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스페셜 공연 현장 저스틴 허위츠 ‘위플래쉬’ 등 OST 연주
비행기가 이착륙하던 활주로에 아름다운 선율이 내려앉았다. 달콤한 음표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에 스며들어 흩뿌려졌다. 제천의 밤은 영화 <라라랜드>의 배경인 로스앤젤레스의 밤보다 더 낭만적이었다.
충북 제천시 모산동과 고암동에 걸쳐있는 제천비행장에선 47년째 비행기가 뜨지 않고 있다. 1950년대 비행훈련장으로 만들어졌으나, 1975년 활주로 재정비 이후 항공기(전투기)가 이착륙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운동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이 <화양연화> ‘에필로그: 영 포에버’ 뮤직비디오를 이곳에서 찍으면서 ‘아미’(방탄소년단 팬덤)들 사이에서 ‘성지’ 순례 장소로 꼽히기도 한다.
지난 13일 밤 특별한 손님이 제천비행장을 찾았다. <라라랜드>의 음악감독 저스틴 허위츠가 서울그랜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재즈빅밴드와 함께 스페셜 콘서트를 펼친 것이다. 이날 무대는 지난 11일 개막해 16일까지 열리고 있는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행사 중 하나로 열렸다. 올해 제천영화음악상 수상자이기도 한 허위츠의 한국 공연은 이번이 세번째다.
허위츠는 <라라랜드>의 감독 데이미언 셔젤과 영혼의 단짝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대 기숙사 룸메이트로 만난 둘은 영화와 음악으로 의기투합했다. 2009년 첫 영화 <가이 앤 매들린 온 어 파크 벤치>를 시작으로 <위플래쉬>(2014) <라라랜드>(2016) <퍼스트맨>(2018) 등을 합작했다. 허위츠는 <라라랜드>로 2017년 골든글로브 음악상과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았다.
허위츠는 이날 오케스트라와 재즈빅밴드를 지휘하며 자신이 만든 영화음악을 관객들에게 들려줬다.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의 얘기를 담은 <퍼스트맨>의 수록곡 ‘더 랜딩’으로 시동을 걸더니 <위플래쉬> 주인공 앤드류(마일스 텔러)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흐르던 감미로운 곡으로 분위기를 이어갔다. 다음은 재즈 뮤지션을 주인공으로 한 데뷔작 <가이 앤 매들린…> 삽입곡이었다. 허위츠는 연주에 앞서 “이 곡은 나중에 <라라랜드> 삽입곡으로 변용했기 때문에 비슷하게 들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허위츠는 지휘봉을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앉더니 <퍼스트맨> 수록곡 ‘암스트롱’을 직접 연주하기 시작했다. 영화에는 하프 연주 버전이 실렸지만, 이날 연주한 피아노 버전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허위츠는 연주를 끝낸 뒤 “14살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건 처음이다. 나는 연주보다 작곡을 잘한다”고 농담을 던졌다.
허위츠는 개별 곡마다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신시내티’라는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그는 “이 곡은 재즈다. <가이 앤 매들린…>뿐 아니라, <라라랜드>의 재즈클럽 장면, <퍼스트맨>에도 썼고, 데이미언 셔젤과 작업해 올해 크리스마스 즈음 개봉하는 신작 영화(<바빌론>)에도 썼다. 이렇게 하나의 곡을 여러 영화에 쓰는 걸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허위츠는 공연 1부를 <가이 앤 매들린…> <위플래쉬> <퍼스트맨> 음악들로 채웠다. 인터미션 뒤 2부가 시작됐다. <라라랜드>의 시간이었다. 뮤지컬 배우 이충주, 민경아가 나와 <라라랜드> 도입부 고속도로 장면에 쓰인 ‘어나더 데이 오브 선’을 불렀다. 이어 뮤지컬 배우 전나영, 이수정, 연지 리, 문은수가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 색색 가지 원피스를 입고 나와 ‘섬원 인 더 크라우드’를 불렀다. 이처럼 공연은 영화 속 시간 순서를 따라 이어졌다.
이충주와 민경아가 각각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에마 스톤) 역을 맡아 ‘어 러블리 나이트’를 부를 때 그들은 춤을 추지 않았지만, 영화 속 세바스찬과 미아가 탭댄스를 추는 광경이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듯했다. 재즈빅밴드의 화려한 연주가 빛난 ‘서머 몽타주’에 이어 공연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시티 오브 스타스’가 흐르기 시작했다. 허위츠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이충주와 민경아가 호흡을 맞춘 이 노래는 세바스찬과 미아의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상징한다.
어느덧 영화 막바지 7분이 넘는 대곡 ‘에필로그’에 이어, 세바스찬과 미아가 잠깐 동안 눈빛을 나눈 뒤 각자의 길을 가는 것으로 막을 내릴 때 흐르는 ‘디 엔드’까지 마쳤다. 영화의 엔딩과 함께 공연도 끝났다. 하지만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끊임없이 박수를 보냈다.
허위츠가 다시 나왔다. 앞서 노래를 불렀던 뮤지컬 배우들도 모두 나왔다. 그들은 앙코르곡으로 새롭게 편곡한 ‘시티 오브 스타스’를 들려줬다. 풍성한 화음은 제천의 밤공기를 한껏 부풀어 오르게 했다. 간간이 흩뿌리던 빗방울 탓에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날 밤 제천은 앙코르곡 제목처럼 ‘별들의 도시’였다.
한겨레 제천/서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