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놈이다>(2015) 이후 2016년 중국 개봉한 한중 합작영화 <하유교목 아망천당>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7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영화다.
= 전역 후 드라마, 공연 등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시간이 이만큼 흘렀다. 지난해 3월 뮤지컬 <고스트>가 막을 내린 지 몇달 안되었을 때 바로 <카터> 준비에 돌입했다. 작품 선택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약간의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카터> 대본이 들어왔는데 그동안 공백을 견딘 것이 바로 이 작품을 위해서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카터>는 확실한 준비 과정이 요구되는 프로덕션이었다.
- 8월5일 넷플릭스에 영화가 공개됐다. OTT 오리지널 영화에 출연하는 건 처음이라 관객 반응이 어떨지 긴장될 법도 하다.
= 떨리기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더 크다. <카터>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무척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다음으론 ‘근데 이게 가능한 설정인가?’ 싶었고. (웃음) 액션에 있어 확실히 획기적인 면을 보여줄 영화다. 그 일원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단점이 없을 순 없겠지만 오직 <카터>에서 새롭게 시도한 도전과 기법들을 눈여겨봐주시면 좋겠다.
- <악녀>에서 1인칭 시점의 익스트림 액션을 선보인 정병길 감독이 이번엔 스케일을 더 크게 펼쳤다. 스턴트 없이 대부분 액션을 직접 소화했는데, 어떻게 준비했나.
= 액션 합을 정확하게 맞추는 게 중요했다. 매일 액션을 연습하고, 정해진 기한 내에 오토바이 자격증도 새로 따기 위해 애썼다. 촬영 시작 전부터 이미 굉장히 피로한 상태였다. (웃음) 원래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데도 자격증 취득은 꽤 어려운 관문이더라. 땅에 절대 발을 디디면 안되는 등 일반적으로 운전할 때와는 다른 요건들을 지켜야 했다.
- 액션이 하이라이트로 기능하는 정도가 아닌, 영화 전체가 곧 액션인 작품이다.
= <카터>는 2시간 내내 액션 신이라 액션의 합과 동선을 전부 외워놓지 않으면 안됐다. 보통은 밑그림을 익힌 뒤 현장에서 구체화해가는 경우가 많지만 <카터>는 달랐다. 모든 액션이 최소 5분 이상의 롱테이크로 지속되고, 상대 배우들은 물론 여기저기서 카메라 감독님들이 분주히 움직일 것을 대비해 완벽하게 서로 컨디션을 맞춰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실히 긴장도가 높았다.
- 단순 암기 이상으로 몸이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일 때까지 체득하는 훈련이 필요했겠다. <고스트>와 같은 뮤지컬 공연의 경험도 도움이 되었을까.
= 확실히 무대에서 익힌 감각이 영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남들보다 암기력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닌데, 몸으로 익히는 것은 익숙하다. 액션도 일종의 안무니까.
- 삭발한 모습도 낯설지만, 얼굴선이 미세하게 변한 것도 같다. 신체 단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인지 전보다 부드러운 느낌이 살짝 줄어들고 더 단단해진 인상이다.
= <카터> 이후 나도 스스로가 조금 낯설 때가 있다. 매일 보는 내 얼굴이지만 불과 1년 전하고는 다르다는 걸 느낀다. 그 모습이 싫지 않다. 작품이 내게 남긴 흔적이고, 배우로서 새로운 레이어를 하나씩 쌓아가는 느낌이라 오히려 마음에 든다. 이런 내 모습도 내가 원했던 것이다. 작품 공개 이전에 예고편을 보고서 배우 주원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관객의 반응이 나로서는 가장 기뻤다. (웃음)
- <카터>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극한의 액션 신이 대부분이라 배우의 몸에서 생기는 화학작용 역시 장면의 한 요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 아드레날린에 취한 무아지경 상태가 오진 않았나.
= 그저 매번 무아지경이었다. (웃음) 시작과 동시에 정신 차리면 컷이 끝나 있었다. 액션 합을 꼼꼼히 맞출 때도 기계적인 순서에 집착하기보다는 격렬하게 싸우는 상황에서 어떤 움직임이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일까를 고민했고, 그게 실제 촬영에서도 효력을 발휘했다. 아마도 이런 점이 롱테이크 액션의 근본적인 장점 아닐까. 아무리 외우고 맞춰서 싸워도 결국엔 배우가 진짜가 되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
- 카터는 기억을 잃은 인물로 오직 지시에 따라 닥쳐오는 극한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래서인지 액션에서도 생존 본능, 야수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특히 초반의 목욕탕 액션 신에서는, 상대를 이미 제압하고도 낫으로 수차례 내리치는 등 잔혹한 이미지가 부각되기도 한다.
= 몸의 기억대로 일단 싸우긴 하지만 카터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수십명의 적들이 끊임없이 달려드니까 몸 안에 응축되어 있는 아드레날린이 거의 폭발하는 느낌으로 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움직였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존 의지만이 번뜩일 뿐이다. 그 이후부터 카터가 서서히 이성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봤다.
- <악녀>에서도 그랬듯 종종 인물의 시점이 게임 캐릭터처럼 제시된다. 지시대로 퀘스트를 수행하고 아이템을 활용하는 방식 역시 게임적인 요소가 있다.
= 게임에는 소양이 없지만(웃음) 카터가 지시에 따라 어떤 상황 안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리는 장치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딜레마를 안고서도 어쨌든 지시대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니까, 배우에겐 흥미로운 동력이 된다. 연기할 때 조미료 없이 하자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한데 내가 카터가 되어서 ‘기억 없음’에 충실하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또 롱테이크의 리듬을 감안해서 어떤 표현을 할 때 너무 길어지지 않게끔 신경 썼다. 감정은 최대한 간결하고 심플하게 표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 <카터> 이전의 궤적을 보면, 판타지 멜로(드라마 <앨리스>), 스릴러(<그놈이다>), 사극(드라마 <각시탈> <엽기적인 그녀>), 코미디(<패션왕> <캐치 미>) 등 널뛰기하듯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변화 자체를 즐기는 면도 있겠지만 그것이 곧 좋은 배우가 해야 할 일이라는 직업의식에 대해서도 일전에 말한 바 있다.
= 어떤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고 최대한 관객에게 이런저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배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일한다. 예고와 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할 때부터 그렇게 배웠다. 아무리 배우가 원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비슷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더 염두에 둔다. 그래서 <카터>의 대본을 읽자마자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기도 하고.
- 배우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셈이다. 일찍이 배우 수업에 집중하면서 세밀하게 다져진 연기의 근육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나.
= 학교에서 연기를 배울 때 교수님께 들었던 가장 좋았던 평가가 “너는 실제의 너와 연기할 때의 모습이 굉장히 다르다”는 거였다. 나와 멀리 떨어진 어떤 캐릭터가 되어보는 일이 나를 흥분시키고 그런 갈망이 알게 모르게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것 같다. 학교에서부터 특이한 캐릭터라면 조연과 앙상블 작업을 꾸준히 한 게 큰 자산이다.
- 배우로 존재하지 않는 순간의 사람 문준원(주원의 본명)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편인가.
= 아니, 정반대다. 평소의 나는 루틴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고 일상을 늘 규칙적으로 꾸려야 안심이 된다. (웃음) 어떻게 보면 내 천성을 개조하는 일이기 때문에 배우라는 직업에 더 매료된 게 아닐까. 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인 척하는데, 보는 사람들이 나를 믿어준다. 할아버지 분장을 하고 연기하면 나는 잠시 할아버지로 사는 거다. 여기에 재미를 붙이면 점점 더 골몰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진짜 할아버지처럼 보일 수 있을까? 그때부터 디테일을 파고들어가는 거지.
- 성실한 배우이면서 동시에 성실한 생활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 촬영이 없을 때의 평소 모습이 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더 인기를 얻고 싶거나 공허한 마음이 밀려드는 것에 대비를 잘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어릴 때부터 이 직업을 꿈꿨으니 휴식기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오래 고민해왔다. 다만 20대에는 이런 생각에 반해 실천할 시간이 없었다고 할까. 그런데 제대 후 자발적으로 약간의 여유를 만든 게 도움이 됐다. 또 <카터>를 만나면서, 가끔은 작품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확인했다. 내 경우는 일이 없을 때는 잠들고 일어나는 시간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생활을 다듬는다.
- 놀랍다. (웃음) 요즘은 몇시에 기상하나.= 늦어도 보통 7시면 일어난다.
- 그렇다면 <카터> 이후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도 어렵지는 않았겠다.
= 이번엔 좀 다르긴 했다. 표정과 목소리, 외적인 부분까지 많이 바꾼 작품이라 그런지 <카터> 촬영 기간 중에 집에서 문득 거울을 보면 내가 나 같지 않아서 심리적으로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촬영장에서 피칠갑을 하고 나면 그제야 나답다는 안정감을 느꼈다. 그 후유증이 촬영 끝나고도 한동안 이어졌다. 애착을 가진 만큼 회복하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드라마 <굿 닥터>(2013) 쫑파티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극심한 공허함을 느꼈었는데, <카터>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긴 할까?’ 싶을 정도로 불안했다. 방법은 다시 열심히 매일을 가꾸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조금씩 조금씩 나로 돌아왔다.
- 7년 전 <씨네21>과 인터뷰하면서 서른이 되어가는 시점인 만큼 중대한 변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7년 후 주원은 또 전에 없던 변신에 성공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 서서히 몸과 마음의 시차가 생긴다는 것? 어른들 말씀을 조금씩 알겠다. (웃음) 좋은 건 경험치가 쌓이면서 이제 약간 내려놓을 줄 알게 된 것이다. 두려운 마음을 덜 느끼게 되니까 조금 더 베풀 수 있게 된 것 같다. 20대에 막연히 꿈꿨던 30대의 모습이 있었는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큰 이탈 없이 따라가고 있어서 그 점은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 보통은 예상처럼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대답이 다수인데, 희귀한 경우다.
= 불완전함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웃음) 맡은 배역으로 일대 변신을 시도하는 것과 달리 평소에는 규칙적이고 일관된 상태로 살아가는 게 좋은 것 같다. 꾸준히 내 할 일을 잘해내며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싶다. 아직까진 그렇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