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식품 회사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사쿠코는 좀처럼 이성에 끌리지 않는다. 한때 회사 동료를 남자 친구로 둔 적은 있지만 이건 그의 갑작스런 고백을 엉겁결에 받아들여 벌어진 일이라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연애무감증을 고민하다 에이섹슈얼·에이로맨틱을 다룬 블로그를 발견한 사쿠코는 블로그의 주인이 얼마 전 식품 매장에서 마주친 점원 다카하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반가운 마음에 애정 없이 생활하는 동거를 제안한다. 작품은 무성애자들이 결국 이성애라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제자리로 돌아가는 전형적 구성을 따르지 않는다. 그보다 인물이 지닌 다양한 형태의 감정 방식을 세심히 살피며 위로를 전한다. 예의바른 질감의 바탕 위에서 섬세한 감정이 물결처럼 오가는 배우 다카하시 잇세이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멘>
여성을 향한 억압과 폭력을 형상화한, 최근에 접한 가장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포함한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자살로 협박하며 이별을 거부하는 남자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하퍼는 심신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영국 변두리 별장을 찾는다. 거기서 그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별장 주인, 나체로 스토킹하듯 마당까지 쫓아온 부랑자, 날카롭게 시비 거는 10대 소년, 남자 친구의 죽음을 은근히 하퍼 탓으로 돌리는 목사까지 수상하고 위협적인 남자들을 만난다. 특이한 건 등장인물과 달리 관객은 이들이 모두 같은 인물이라는 점을 안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도착한 영화 후반부, 이 남성들은 한데 모여 심히 저열한 이미지로 재탄생하는데, 이에 대항하는 하퍼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기만 하다.
<애드 아스트라>
로이는 우주 탐사 계획인 ‘리마 프로젝트’의 선봉대였던 아버지 클리포드가 16년 전부터 연락이 끊기자 죽었을 거라 여긴다. 태양계를 교란하는 전류 급증 사태를 수습할 적임자로 지목된 그는 달을 거쳐 화성으로 파견을 간다. 거기서 아버지가 살아남았으며, 동행한 동료를 살해하고 태양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서지 사태마저 초래한 원흉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접하고 당황한다. 장르에 개의치 않고 인물의 내면에 집중해온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집념은 <애드 아스트라>에서도 이어진다. 우주복 헬멧 너머로 비치는 로이의 무심한 표정과 차분한 톤의 독백으로 표상되는 로이의 초상은 여러 차례 등장하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모두 무화시키거나 사소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하며 작품을 독특한 지점으로 옮겨 우주영화의 지평을 한뼘 더 넓힌다.
<나이트 크롤러>
좀도둑 신세를 면치 못하던 루이스 블룸은 교통사고 현장을 촬영해 방송국에 매매하는 일당을 목격하고는 같은 길을 나선다. 생존을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집요한 면이 있는 그는 업계에서 최고가 되려고 분투하는데, 짐작대로 이 과정에서 점점 피사체를 향한 윤리적 태도를 잃고 괴물이 된다. 영화는 언론의 선정성과 영상 매체의 비윤리성을 예리하게 파고든 작품으로 평가되지만 은연중 루이스의 성공을 바라는 관객을 날카롭게 되짚는 작품이기도 하다. 관객은 루이스의 과오를 곁에서 보고도 그가 결국 두팀씩이나 거느린 미디어 업체의 사장으로 우뚝 설 때 승리감과 안도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눈앞에 카메라 또는 스크린을 위치시키는 것만으로도 우리 안의 악마성이 쉽게 태동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