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김병규 평론가의 '외계+인' 1부와 '큐어'
2022-08-17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영화의 분신술

두편의 ‘외계인’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낯선 존재를 다루는 영화의 방법을 생각해봤다.

<외계+인> 1부

최동훈의 영화에서 흥미롭게 생각하는 순간은 쌍둥이라는 설정에 관한 연출자의 일관된 관심이 드러날 때다. <범죄의 재구성>의 쌍둥이 형제와 <암살>의 안옥윤과 쌍둥이 언니 미츠코, <전우치>에서는 쌍둥이로 표현되는 대신 전생에 마주친 여인과 똑같이 생긴 현대의 인물 서인경이 등장한다. 이런 영화적 분신(分身)들을 최동훈은 적극적으로 배치해왔다. 똑같은 외모를 가진 쌍둥이의 출현은 목격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정체를 숨기는 속임수를 만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반대의 삶에 던져진 인물들의 운명적 소용돌이를 영화에 도입하는 기제로 쓰인다. <암살>의 주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면에서 안옥윤은 암살 대상인 친일파 아버지가 미츠코를 살해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거울이 깨져버리자, 건조한 임무의 수행자이던 안옥윤에게 멜로드라마적 정념의 복수자라는 면모가 덧붙는다. 안옥윤은 죽은 미츠코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안옥윤/미츠코에게 주어진 서로 다른 임무를 통과한다. 이처럼 최동훈의 쌍둥이들은 한쪽이 잠입과 속임수로 이루어진 활극의 절차를 담당할 때, 다른 한쪽은 감상주의적 정서로 가득한 사연을 준비한다.

두개의 세계를 잇는 하나의 인물

<외계+인> 1부에서는 직접적으로 쌍둥이를 지시하는 소재가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전우치의 도술을 미래적 테크놀로지로 번안한 듯한 ‘썬더’의 여러 분신과 현대와 고려 시대를 오가는 이안의 두개의 삶을 불러온다. 이야기의 핵심은 후자에 있다. 이 영화는 최동훈의 연출작으로는 예외적으로 인물들 사이에서 복잡하게 작동하는 속임수가 없다. 상황이 전개되는 지점마다 자잘한 눈속임과 거짓말은 활용되지만, 서사의 도착지는 명확하다. 현대 시점의 어린 소녀와 고려 시대의 천둥을 쏘는 여인이 실은 같은 인물이라는 것. 단절된 것처럼 보이던 평행한 두 세계는 이안이라는 인물의 연대기를 통해 하나의 흐름을 통과하는 연결된 시공간으로 밝혀진다. 층위가 다른 시공간을 잇는 최동훈의 열망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전우치>라는 선례가 있을뿐더러 쌍둥이라는 설정이 가하는 서사적 변형은 같은 조건에서 태어나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거하게 되는 자들을 비추며 최동훈이 만드는 이야기의 이면적 성격을 예증해왔다. 하지만 그는 이런 강박적인 연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이물감을 지우지 않았다. 과거와 현대, 족자의 내부와 바깥, 영화 세트장과 현실의 공간을 오가던 <전우치>의 마지막 장면에서 전우치는 도술을 사용해 촬영장 벽지에 붙은 해안가로 넘어간다. 이국적인 해변의 풍광 위로 그래픽임이 분명한 노란 연이 지나가고 전우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린다. “여기가 바로 바다?” 영화는 그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수습하지 않은 채 끝나버린다.

전우치가 보여주는 마지막 표정에는 자연스럽게 뒤섞이지 않는 이질적 공간을 접하는 데서 발생하는 이물감이 남겨져 있다. 어쩌면 최동훈은 이 결말에서 전우치가 느끼는 이질적인 감각을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서로 다른 층위의 세계를 도약하는 모험적 대중영화가 갖춰야 할 자질이라 판단했을지 모른다. 이러한 판단은 현대와 고려를 오가는 이안의 서사적 운명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를 한 인물의 배경으로 포획하는 시도로 펼쳐진다. 모든 것은 이안의 변화무쌍한 궤적으로 설명된다. 그런 조건에서라면 도술과 외계 테크놀로지의 결합도, 현대와 고려의 융화도 무람없이 성립하리라고 전제하는 순진함에 가까운 믿음이 <외계+인>을 선명하게 관통하고 있다.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이미 적지 않은 논의가 행해진 <외계+인>의 구성에 장단점을 거론하는 표준적 평가를 추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세계의 시공간적 이물감을 극복하고 그것들 사이의 연결성을 허구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고 과시하는 <외계+인>의 옆자리에 과연 그러한 영화적 공간의 허구적 결합이 가능한지 심문하는 한편의 영화를 배치해보고 싶다. 공교롭게도 <외계+인>을 보면서 떠올린 <전우치>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카메라 앞에 비친 해안가라는 장소가 정말 그 장소인지 되묻는 중얼거림이 최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에도 나온다. 최면을 통해 살인을 종용하는 기묘한 존재인 마미야는 텅 빈 해안가에 느닷없이 나타난다. 그를 등장시키는 영화의 방식은 이러하다. 첫 장면에서 아무도 없는 해안가의 풍경이 보이고, 그다음 컷에 해안가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첫 장면의 풍경 속에 모습을 드러낸 마미야를 비춘다. 마미야는 천천히 다가가 남자에게 묻는다. “여기가 어디지?” 정말 그곳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로 그 장소인가? 카메라는 눈에 비친 장소가 바로 그곳이라는 믿음을 정직하게 실현하는 매개인가?

유령처럼 출몰한 마미야가 어떻게 해안에 나타난 것인지 물리적으로 확증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그를 출현시키는 데는 영화적 절차가 필요하다. 아무도 없는 해안가의 풍경에서 그 풍경의 중심에 마미야가 존재하는 장면으로의 전환. 아주 단순한 연결이지만 화면을 하나의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에는 영화적 체험의 근본적인 공백이 있다. 프레임의 공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연출자에게 이런 ‘침입’을 묘사하는 데 있어 거대한 우주선이나 시간 여행 같은 설정은 필요치 않다. 비록 같은 공간에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장면이 바뀌는 순간 존재론적인 단절이 생겨난다. 그 공백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던 마미야가 나타난다. 그는 비어 있는 장소의 내부에 있다. 이 장면에서 <큐어>는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는 프레임의 역량을 빌려 영화가 구축하는 특유의 비현실로 진입한다.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의 인물 배치

<큐어>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타카베의 아내 후미에가 병원에서 상담 치료를 받는 모습으로 첫 장면을 연다. 강박적이라 할 만큼 병원과 치료가 빈번히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상담이라는 개별적 상황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눈을 끄는 것은 결코 일반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의자와 탁자의 배열이다. 후미에가 앉은 자리에 비해 의사가 앉은 의자는 탁자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다. 얼핏 일상적인 광경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이 배치를 의식하는 순간 현실에 존재할 법하지 않은 상황의 외형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의사와 환자는 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그 순간에 기묘하게도 실내에 진동이 일어나고 탁자 위의 물건들이 흔들린다. 의사는 후미에에게 다가가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가져가지만 가까이 앉는 대신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앉는다.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진다. 너무 먼 나머지 같은 프레임에 포착할 수도 없을 만큼, 그래서 작게 중얼거리는 후미에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떨어져 있다.

이런 비상식적인 이미지의 정체를 섣불리 지정하여 구체적인 의미로 안착시킬 생각은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차적으로 스크린에 부조화를 일으키는 사물과 인물간의 근원적인 불화를 멀찍이 떨어진 의자의 배치를 통해 물질화할 뿐이다. 이는 <큐어>가 구축하는 영화의 서사가 주의 깊게 새겨둔 불안과도 연동되는 부분이다. 통상적인 영화에서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하는 모습은 장면을 움직이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하지만 무작위로 발생하는 최면과 그로 인한 충동적 살인이 벌어지는 <큐어>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본다는 것은 또한 살인 사건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전제로 작동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함께 있다는 것은 친밀함의 형식이지만, 살인의 형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영화가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의 이야기이면서, 아내와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실패하는 남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큐어>의 인물들에게 같은 화면에 공존하는 상태는 가까이 근접해서 친교의 양상을 주고받을 수 없는 소극적인 불화를 가리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면 최면암시를 일으키는 빛을 보거나, 몸에 그어진 X자를 마주할 것이다. 다른 결과는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지극히 범상한 공간이 카메라 프레임이 포착하는 공간으로 전환되면서 생겨나는 단절된 빈틈을 발견한다.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으로만 드러나는 바로 그 틈새에서 <큐어>의 영화적 공간을 창안한다. 상담이 진행되는 정신병원 내부에 특별히 고안된 설정이나 소품은 없다. 하지만 의자 하나를 탁자로부터 터무니없이 멀리 떨어뜨려놓자 공간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불균형한 지대로 뒤틀린다. 의사는 환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는다. 기묘한 진동으로 탁자가 흔들리고 난 뒤에는 준비된 의자가 있던 자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앉는다. 실제로는 있을 리 없는 상황을 불가능한 대로 대범하게 찍어버리는 이런 장면에서 두 사람의 공존 불가능성이라는 영화의 테마가 과격하게 응축되어 있다. 텅 빈 해안가에서 발견되는 마미야는 그런 뒤틀림으로부터 산출된다. <큐어>는 눈앞에 비치는 일상적 공간의 빈틈에 또 다른 질감을 관측한다. 3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태양과 구름이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해안가의 공간적 질감을 포착한 장면에 미야마가 산포하는 악의 공기가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큐어>의 공포는 그 미세한 자연의 흐름과 인물의 몸짓에서 일찌감치 기원하고 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

도입부의 두 장면(해안가 장면과 정신병원의 상담 장면)에서 영화는 한 인물과 존재하는 구역과 타인이 침입하는 반대편 사이를 컷의 구분으로 나누고 있어, 두 세계는 비교적 분명하게 분리된다. 마미야를 발견한 초등학교 교사는 어두운 공간에 머무는 그에 대해 실내의 불을 밝히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카베의 수사가 진행될수록 어둠이 점유하는 영역은 영화적 공간 전체로 확장된다. 마침내 타카베가 마미야를 맞닥뜨리는 순간에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는 어두운 공간 속에 몸을 숨기고 목소리만으로 대답을 이어나간다. 어둠은 시야를 집어삼키고 보는 것은 무력해진다. 형사가 용의자를 심문하는 전형적인 장면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실내를 비추던 라이터의 불빛을 꺼버린다. 눈을 밝히는 가시성의 빛은 무용하다. 그리하여 어둠에 묻힌 두 사람의 얼굴은 동등한 숏의 형식으로 포착된다. 그들은 같은 어둠 속에 산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이행하는 데는 절대적으로 이러한 어둠을 통과하는 과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마미야의 흔적과 신상정보를 추적한 뒤 집에 돌아온 타카베는 목을 매달고 자살한 아내를 마주한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그것은 타카베의 환상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제 빛은 대상을 분명하게 밝히는 장치가 아니다. 경계와 구역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불투명한 이미지가 그의 시각에 각인된다. 그의 두눈에 지각을 교란하는 기묘한 착시효과와 환상과 현실이 붕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타카베는 제대로 보는 것에 실패하는 자다. 그러나 그는 자꾸만 무언가를 듣는다. <큐어>에는 수많은 살인과 죽음이 묘사되지만, 피해자들의 비명은 한 번도 들리지 않는다. 몸에 X자가 그어져 죽은 자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시체의 비명을 대리하는 것은 이 영화의 화면에 끊임없이 새겨지는 기계장치의 소음과 사물의 진동이다. 빨랫감 없이 작동하는 세탁기, 공장의 기계들이 내뿜는 소음, 그리고 100년 전의 최면술사의 목소리를 재생하는 전축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귀를 거스르는 소음을 이미지에 덧씌운다. 그리하여 마미야는 타카베에게 말한다. “내 목소리가 들려? 들린다면 당신은 특별한 거야.”

거울 관계의 변형과 전염의 이미지

앞서 말한 것처럼 <큐어>에서 상대방의 얼굴을 가까이서 쳐다보는 것은 살인의 위협과 형식적으로 같다. 그것은 도입부의 탁자가 이유 없이 흔들리고 의사가 후미에로부터 멀어지는 순간에 예견된 것이다. 그래서 타카베는 직접 얼굴을 마주치는 대신 19세기 말에 촬영된 최면 치료 기록필름을 변환한 비디오를 본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최면 치료사가 어느 여자에게 최면을 거는 모습이 기록된 낡은 필름이다. 타카베의 친구인 정신과 전문의 사쿠마는 이 필름이 일본에 남겨진 영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자료라고 말하면서 경찰 발표에 따르면 필름에 등장하는 여자가 1898년에 아들을 살해하고 체포되었다고 덧붙인다. 규명되지 않은 살인의 기원을 찾는 지점이다. 현실 역사에 비춰 말한다면 그녀가 최면에 노출되어 살인을 저지른 시기는 일본에서 최초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바로 다음해의 일이다. 다시 말해, <큐어>는 20세기의 끝자락에서 19세기의 기록을 돌아보는, 보이지 않던 기록을 필름에 정착하는 체험이다. 타카베는 사라진 최면 치료사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수용함으로써 그 얼굴 없는 자의 행적을 닮아간다.

타카베는 정신질환을 진단받은 두 사람(마미야, 후미에)에게 근접하면서 그들의 또 다른 분신이 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기원이 되는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그는 정신병적 증상을 호소하고 최면을 거는 살인자로 거듭난다. 외형적으로 무척 닮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재회하는 결말부의 장면에서 타카베와 마미야는 전형적인 거울 관계에 놓인다. 언젠가 마미야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안에 있었던 것들이 전부 내 밖에 있어.” 마미야의 안에 있던 것들이 그의 신체를 통과해 바깥으로 유출된다. 그가 말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밝히는 것은 영화의 몫이 아니다. 이는 물리적인 역학이라기보다 영화의 운동을 이끄는 규칙이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타카베가 있다. 마미야는 손가락을 들어 타카베를 가리키는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타카베는 그에게 총을 쏜다. 실재적인 폭력과 불가해한 폭력의 기제가 직접 접촉하지 않는 두 사람의 손에서 모호한 긴장과 매혹으로 교환되는 장면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이 일으키는 불균질한 리듬을 한 인물의 운명적 궤적에 기대어 통합된 서사로 환원하는 구조는 한편의 영화를 둔탁하고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한 인물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너무 많은 것을 호소한다. 그와 반대로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변형과 영화 전체에 맴도는 인물들을 전염시킨다. 마지막 순간에 타카베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화면을 차지하자 웨이트리스가 칼을 들어 살의를 내보인다. 얼굴 없는 자가 퍼트린 감염의 회로에서 인물들은 아무런 역량도 없이 불가피하게 서로를 전염시키는 기묘한 영화적 분신들로 형상화된다. 지극히 히치콕적이게도, 라이터를 들어 담배 연기를 내뿜는 동작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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