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송환>에는 1992년 영상부터 2021년 촬영분까지 30여년의 시간이 담겼다. 어느 시점에 영화를 완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나.
= 2006년에 영화가 한번 엎어지고 2013년 외국 프로덕션 합작 계획도 무산됐다. 그러다 2019년 남북미 정상 회동으로 송환이 추진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 부랴부랴 촬영을 다시 시작했다. 그 열기가 식었을 때 선생들의 실망이 굉장히 컸고 송환되는 장면은 이제 찍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엎느냐 송환이 안되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끝내느냐 갈림길에 섰다. 영화에 2020년 ‘송환 20주년 기념 2차 송환 촉구대회’가 나온다. 행사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는데 장기수 선생님이 10명 남짓 계시더라. 영화에서는 자리가 간소했다고 표현했지만 초라했다. 어떻게든 빨리 영화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끝내지 않으면 다 돌아가신 후에 끝낼 거야 뭐야.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아찔하더라. 이듬해 송환 21주기 되는 날 김영식 선생이 혼자 청와대 앞 1인 시위에 나섰다. 혼자 투덜투덜 나서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게 마지막 장면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슬픈 엔딩이지만 송환이든 통일이든 마냥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 선생들 모습에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송환>에서 순박하고 투박한 모습으로 사랑받았던 김영식 선생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만남의 집의 텃밭을 가꾸는 풍경에, 어깨띠를 두르고 지하철에서 투쟁하는 모습, 정부청사 앞에서 호통치는 낯선 모습을 붙여 인트로를 구성했다.
= 첫 장면에서 김영식 선생은 한숨도 쉬고 지쳐 보인다. 미군 부대 앞에도 가긴 하지만 굉장히 피곤한 얼굴이다. 희망 없이 계속 움직여야 하는 김영식 선생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전주에 살 때는 안 그러셨다. 서울에 올라와서 전처럼 조용하게 살 수 없게 됐다. <송환>에 나왔다는 이유로 송환 운동의 상징이 되고 제일 유명한 장기수가 되어버린 까닭에 말씀도 잘 못하시는데 온갖 집회에 나갔다. 이제는 입만 벌리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만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고 외친다. 김영식 선생의 그런 모습이 몸에 안 맞는 옷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했다
-비유법을 써서 설명하는 말 습관이나 영화 중간중간 삽입된 일기, 피아노 연습을 하는 모습을 통해 김영식 선생만의 감수성이 드러난다. 전작에서는 김영식 선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인상 깊게 회자되었는데, 그에 비해 더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2차 송환>에서 그의 말은 그만큼의 울림이 없다.
= 김영식 선생이 글을 잘 쓴다. 고양이를 봤는데 어땠다, 이런 일기를 보면 표현이 맛깔스럽다. 그런데 맨날 ‘우리 민족이’라고 시작하는 글은 재미가 없다. 내가 카메라를 들기 때문에 저렇게 하시는 걸까. 내 책임도 약간 느껴지고. 이제는 지하철 투쟁도 할 수 없어 유인물을 나눠주고 계신다. 맨날 똑같은 얘기를 써서 애들이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쥐어준다. 하지 말라고 해도 무조건 하신다. 시사회 날마다 가방에 유인물을 잔뜩 넣어 오신다. 운동의 맹점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고 작은 이야기도 강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사람을 가르치려는 태도가 생겼다. 곁에 있는 장기수들도 듣기 싫어한다. (웃음) 성찰 없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 그렇게 된다. 노동운동이나 철거 투쟁할 때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대체로 엉터리가 되어 사라진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그 판에서 못 버틴다. 김영식 선생은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쫓겨날 자리도 없으니까. 김영식 선생의 순박한 본성이 아직까지 선생을 지켜주고 지탱해준다고 본다. 제발 김영식 선생을 어디 앞장 세우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시사회 다니느라 또…. (웃음)
-빨치산, 전쟁포로 등 여러 장기수가 등장하지만 김영식 선생의 비중이 가장 크다. 인물 비중을 정하거나 이야기를 구성할 때 어디에 중점을 두었나.
= 만남의 집에 머물던 분들이 병원에 계시거나 지방에 다니셔서 문상봉 선생과 김영식 선생 둘뿐이었다. 문상봉 선생은 카메라를 좋아하지 않으니 김영식 선생이 자연스럽게 주인공이 됐다. 가까이 살고 계신 안학섭 선생도 깐깐한 조연 역할로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 <송환>에 비해 스케일도 작고 이야기 층위가 단조롭다. 원래 나는 북한 촬영을 담당했는데 그마저도 못하게 됐잖나. 현대사나 미국에 관한 내레이션으로 이야기 주변을 넓히고 층위를 더하려고 했다. 사실 1편에 비해 갑갑한 면이 있다. 박희성 선생, 양희철 선생, 안학섭 선생도 다른 다큐멘터리 감독이 비슷한 시기에 다큐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들 이야기를 소홀히 한 것도 있고 편집할 때 많이 덜어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박희성 선생의 다큐(<달과 닻>(감독 방아란))만 작품이 완성되고 나머지는 중단됐다. 이런 문제로 인물 균형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됐다. 지난번만큼 지방에 계신 분들을 열심히 찾아뵙지 못한 까닭도 있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 부모님 이야기가 더해진 것도 단조로운 구성의 타개책이었을까.
= 초반 영상을 촬영한 공은주 감독은 분명하게 투톱으로 가려고 했다. 북한에 갔더라면 투톱으로 충분한 이야기였다. 공 감독도 빠지면서 촬영이 중단됐고,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2016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원래는 김일성대학 의대를 다니다 혼자 월남해 수도여자의과대를 나온 어머니를 중심으로 별도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려 했다. 당시 어머니 동창생까지 만나게 되어 어머니 얘기도 어떻게든 풀어내고 싶다 생각하던 차에 <2차 송환>에 어머니 얘기를 조금 넣기로 했다. 그건 내 이야기를 담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렇게 나를 전반부에 등장시킬 방법을 찾았고 나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구성해나갈 수 있게 됐다.
-<송환>에 비해 내레이션이 줄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판단하던 전작의 존재감 있는 목소리와 달리 <2차 송환>의 목소리는 상황과 조금 거리를 둔 채 이야기한다.
= 그러고 보니 <송환> 때는 내레이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그만큼 고생하진 않았다. <송환>은 내가 다 찍어서 그때그때 고민하던 게 기억에 있잖나. 갈팡질팡하고 어떻게 해야 하지 싶은 상황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송환>도 듬성듬성 촬영한 초반부에 내레이션이 많고 뒷부분은 촘촘하게 찍어서 내레이션이 필요 없었다. 애초에 촬영이 잘돼서 내 고민과 회의감이 영상에 드러나는 게 가장 좋지만 내레이션도 중요한 표현 요소 중 하나다. 내레이션을 에세이처럼 잘 쓰는 크리스 마르케는 화면이랑 관계없는 내레이션을 통해 이미지나 소리를 더 풍부하게 증폭시킨다. 나도 크리스 마르케류의 내레이션을 써보고 싶은데 잘 안되네. (웃음)
-2004년 <송환> 개봉 때와 관객이 바뀌었다. 통일에 대한 간절함이 예전과 다른 오늘날 관객을 고려한 점도 있나.
= 사실 눈치채지 못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몇 군데 영화제를 돌면서 관객이 참 없구나 느꼈다. 통일은 이제 낡은 이야기고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나도 김영식 선생이 되는 거다. (웃음)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이라도 있어야 계속 뉴스가 있을 텐데 이제는 북핵 말고는 북한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기대치도 없다. 그저 골치 아픈 얘기처럼 느껴진다. 송환은 실패했지만 통일까지 실패한 건 아니다. 헛소리처럼 들리지만 머지않아 통일이 될 거다. 그걸 믿으니까 나도 이 작품을 하는 거고 김영식 선생은 아직도 1인 시위를 하는 거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 죽기 전에는 북에 못 가도 네 자식들은 갈 거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데 나도 지금 내 자식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살면서 찍는다. 혹은 찍는 게 삶이다
-영화 후반부에 가면 감독님은 카메라 앞에서 김영식 선생과 대화를 나누고 안학섭 선생에게 촬영 상황을 설명하기도 한다. 감독 스스로 피사체가 되는 후반부 장면은 거대한 송환 프로젝트에서 감독 역시 상황의 연출자가 아니라 등장인물이었음을 드러내는 장면처럼 보였다.
= 영화 속 정동진 장면은 류미례 감독의 딸이 촬영했는데 나를 찍고 있는 줄도 몰랐다. 정동진은 매년 놀러가는 곳이고 카메라는 늘 가져간다. 특별히 작업하러 떠난 게 아니다. 만남의 집에서 열린 합동 추모식 장면은 조연출이 촬영하고 있는 걸 알았다. 다큐멘터리에서 등장인물과 감독이 너는 너, 나는 나 이렇게 분리될 수 없다. 80년대 다큐멘터리 책에는 ‘절대 연출해서는 안된다’, ‘감독이라는 호칭은 욕’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런 인식이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다. <송환> 때도 내 얼굴이 가끔 나오잖나. 주관적으로 가기로 했으니까 그럴 바엔 나도 좀 나오자, 이런 생각이었는데 이번엔 너무 정면으로 나왔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내 영화 작업은 늘 어떤 목적을 갖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만나고 친해지고 듬성듬성 촬영한 것이 내레이션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됐다. 남에게 권할 만한 건 아니지만 내 스타일인 셈이다. 그래서 직업으로서 다큐멘터리는 낯설게 느껴진다. 살면서 찍는다. 혹은 찍는 게 삶이다 보니 그렇게 나왔다.
-전반부는 공은주 감독이 촬영했고 정작 감독님이 맡은 북한 부분은 촬영되지 못했다. 감독님이 다 편집하긴 했지만 <2차 송환>이라는 최종 결과물은 감독님과 조금 거리감 있어 보인다.
= 전작 때는 장기수 선생들이 봉천동 바로 옆집에 살았다. 우리 집에 들락날락하며 애들을 봐줄 만큼 친했다. 내 호기심도 컸고 선생들도 막 출소한 때라 나한테 많이 의지했다. 공 감독이 촬영하는 동안에도 나는 <송환>이 잘돼서 여기저기 불려다녔잖나. 그러면서 좀 소홀했다. 그만큼 거리감이 있다. 공 감독은 나와 달리 침투력과 돌파력이 있어 나라면 절대 못 찍었을 장면들을 찍었다. 전주에 사는 맹기남 선생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표정과 말들은 공 감독의 살뜰함으로 얻어낸 명장면이다. 전반부, 후반부 각자 내레이션을 쓰고 공동 연출로 갔으면 좋았겠지만 사정상 그렇게 되지 못했다.
-송환 문제를 30년간 끌어안은 힘은 어디서 나왔나.
= ‘너 송환이랑 대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물으면 난감하다. 실향민의 아들이라 몸속에 그런 DNA가 있나. 무의식적으로 북에 관심이 있는 건가. 우리 부모님은 김영식 선생과 사상으로나 형편으로나 대척점에 있지만 그래도 똑같이 고향을 그리워했다. 모두 분단으로 희생된 분들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끌어안을 수 있었나 싶기도 하다. 사실 부모님과 그렇게 가깝지 않았고 아버지랑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웃음) 선생들과의 관계나 의리, 양심수 후원회원들의 헌신에 대한 감동 때문에 30년을 이어간 것이겠지. <상계동 올림픽> 때도 그랬고 <송환>도 그랬고 언제나 계획이 없었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로 돈을 벌어본 적 없거든. (웃음) 상계동 3년이나 송환 30년이나, 기획안도 없을 만큼 무계획적이고 게을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게을러도 초지일관하면 된다.
-‘3차 송환’도 보게 될까.
= <2차 송환>은 실패에 실패를 반복하다가 끝내 송환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영식 선생이 계시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내년 봄 생신 때 내가 또 카메라를 들고 가겠지. 이제 김영식 선생이 어디 갈 때 카메라 없으면 이상하니까. 그러다보면 또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러다 돌아가실 수도 있고 내가 북에 갈 수도 있다. ‘3차 송환’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촬영은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