 무력감과 닮았다. 형편없는 교사이자 볼품없는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일상을 간신히 버텨가던 마르틴은 친구들과의 지속적 음주를 통해 젊은 날의 활력, 인생의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이내 훌륭한 스승과 좋은 남편, 아버지의 위상을 되찾는 듯하지만 술의 마력이 그렇듯 술기운이 사라진 후 그의 삶은 더 깊은 싱거움에 빠지기에 이른다. 삶의 맛을 잃어가는 중년의 위기와 술이라는 한시적 각성제의 적절한 배합, 음주의 과정과도 같이 흐르는 영화의 큰 감정적 낙폭을 마스 미켈센의 애잔하면서도 순수한 얼굴이 자연스레 주조해낸다.
<로그 인 벨지움>
거울을 보며 청하는 악수. 손을 맞잡을 수 없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을 무위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 시작될까. 배우 유태오가 직접 연출하고 출연한 <로그 인 벨지움>엔 이에 관해 직관적인 답변이 적혀 있다. 팬데믹으로 인한 도시 봉쇄에 드라마 촬영이 중단된 유태오는 벨기에 호텔에 몇주간 고립된다. 무료한 일상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요리하고, 운동하고, 산책하러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그렇게 카메라 속의 자신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1인2역으로 대본을 읽고 인터뷰하며 카메라를 거울과 같은 자아 탐색의 도구로 마주한다. 그러니 거울을 보며 악수를 청하고, 말하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비합리적 일탈이 때론 나조차 낯선 나의 모습을 새로이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영화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