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씨네21>의 제안을 받고 연재를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흘렀다. 국내 최고의 영화 잡지에 글이 실리게 되는 일은 정말로 영광이고 설레는 경험이겠지만, 나같이 랩만 할 줄 아는 사람의 이야기가 잡지의 두 페이지나 차지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편집장님은 되레 나에게 자유롭게 써달라 하셨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내가 잘 아는 분야와 독자들의 관심사를 적절히 믹스매치해보고 싶었다. 자연스레 힙합과 영화가 만나는 순간을 다뤄보면 어떨까를 떠올렸고, <씨네21>이라는 플랫폼에 잘 어울리는, 또 도움이 될 만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가만 보니 양쪽에 꽤 의미 있는 아카이빙이 될 수도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딥포커스’를 시작했고 그동안 <브라운 슈가> <허슬 & 플로우> <8마일> <위 아 40> <스카페이스>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 <트레이닝 데이> 등 총 7편의 작품을 소개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딥포커스의 짧은 연재를 마치게 됐다. 필자의 무능과 게으름이 연재 중단의 첫 번째 이유겠지만 두 번째 변명은 더이상 딥포커스할 만한 작품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물론 힙합 문화와 궤를 함께하는 좋은 장르영화들은 많다. 하지만 딥포커스는 필자의 개인적 경험과 까다로운 장르 취향에 철저히 의존해왔기에(갑작스럽게 의미부여해본다)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것이 아무래도 진정성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딥포커스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충분히 훌륭한 장르영화 몇편을 소개한다.
<슬램>(Slam, 1998) 쓰고 읽을 줄 모르는 래퍼가 감옥에서 글과 시를 배운다. 비트 없이 뱉는 일종의 랩-시 낭송, 스포큰 워드라고도 불리는 슬램을 맛볼 수 있는 영화.
<비트>(Beats, 2019)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은 누나를 목격한 주인공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런 그가 천재 비트 메이커라니. 어서 방구석을 탈출해 세상에 그 재능을 알려야 한다.
<미드 90>(Mid90s, 2018) 스케이트보드와 길거리. 90년대와 힙합. 우리 같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다 있다. 배우 겸 감독 조나 힐의 자전적 이야기를 빈티지한 영상으로 담았다.
<보이즈 앤 후드>(Boyz N The Hood, 1991) LA 빈민가 유색 이민자들의 삶을 꼼꼼하게 그려내며 90년대 초 흑인 사회의 범죄와 인종차별 문제 등을 고발한다. 이쪽 장르의 상징성을 갖는 작품. 아이스 큐브 엔터테인먼트의 시작.
<아트 오브 랩>(The art of Rap, 2012) 랩이 예술이 되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전설적인 랩 테크니션들이 대거 출연한 이 다큐멘터리는 랩이 가진 문학적, 또 수학적인 면모를 소개하고 때로는 치밀하게 라임을 설계하고 쌓아가는 랩 건축학을 담아낸다. 래퍼 아이스티가 제작과 호스트를 맡았다.
<거기엔 래퍼가 없다>(ＳＲ,サイタマノラッパー, 2008) 힙합과 무관해 보이는 일본의 한 시골 마을. 여기에 래퍼의 꿈을 키우는 청년들이 있다. 비루한 환경과 무관심 속에서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들이 웃프게 그려진다. 그래도 거기엔 래퍼가 있다.
<프레시 드레스드>(Fresh Dressed, 2014) 길거리 패션을 시작으로 명품 디자이너 브랜드와의 협업까지. 연대기별 힙합 문화를 상징하는 패션 형태의 변화와 유행의 흐름을 훑어본다. 나스가 제작에 참여한, 눈이 즐거운 다큐멘터리.
<라임크라임>(Limecrime, 2021) 한국에 몇 없는 힙합 장편영화. 그리고 이렇게 랩에 집중한 장르물은 처음 아닐지. 그만큼 배우들의 랩 실력과 클리셰가 아쉽지만 그 시절 고딩 래퍼들의 순수한 시작과 치기어림을 산정하면 그 아쉬움도 퉁칠 수 있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우리 동네 이발소에 무슨 일이>(Barbershop, 2002) 우리네 아주머니들의 동네 미용실처럼 빈민가 후드의 바버숍은 유색인종 이민자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이다. 동네의 왁자지껄한 사건, 사고들은 모두 이 바버숍을 통해 흘러오고 나간다. <브라운 슈가>와 더불어 따뜻함을 선사하는 힙합영화.
<도프>(Dope, 2015) <도프>의 마약 상인은 비정한 뒷골목 거리의 허슬러와 거리가 멀다. 인터넷과 비트코인으로 마약을 거래하게 된 고딩들의 이야기. 올드스쿨 허슬 영화와 도구와 배경은 바뀌었어도 이런 일의 결말은 결국 꼬이고 꼬인다는 건 변함없다. 음악이든 영화든, 장르 클리셰 역시도 세대교체됐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좋아하는 걸 향유할 수 있는 인생은 축복과 같다. 나 역시도 단순한 관심을 넘어 사랑하는,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 힙합, 또 영화라는 매개체는 나의 삶을 움직이는 연료나 다름없다. 이들을 통한 직간접적 경험은 늘 내가 만들 작품의 좋은 소스가 되어왔다. 언제나 좋은 100개의 인풋이 하나의 ‘쩌는’ 아웃풋을 뽑게 해준다. 예컨대 내가 만들어낸 힙합은 좋은 영화들이라는 소스가 없었다면 아마도 괜찮은 모습으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나의 오랜 창작 지론이자 일종의 아포페니아다. 힙합과 영화는 내 안에서 그렇게 공생해왔다. 그만큼 그 둘의 교집합을 발견하고 이렇게 딥포커스를 통해 소개할 수 있는 경험은 나에게 큰 의미를 준다. 나와 같은 취향의 주파수를 가진, 혹시나 이 코너를 유심히 지켜봐왔던 소수의 독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 이 연재의 목적은 성공이다. 비록 내 도전은 여기서 일단락되지만, 또 다른 즐거운 아이디어와 함께라면 딥포커스는 돌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