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크리틱] ‘성적표의 김민영’의 시차가 암시하는 것
2022-10-05
글 : 이보라 (영화평론가)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영상은 그것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언제나 앞서 발생한 시간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부득이하게 회고적 성격을 지닌다. 영상에는 기본적으로 과거라는 시제가 기입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관람 행위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없던 과거를 기억해내기도 한다. 이는 영상이 재생될 때, 영상만 재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흘러가는 과거의 표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머릿속의 또 다른 회로를 작동시킨다. 단순한 문장들로 요약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그래서 영상을 보는 일에는 시간의 엉킴이 발생한다(라이브 스트리밍이 익숙해진 작금에 실시간 영상의 존재도 간과할 순 없지만 그마저도 관람자에게 도달하기까지 미세한 시차가 있기 마련이다).

청춘영화의 시차

근래 개봉한 두편의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한 여성이 모니터 화면을 통해 다른 여성이 등장하는 영상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경아의 딸>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표의 김민영>이다. 인물의 이름을 나란히 제목에 포함시킨 두 영화는 일방적인 응시이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을 고심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곱씹어볼 만한데, 극중 두 영상이 초래하는 시간의 방향은 상이하다. 표면적으로 닮은 두 장면을 잠깐 떠올려보려 한다.

요컨대 <경아의 딸> 속 영상은 궁극적으로 미래로의 추동을 일으키는 기제가 된다. 경아(김정영)가 연수(하윤경)의 얼굴을, 그리고 최종적으로 연수가 화면 너머 자신의 얼굴을 볼 때, 이는 연인 사이의 내밀한 행위가 담긴 동영상이 공개되어 불안한 일상을 살고 있는 연수의 삶을 재건 혹은 갱신하기 위한 단계가 되고 관객은 이 대목에서 모종의 장래성을 상상할 수 있다. <경아의 딸>은 표면에 비친 ‘그’ 얼굴을 ‘내’ 얼굴로 (긍정이 아니라) 수긍할 수 있을까를 시험한다. 반면 <성적표의 김민영>에서 정희(김주아)가 보는, 친구 민영(윤아정)의 오디션 영상은 미래를 차단하는 데 기여한다. 해당 영상은 민영에게 정희도 몰랐던 꿈이 있었다는 놀랄 만한 사실과, 누가 봐도 그 꿈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이중으로 지닌다. 민영의 간절한 노래와 춤은 이후의 가능성을 봉인하고 오로지 간절한 노래와 춤으로만 남는다. 특히 이 장면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아예 다른 시간을 살았던 두 친구의 머나먼 거리를 확인하게 만든다. (<경아의 딸>의 담대함을 논하는 것과 별개로) <성적표의 김민영>은 미래를 열어젖히는 대신 반복적으로 과거에 기댄다. 현재에 틈입하는 과거는 인물들의 시간을 교차하고 엇갈리게 만든다. 달리 말해 <성적표의 김민영>은 지독한 ‘현실’에 묶인 민영과 ‘느리게 배우는 사람’인 정희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상식청진기’ 영상 속 진행자의 허영이 깃든 멘트를 빌려와, “미래가 있기나 한 걸까”? <성적표의 김민영>은 수능 직후 스무살을 다룬 인물들이 주인공인 만큼 소위 청춘영화에 기대되는 성장이라는 소재를 가시화하기 위해 시차(時差)의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시작부터 시간이 조금 이상하게 흐른다. 수능을 100일 앞둔 세 친구 정희, 민영, 수산나(손다현)가 삼행시 클럽을 잠정적으로 해체한다는 내용의 선언식을 치르고 나면 그들이 정한 행동강령이 보이스 오버로 흐른다. 화면에는 학교에서의 일상이 짤막하게 제시되다가 정희와 민영이 취침하는 장면 이후 금세 종료된다. 하복을 입고 사진을 찍던 이들은 금세 외투를 입고 수능일로 이동해 있다. ‘앞으로’를 말하던 영화는 시작 후 5분도 채 지나기 전에 (흔히 생각하는 바, 종료의 감각을 연상시키는) 수능의 계절로 뛰어버린 후 그 ‘앞으로’라 여겨질 만한 시간을 급속히 소거한다. 이들의 학창 시절은 돌연 어디로 사라진 걸까. 왜 수능 이후 벌써 여름이 도착해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스무살이 되었다. 나 대신 남에게 빌려주는 시간, 그리하여 지연된 성장이라는 모티프를 지시하듯 정희는 수능일 앞자리에 앉은 남학생에게 손목시계를 빌려주고는 돌려받지 못한다. 친구들처럼 대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테니스장에 취직한 정희는 스스로 말하듯 “때를 기다리고 있”다. 다만 그 타이밍을 아직 유능하게 눈치채지 못하는 편이다. 가령 홀로 가게에서 빵을 먹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니 이미 영업이 종료된 가게의 창문 너머로 미처 들고 나오지 못한 제 가방을 보게 될 때나, 줌으로 진행되는 삼행시 모임에서 문장을 이어나가는 정희와 운을 떼는 민영의 타이밍이 맞지 않을 때처럼 말이다. 미국의 대학교에 입학한 수산나는 문자 그대로 정희, 민영과는 다른 시간에 살고 있다. 한여름 밤에 어울리지 않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꼬마전구의 불빛처럼 <성적표의 김민영> 속 시간은 제멋대로 흐르거나 기이하게 공존한다.

시점의 이중화

시차는 시점의 문제를 동반한다. 유쾌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이를테면 잡동사니가 담긴 정희의 트렁크 속 즉석밥을 비추던 카메라는 줌인하여, 학창 시절 민영이 큰소리치다 큰코다치던 순간들, 일명 ‘김민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 시퀀스로 이동한다. 영화에서 플래시백은 이전의 세계를 다시 불러내는 일(또는 다시 돌아가는 일)이라는 점에서 과거로의 이행을 가장 직설적으로 구현하는 기법이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초반부에 급격하게 배제되었던 ‘여고 시절’ 단편들을 플래시백을 통해 주인공 정희가 아니라 민영을 중심으로 재편한다. 일기장 시퀀스도 마찬가지로, 지금 일기장을 읽는 주체를 정희로 삼되 이를 발화하는 내레이터로 민영을 설정함으로써 민영이 부재한 상태에서 민영의 시점을 제시하여 시점을 이중화한다. 물론 평행 편집을 통해 두 인물의 시공간적 경계는 선명히 인식되지만, 마치 액자처럼 정희의 시점 안에 민영의 입장이 포함된다. 무엇보다 정희는 민영의 일기장을 거꾸로 읽어나간다. 자신이 민영 옆에 없던 대학교 시절의 일화들을 거슬러 올라, 같은 기숙사 방을 쓰던 여고 시절까지 진입함으로써 내가 함께 있던 시간 속 친구마저 사실은 제대로 안 적이 없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둘 사이의 이격은 영영 더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불화라 부를 수 있을까?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으므로 도리어 관계의 샛길을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희가 세계지도 위 민영의 사진들을 사진이 찍힌 장소와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옮겨놓듯, 영화는 인물들의 시공간을 정갈하게 배치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다. 다만 판이한 시간을 살면서도 둘은 함께할 수 있다. 결말에서 공모전 전시회에 나란히 걸린 두 작품에는 각각 두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다. 수상 확률을 높이기 위해 민영의 이름으로 한 작품 더 제출한 정희는, 그리하여 스스로 또한 ‘김민영’이 될 수도 있다. 두 이름을 가진 한명의 정희, 혹은 함께 놓인 두 사람. <성적표의 김민영>은 시간을 거듭해 단절과 연결을 오가며 끝내 서로가 서로를 기다릴 관계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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