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배우 박지환의 활약은 돋보였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비롯해 영화 <범죄도시2> <한산: 용의 출현>까지, 봄여름 두 계절을 지나는 동안 박지환은 대중의 희로애락을 책임졌다. 그는 20대에 극단 활동을 시작했고, 2006년 영화 <짝패>를 통해 매체 연기를 처음 선보였다. 그 뒤로 <베를린>(2012), <무뢰한>(2014), <검사외전>(2015), <아수라>(2016), <범죄도시>(2017), <마약왕>(2017) 등 다양한 영화에서 조연으로 종횡무진했다. 그는 주로 강렬한 외모에 성질이 고약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래서일까. 박지환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강하고, 악하고, 거칠다. 하지만 박지환은 고정된 이미지에 연연하지 않는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굳이 마음 쓰지 않으려 한다. 물론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열심히 하다 보면 완고해 보이는 이미지도 계속 확장될 거라 생각한다. 그 언젠가를 위해 오늘에 몰두하는 게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다.” 그의 말은 옳았다. 다양한 역할로, 더 많은 자리로 박지환은 자신을 확장시키고 있다.
2019년 <봉오동 전투>에서 박지환은 비열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일본군 역할로 열연을 펼쳤다. 영화 시사회날, 그를 눈여겨본 김한민 감독이 그에게 다가와 <한산: 용의 출현>의 나대용 장군 역을 제안했다. 무려 거북선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이순신 장군 앞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쉽게 굽히지 않는 우직한 모습을 그려내야 했다. 당시 박지환은 몹시 큰 산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대본을 읽는데 내가 여태껏 해왔던 인물보다 훨씬 큰 느낌이 들었다. 새벽까지 고민해도 다음날 보면 한없이 형편없어 보이고, 내가 얄팍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대용 장군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박지환은 나주로 떠났다. 4월21일 과학의날, 나대용 장군의 후손들이 장군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추모제 당일을 디데이 삼아 나대용 장군을 알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계속 이동하고 또 골몰했다. 그리고 빌었다. ‘한없이 부족합니다. 저에게 보여주세요. 꿈에 나타나시든 갑자기 비바람이 불게 하시든 어떻게든 알려주세요.’ 나대용 장군에게 가닿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그는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렇게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김한민 감독이 머릿속에 그려둔 나대용 장군과 촬영장에서 박지환이 체화한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박지환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은 단연 <범죄도시>다. 거친 눈빛에 빡빡 민 머리가 장이수의 강렬한 인상을 완성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도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가벼운 장단이 작품의 균형을 맞춘다. 장이수는 칼부림과 조직 싸움에 익숙할 만큼 험악한 인물이다. 동시에 상대파 두목과의 어색한 화해의 순간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기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 묘한 간극은 장이수를 코믹한 인물로 돋보이게 한다. 무수한 조연 자리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쌓아온 그에게 <범죄도시>는 어떤 의미일까. “<범죄도시>는 다음 스텝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준,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창구다. 이 작품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나를 계속 어딘가로 데려가주는 걸 보면 장이수를 연기한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한 우물만 파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연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걸어온 날들을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건 무척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멀리 보려고 한다. 일희일비하기보다 당장 오늘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 <범죄도시>가 내게 알려준 것이다.”
박지환과 <범죄도시>팀의 인연은 5년 뒤 <범죄도시2>로 이어졌다. 장이수는 마석도(마동석)라는 먼치킨과 강해상(손석구)이라는 최강 빌런 사이에서 1편보다 더 경쾌하고 익살스러운 면을 부각시켰다. 강해상과 최춘백(남문철)의 아내 김인숙(박지영)의 현금 협상 자리에 운전사 역할로 떠밀려나간 장이수는 돈을 보고 도망가버리는 발칙한 행동을 범하기도 한다. 강해상과의 일대일 사투로 호기롭게 잭나이프를 뽑아들며 “내가 누군지 아니?”를 외치지만 결국 뒤꽁무니를 빼며 웃음을 유발한다. 극의 균형을 좌지우지하는 박지환의 역할은 2021년 <유체이탈자>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행려 역을 맡은 그는 역시나 자기만의 유머러스한 연기로 액션 스릴러의 무거운 분위기를 순간순간 풀어주는 데 일조했다.
“사실 <범죄도시2> 시나리오를 읽으면 코믹물로 보이지 않을 거다. 그저 동료 배우들과 합을 맞추다 보니 재미있어진 거다. 장이수도 무섭고 잔인한 인물이다. 성격도 이상해서 현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고. 다만 재미있게 연기하고 싶을 땐 배우로서 그 여지가 보이는 틈새를 직감적으로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건 괜히 힘주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를 웃게 하려고 의도하고 애쓰면 더 변변찮은 것 같다. 자연스러운 지점을 연결해야 한다.”
올해 대중에게 박지환의 따뜻한 인상을 안긴 작품이 있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다. 정인권 역을 맡은 그는 올백으로 쓸어올려 머리띠를 한 뽀글머리의 중단발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은 일에 쉽게 욱하고 말씨도 투박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딘가 실존할 것만 같은 정 많은 아저씨로 변해 있었다. 박지환은 정인권이 되기 앞서 그의 성정을 자신에게 장착하고 싶었다. “인권은 가꾸지 않은 밭 같다. 왠지 잡초도 솎아주고 작물도 키워주고 싶지만 막상 건드리면 그 자연스러움이 훼손될까봐 다가서기 어렵다. 그래서 정인권이라는 인물은 굳이 다른 해석을 덧붙이거나 확대하지 않고 대본에 적힌 그대로 따르려 했다.”
극중 아들 정현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순대공장 신에서 촬영 직전까지 일부러 대본을 읽지 않은 일화는 박지환이 얼마나 정인권 그 자체가 되고 싶었는지 그 열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아들에게 서운함이 폭발해 쓰린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순대공장은 일년 내내 쉬는 날 없이 돼지 부속물을 삶고 자르길 반복한 인권의 애환이 담긴 장소다. 상황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정인권이 생애 동안 쌓아온 감정적 불순물을 모두 분출해야 했기에 박지환의 고민은 커졌다. 그는 대본을 덮었다. 내용을 두어번 읽고 보니 자칫하면 감정을 순서대로 외워버릴 것 같아서였다. 본 촬영 시작 1시간 전에 인권의 마음으로 대본을 천천히 읽어나가며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자연스럽게 인권이 되고 싶었다. ‘틀려도 좋아, 똑같이 하지 못해도 좋아, 실패해도 좋아’라는 말을 반복했다. 서툴고 부족해도 이 인물의 진심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순대공장 신은 더더욱 그랬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다양한 사람의 인간적이고 진솔한 서사가 가득하기 때문에, 내가 계획적으로 몰아붙이거나 강렬하게 연기하지 않아도 울림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성찰, 존중, 이해
<우리들의 블루스>의 배경지가 제주인 터라 자연스러운 제주 사투리를 익히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자 미션이었다. 사실 박지환에게 방언 연기는 익숙하다. <범죄도시>에서 조선족의 억양과 말투를 천연덕스럽게 선보였고, <마약왕>에서는 화교 출신의 마약원료 운반꾼 왕분호로 분해 코믹하고 개성 강한 어투로 시선을 끌었다. 연기에 몰입하기 전에 인물의 언사부터 익혀야 하는 과정이 기술적으로 힘들지 않은지 묻자, 그는 오히려 배우의 소명으로 질문에 답했다. “나는 그 지역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지역 언어를 구사할 순 없다. 적정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반복해가며 연습하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받아들인다. 이건 악보 전쟁이 아니다. 작곡가가 의도한 대로 얼마나 정확하게 연주했는지보다 나의 심정을 얼마나 잘 전달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어린아이가 피아노를 쳤을 때 건반 하나 잘못 눌렀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 노래를 연주하길 좋아한 아이의 마음이 중요한 거지. 그와 마찬가지다. 연변 사투리나 제주 사투리를 쓸 때 어색하더라도 명확한 감정과 심정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게 배우의 일이다.”
배우 박지환은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려 하면서도 그것이 또 다른 한계로 작용하지 않게끔 계속해서 자신을 확장시킨다. 자연을 느끼기 위해 10년째 캠핑을 떠나고, 책 맨 앞장에 편지를 적어 주변 동료에게 선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자신을 돌보고 주변을 챙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성찰, 존중, 이해. 그는 유독 이런 단어를 많이 언급했다. 모두 객체가 있어야 가능한 말들이다. 박지환은 눈앞에 있는 상대 배우에게, 화면 너머의 관객에게,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그것이 20여년 넘게 연기를 해오며 쌓아온 그의 겸허한 태도이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주변 동료들이다.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축적해온 것들을 함께 나누며 연기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끊임없이 불안하고 끊임없이 질투하던 어린 시절의 감정들이 건강하게 발현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상대 배우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긍정적 자극을 받는 게 중요하다. 앞으로도 이런 마음을 잊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