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우리 시대의 로맨틱 코미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2022-08-25
글 : 김소미
정리 : 이다혜
사랑은 왜 점점 더 어려워질까

헤테로섹슈얼의 연애, 밀레니얼의 자아도취에 관한 최신의 마스터피스. 8월25일 극장가에 안착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이런 거창한 수식을 붙이는 모험을 감행해보고 싶다. 로맨틱 코미디를 ‘실존적 장르’(Rom-coms are an existential form)로 명명하고, 영화의 본질이란 곧 시간의 감각을 새로이 축조하는 데 있다고 믿는 노르웨이의 감독 요아킴 트리에가 빛의 도시 오슬로의 거리를 방황하며 빚어낸 우리 시대의 클래식을 소개한다. 한편의 영화가 감수성과 기술, 유행과 전통, 통찰과 유머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 영화는 그 최신의 대답이 되어줄 수도 있다.

불만족은 가능성의 다른 말이다. 막 서른이 된 율리에(르나트 라인제브)에겐 아직 이 두 가지를 모두 누릴 기회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신음한다. 더 완전한 삶은 지금 아닌 언젠가, 여기 아닌 어딘가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랑과 직업이 삶을 최적화하리라는 헛된 갈망이 불쑥 솟아날 때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이야기는 서둘러 다음 장(chapter)으로 넘어간다. 이 새까만 로맨틱 코미디가 들추는 것은 인간관계, 특히 연인과의 교류가 어떻게 삶에 대한 우리의 실존적 기대를 반영하는가에 대한 적나라한 광경이다.

<8과 1/2> 그 이후, 어느 밀레니얼의 자아도취적 곡예

의학도에서 심리학도로, 포토그래퍼에서 칼럼니스트(글의 주제는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바라본 ‘#미투 시대의 오럴섹스’다)로 변신하는 동안, 율리에는 질문한다. “내 인생은 언제쯤 시작될까?” 이미 직업적 성취를 이뤘고 삶의 혼란스러운 명제를 일부 갈무리한 40대 연인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라이)은 길어지는 연인의 방황에 어쩔 수 없이 근심한다. “넌 항상 무언가 더 나은 것을 기다리는 듯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그래픽노블 작가인 악셀의 출간 파티가 한창인 어느 날, 들러리의 우울에 사로잡힌 율리에는 홀로 자리를 빠져나온다. 비참한 얼굴을 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해질녘 공원을 걷다 말고 눈물을 흘리는 이 장면에서, 초저녁의 노을은 다시 깨어난 불충족감처럼 선명한 매혹을 빛낸다. 자기 연인의 파티를 뒤로하고 남의 결혼식 파티에 잠입한 주인공은 그곳에서 새로운 남자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를 만나 영화를 통틀어 가장 생기 넘치는 ‘미트 큐트(meet cute)’ 장면(로맨틱 코미디에서 새 연인이 친밀감을 쌓는 과정을 특이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리는 일련의 관습적 구간)까지 달성해나간다. 전공과 직업, 연인에 이르기까지 벌써 몇번의 어수선한 변화와 소동을 지나쳐왔건만 영화는 아직 겨우 두 번째 챕터(‘바람피우기’)를 지나고 있을 뿐이다.

모든 로맨틱 코미디는 실존적이라는 요아킴 트리에의 정의를 부연하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대사를 빌려 안티-로맨스의 지대로 나아간다. 율리에의 여정은 결국 모종의 자아도취적 곡예를 거쳐 홀로서기의 깨달음으로 향하는 현대 여성 버전의 <8과 1/2>(페데리코 펠리니, 1963)이다. 환각 버섯을 삼킨 율리에가 늘 유아적이고 무심한 아버지를 포함해 자기 인생을 구성한 여러 남자들의 환영을 보는 트라우마틱한 장면은 여성 구원자의 존재를 갈망하던 남성들의 서사가 역전된 형태일 뿐이지만, 오래된 환영의 반복처럼 느껴지지 않아 다행스럽다. 다시 말해 이 새삼스러운 생동감은, 성 역할만 바뀌어도 생겨나는 서사의 활력소가 여전히 도처에 남아있다는 방증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장애물이 너무 많은 시대의 멜로드라마

완전한 자아를 향한 방황을 난폭하고도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영화는 시계추를 동시대로 정확히 떨어뜨림으로써 정보 과잉, 미투 운동, 포스트 페미니즘의 사회적 역동과 공존하는 헤테로섹슈얼들의 관계 양태를 새롭게 탐구해나간다. 세대를 구분짓는 연애의 한 풍경은 이렇다. 사례1, 어느 날 내 연인이 영적으로 각성해 티베트 고원으로 떠나버린 다음 3만 팔로워를 불러모으는 인스타그램 요가 ‘셀럽’이 될 수도 있다. 사례2,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서 예술가 전 남친이 출연한 방송을 보게 되는데 그는 심각한 성차별주의자라는 비난에 휩싸여 있다. 멜로드라마의 사회적 장애물은 계급과 신분, 전쟁, 신자유주의 속 외도의 유혹에 이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이르면 도무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 시대에 연인을 갈라놓는 이념은 끊임없이 분열되고 수혈된다. 환경오염과 지속 가능한 삶, 북극곰의 고통에 관한 논쟁도 때로는 파경의 이슈가 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무엇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념을 다바쳐 한 사람과의 파국으로 향하기엔 선택지가 너무 많은 세상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집중력을 자꾸만 흐뜨러트린다.

비슷한 연유로 고통받았던 영화-관객의 관계에서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작은 희소식이다. 우디 앨런의 아동성추행 혐의로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영화 목록에서 통째로 들어내야 했던 관객들에게 요아킴 트리에는 전보다 더 만족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물론 감독 자신이 지목하는 정확한 계승자들은 따로 있다. 요컨대 그의 영화는 결점투성이인 인물들의 짝짓기를 통해 시대의 모럴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에릭 로메르의 시선을 계승하고, 예술의 존재를 삶의 중앙 무대로 끌어와 적극적으로 인용한다는 점에서 일군의 뉴요커 영화가 안기는 지적 충만감을 지향하며, 누벨바그 시네마가 거리를 기록한 시선과 워킹타이틀의 매끈한 대중성까지 포섭하려 한다. 오슬로의 24시간을 따라 걷는 도시 방랑기 속에서 이 갖가지 야심들은 지나치게 과시적인 구석 없이 유순히 흐른다.

시간과 장소를 걷다

함께 사랑한 시간과 상대가 부재한 시간, 만나는 순간과 엇갈리는 순간의 총합인 멜로드라마는 본질적으로 시간성에 골몰하는 장르이고 훌륭한 멜로드라마들은 대개 세월의 흐름을 저마다 독창적으로 기록하려 애쓴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 그 사이를 메우는 12개의 챕터명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속 율리에의 방황기가 일면 영웅의 거창한 대서사시처럼 보이게끔 유도한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율리에가 자신의 삶과 사랑에 문학적인 형태가 있기를 무의식적으로 기원하는 것처럼 “웅장한 운명을 추구하는 심리”를 형식으로 치환했다. 챕터 구성은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오랜 명제 역시 부각해준다. 일어날 법한 사건들은 대체로 정말 일어나지만 그것이 결코 올바른 순서로만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영화는 챕터 사이의 공백을 통해 타이밍이 만드는 희비극의 상징성을 더하고,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시간에까지 관심의 닻을 내리게 한다. 또한 격동의 나날을 잘게 부순 총 14개의 조각들은 정직한 연대기적 서술에 집중하기보다 내면의 파노라마가 외부와 정확히 맞닿는 순간들에만 온전히 머무르는 대담한 리듬감도 보여준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미아 한센뢰베의 <에덴>(2014)이 덧없는 긴 시간을 짧게 응축하고 특징적인 짧은 시간을 오히려 늘리는 방식을, 마이크 밀스의 <비기너스>(2010)가 죽은 사람을 몽타주로 소생시키며 만드는 미묘한 뉘앙스를,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1966)가 만남과 결별 사이에 생략된 시간을 은유하는 법을 참고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카메라 뒤편의 제작진이 오슬로의 성실한 도시 산책자라는 사실도 확신할 수 있다. 도시의 모든 시간에 거리를 하릴없이 배회해본 사람들만이 기억하는 빛이 영화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거리를 따라 흐르는 트래킹숏으로 카메라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에선 종종 인물보다 공간이 영화의 타당한 주인으로 앞선다. 장소의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해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의 밤 산책 장면을 교본으로 언급했다. “알랭 레네는 카메라를 공간이 지닌 시선처럼 사용한다. 건물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지나치며 풍경을 만드는 움직임에서 영화는 곧 추억을 발생시킨다. 그 속에서 우리는 즐거운 낮과 슬픈 밤, 겨울과 여름에 걸었던 각자의 도시를 떠올릴 수 있다.”

북유럽 버전의 지알로 장르를 시도한 <델마> 이후 그보다 따뜻한 세계로의 회귀를 꿈꿨다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10년 전 잠시 쉼표를 찍었던 2개의 ‘오슬로 시리즈’를 떠올렸다. 작가 되기의 열망에 사로잡힌 청년들의 헛된 방황을 좇은 <리프라이즈>(2006),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채로 옛 친구들을 방문하는 마약 중독자의 이야기 <오슬로, 8월31일>(2011)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전작들과 비슷한 날씨와 무대를 공유하지만, 유머와 희망의 조도만큼은 사뭇 다르다. 대기 사이로 가벼운 흥분이 떠도는 초여름, 낮에서 밤으로의 긴 전환기 속에서 인물들은 전보다 한결 낭만적으로 몽상한다. 오슬로 시리즈 세편을 통과하며 영화와 함께 나이 들고 있는 배우 앤더스 다니엘슨 라이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에서 장피에르 레오가 정확히 그랬던 것처럼 카메라 속에서 생을 두배로 살아낸다. 오슬로 시리즈에서 그는 예술이 인생에 끼치는 복잡다단한 영향력과 도덕적 모호함을 주지하는 캐릭터이며, 이번 신작에선 그 특성이 한결 구시대적으로 취급되어 연민과 풍자의 시선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한편 <오슬로, 8월31일>에서 조연으로 등장했던 르나트 라인제브는 10년 사이 여러 영화, 연극의 조연을 거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처음 주연을 맡았다. 감독이 르나트 라인제브를 위해 쓴 드라마인 이 작품을 통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으니, 무려 14개의 챕터를 내달리는 이 대서사시의 엔딩으로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곁에는 요아킴 트리에와 데뷔 이후 꾸준히 함께하고 있는 공동 각본가 에스킬 포그트 감독(<이노센트>), 올리비에 부케 편집감독 등도 함께였다. 오랜 동료들이 모여 수없이 걸었던 거리로 다시 돌아가 만든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3부작의 정점이 마지막 순서에 있음을 알리는 드문 사례로 남았다.

CG 없이 만든 정지된 세계

어느 아침, 율리에는 커피를 내리는 연인의 등 뒤에 서서 부엌 전등의 스위치를 누른다. 유튜브 동영상의 일시정지(pause) 버튼이 눌린 듯 세계는 간단히 멈춘다. 여자는 새로운 남자와의 미래를 그리며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도시의 자동차, 트롤리, 개와 지나가는 행인, 평범한 연인과 산책자들은 어느새 훌륭한 조형물로 변해 있다. 눈앞의 사랑이 아닌 다른 상대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지상 최악의 사람(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 되고 싶지는 않은 모순된 마음이 팽팽한 장력을 형성해 시간을 붙잡고 있는 것만 같다. CGI 없이 물리적인 표현으로 정지 상태를 구현하려 했던 제작진은 엑스트라 배우들에게 얼음땡놀이를 연습시켰고, 실제 현장에선 촬영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몇몇 행인들까지 즉흥적으로 가세했다. 이들의 머리칼은 디지털 프리즈 프레임이 아닌 현실의 풍경 속에서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린다. 커피포트에서 흘러나오다 말고 얼어붙은 악셀의 커피 역시 커다란 갈색 고무줄을 잘라 만들었다. 마력이 풀린 직후 악셀이 건넨 커피를 받아든 율리에는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아날로그의 원리로 덧없는 환상을 구현한, 잔인하고 아름다운 세트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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