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연기 말고 다른 뭘 할 수 있을까.” 2000년 연극 <돼지사냥>으로 데뷔한 이중옥 배우에게 20년 연기 생활을 이어온 비결을 묻자 덤덤히 말했다. 그에게 연기란 그렇게 당연한 듯 삶의 일부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는 <밀양>(2007)으로 매체 연기를 시작한 이후 <마약왕>(2017), <극한직업>(2018), <히트맨>(2019), <스텔라>(2021) 등 영화는 물론 <타인은 지옥이다>(2019), <방법>(2020), <구경이>(2021), <마인>(2021) 등 드라마까지 크고 작은 역할을 가리지 않고 신스틸러의 존재감을 자랑하며 활약해왔다. 그런 이중옥 배우가 자신의 첫 주연작 <파로호>에서 이제껏 쌓아온 연기 내공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선보인다.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도우의 자기 분열적인 모습 하나하나에 배우 이중옥의 지난 세월이 묻어 있다.
= 역할의 비중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매 작품 연기해왔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벅찬 건 어쩔 수 없다. 제안이 왔을 때만 해도 부담감 때문에 이걸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지금은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작품 전체를 책임지고 간다는 경험을 한 점이 좋았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새로웠다. 현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편이다.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야 좋은 장면이 나온다. 이번엔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이 거의 없다 보니 모든 배우, 스탭들의 기분을 살피게 됐다. 그러고 나니 기존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였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 도우는 내면이 점차 분열되어가는 복잡한 인물이다. 그게 사건으로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표현하기가 까다로워 보인다.
= 솔직히 워낙에 복잡한 심리를 가진 캐릭터라 역할을 100% 소화했다고 이야기할 자신은 없다. 주변에 시나리오를 읽은 지인이 농담으로 케빈 스페이시가 와도 이건 못 한다고 하더라. (웃음) 그럼에도 내가 가진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표현했고 그 결과를 마주하니 후회는 없다. 나 역시 인물의 심리가 잘 파악이 안돼서 막힐 때마다 감독님과 의견을 나눴는데 그때마다 ‘도우라는 인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선배님의 영화다. 선배님이 지금 하신 게 도우다’라고 해줬다. 점점 내가 하는 연기, 표현 하나하나가 모여서 도우가 되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고 내 안의 경험을 모아서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다.
- <파로호>의 지향점은 모호함을 유지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정점에 도우가 있다.
= 주연이라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욕심이 났던 것 같다. 시나리오에도 도우의 심리가 정확히 묘사되진 않았다. 캐릭터의 전사를 상상하긴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한다고 이유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도우의 많은 부분을 내 안에서 가져오려 했다. 이제껏 내가 했던 역할들, 살아오면서 겪었던 감정들, 그런 부분들을 최대한 뿜어내며 인물의 조각들을 그려나갔다. 그렇다고 내가 도우 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건 아니고. (웃음) 오히려 내가 알 수 없는 세계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궁금해졌다. 예를 들면 나는 나름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온 사람이다. 그런데 엄마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쌓이고 쌓여 결국 망가지는 도우의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은 왜 이럴까 하는 궁금증이 커졌다. 그렇게 더듬어가며 인물에게 다가가려 했고 그런 추적의 과정이 모호함으로 표현된 게 아닐까 싶다.
- 터트리기보다는 눌러담는 영화임에도 감정이 확실히 전달된다. 이제껏 배우 이중옥이 해왔던 역할들의 총집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감사하다. 이번 작품이 나의 종합선물세트라고 생각한다. 도우라는 인물이 그만큼 분열적인 면모가 있다. 착하고 순해 보이던 사람이 한순간에 서늘해지다가 그 간극에 자신도 혼란을 느낀다. 도우의 혼란이 곧 나의 혼란이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이제껏 내 안에 쌓아온 경험들을 하나씩 풀어냈다. 솔직히 모니터를 그렇게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 <파로호>는 전주국제영화제부터 두번 정도 스크린에서 봤다. 내 연기를 보고 이야기하기 쑥스럽지만 내 안의 다른 얼굴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경험이 재미있었다. 어쩐지 나도 관객의 시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작품이다.
- 그러고 보면 늘 복합적인 면모가 있다. 악역을 맡을 때도 완전히 악역으로 보이지 않고 어딘지 정이 간다.
= 배역을 맡을 때 선악처럼 특정 기능이라기보다는 그저 어떤 사람을 연기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는 모두 시시각각 마음이 변하지 않나. 복합적이다는 말은 곧 진짜처럼 살아 있다는 의미이고 거기서부터 리얼리티가 시작되는 것 같다. 한편으론 훨씬 악독한, 한계가 안 보이는 순수 악을 연기해보고 싶기도 하다. 악역이 지겹지 않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오히려 좀더 제대로, 끝까지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또 주연을 맡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역할을 하든 이번 경험이 좋은 밑거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