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②] 고다르와 죽음, 그리고 1990년대
2022-10-06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과거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필름 소셜리즘>

장뤽 고다르의 죽음은 녹화되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도덕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공상이지만, 그가 조력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 마지막 무대의 시각적 형식이었다. 스스로 최후를 선택하는 한 사람을 둘러싸고 주변에 의료진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현장에 과연 카메라는 입회하고 있었을까? 종종 그 자신을 픽션의 등장인물로 삼아왔고, 그가 거주하는 집 내부와 아틀리에, 근처의 호수를 영화적 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던 영상 작가라면, 모든 기록을 말살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학살조차 분명 촬영되었을 것이며 “그것을 촬영한 아카이브 영상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영화감독이라면, 그리고 조력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개인의 죽음에 덧대진 합법과 위법의 범위를 캐묻는 인간이라면(이는 <필름 소셜리즘>에서 제시한 대로 ‘법이 올바르지 못할 때, 정의가 법에 우선한다’는 저항의 언어에 기초한다) 삶의 마지막에 하나의 이미지를 남기는 ‘연출’을 시도했을지 모른다는 불순한 생각을 품게 된다.

만약 그 현장이 촬영되었다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공개될지 모르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사변적 공상이 환기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는 아프지 않았다. 단지 지쳤을 뿐이다. 그는 삶을 끝내기로 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중요했다”라는 공식적인 문자를 통해 고다르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접속할 뿐이다. 이미지의 부재와 문자의 잔존. 다른 이라면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이 부고의 조건이 고다르에게는 남다른 문제로 남겨진다. 고다르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결정과 선택이 우리에게는 지극히 논쟁적인 ‘고다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저명한 주장은 이 순간에 다시 한번 도발적으로 솟아오른다.

동시에 정반대의 공상을 떠올려볼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시점의 인간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것은 고다르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범용한 유서의 형식일 뿐이라 반박하는 것이다. 죽기 직전에 작성된 유언은 고다르에게 적합하지 않다. 세르주 다네가 말한 대로 고다르는 “얼마 전의 과거와 가까운 미래 사이에 붙들려 있는” 기묘한 시간감각에 노출된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용도로 기획된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이하 ‘고다르의 자화상’)의 도입부에서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대개 죽음이 찾아오고 애도에 잠기지만, 나는 먼저 애도에 잠기는 것으로부터 삶을 시작했다”라고 일찍이 읊조리고 있었다(‘12월의 자화상’이라는 부제로도 알려진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100년 전 뤼미에르의 영화가 상영된 12월과 자신이 태어난 12월을 겹쳐둔다). 이 말을 따르자면 고다르는 찾아오지 않은 미래의 죽음을 과거에 두고, 과거에 작성된 애도를 보이지 않는 미래에 던지는 눈먼 송신인이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릴케를 인용해 말한 것처럼, 고다르에게 있어 인간은 무엇보다 시간 앞에 두눈이 멀어버린 존재이다.

눈먼 자화상

<포에버 모차르트>

누군가에겐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겐 비로소 도착한 고다르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섣불리 애도의 문장을 들먹일 순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언젠가 고다르는 시인만이 작가의 부고를 제대로 추도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방법과 경력을 요약하는 건 성경을 요약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작업일 터이다. 지금으로선 고다르에게 던져진,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제기한 죽음과 이미지의 조건을 간신히 가늠해볼 뿐이다. <고다르의 자화상>에서 이야기하듯이 고다르는 죽음을 마주하지 않은 채로 일찌감치 애도에 잠겼고, 우리는 마침내 현실화된 죽음을 목격하지 못한 채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런 비대칭의 상태는 <포에버 모차르트>에서 하녀 자밀라가 꺼내는 알쏭달쏭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한번은 차에 치여 넘어진 적이 있어요. 저는 도로에 떨어졌고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죠. 하지만 죽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죽음은 없어요. 거기엔 단지 제가 있을 뿐이죠. 곧 죽게 될 제가요.” 그 자리에 죽음 일반은 없지만, 곧 죽음에 이르게 될 한 사람이 있다. 이를 다시 고다르에게 대입한다면, 찾아오지 않는 죽음을 기다리며 애도에 붙들린 삶을 유지하는 작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20세기 영화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현실의 잔혹한 역사를 겹쳐두는 장대한 결산인 <영화의 역사(들)>의 작업을 착수한 1988년 이래로 고다르의 영화에는 죽음과 소멸, 영화의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위기가 함께하고 있다. 필름의 유실과 마모, 두 차례의 세계대전, 텔레비전의 등장은 영화 이미지의 물질성과 지위를 일그러뜨렸다. 고다르는 20세기의 끝자락을 영화예술이 역사와 산업의 이중적 위기에 처한 시기로 접근한다. 예술적 열망을 사수하고 군중을 통합하는 매체로서의 영화의 기획은 이제 성립하지 않는다. 영화는 타락한 매체가 되었다. 1980년 알프레도 히치콕이 사망했을 때 고다르는 “그의 죽음은 영화의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 이행을 표시한다”라고 말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고다르는 영화를 찍는 데 실패하거나 캐스팅과 촬영이 지연되거나 진척되지 않는 제작과정에 놓인 창작자들을 관측하면서 그들의 반대편에 파괴된 역사의 기록을 새겨둔다.

영화를 “19세기의 열망이 실현된 20세기의 사물”이라 정의하는 고다르는 태생적으로 19세기의 박물관과 서재에서 본 것들을 훔치는 이미지의 도굴꾼이면서 20세기에 벌어진 전쟁과 학살과 감금의 현장(아우슈비츠와 베를린 장벽, 알제리 독립전쟁,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내전, 팔레스타인)을 찾는 역사의 탐사자다. 이런 이중적인 역량은 두 세기에 걸쳐 있는 영화의 ‘뒤늦은’ 운명을 자각하게 한다. 고다르는 과거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너무 뒤늦게 보았고, 이미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이 지나간 뒤에 그 현장을 찾았다. 그러므로 영화(예술)와 현실을 둘러싸는 이중의 책무가 그의 영화에는 드리워져 있다. 그는 어둠 속의 극장을 밝히는 영화의 가시적인 빛을 응시하면서, 현실의 조건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 비가시의 장소를 끌어들인다. 파괴된 베를린 장벽(<신 독일영년>), 사라예보의 잔해(<포에버 모차르트>), 팔레스타인의 평화로운 풍경(<아워 뮤직>)을 말이다. 그 장소엔 우리의 눈이 현실을 제시간에 마주하지 못했으며, 그 현실의 조각들이 영화에 의해 드러나지 않았다는 자각이 머물러 있다.

<고다르의 자화상>의 한 장면에서 영화는 노트에 적힌 메모를 보여준다. 고다르의 목소리가 그 메모를 읽는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테니스를 치고 있는 고다르를 비춘다. 리시브가 너무 빠르게 되돌아온 나머지 다급하게 팔을 뻗지만 공을 받아치지 못한다. 어설픈 슬랩스틱을 구사한 고다르는 떨어진 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지나갔군.” 이처럼 시간은 종이에 적힌 문자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지만, 되돌아온 테니스공처럼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고다르가 구축하는 영화 속의 현실은 남겨진 과거에 짓눌리면서, 변형되는 현재를 붙잡지 못하는 이중의 모순에 노출되어 있다. 그 중간에 공을 놓쳐 허둥거리는 고다르의 신체가 있다. 슬랩스틱은 영화의 운명이다. 카메라와 피사체는 언제나 정확한 타이밍을 놓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

<신 독일 영년>

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주요한 역량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투사와 상영의 기능이다. 영화는 대상을 보지 못한다 해도 투사하고 상영할 수 있다. <고다르의 자화상>의 후반부에는 맹인 여성 편집자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영화의 초반부에 드니 디드로의 <맹인에 관한 서한>에 두손을 얹으며 손과 눈의 관계를 낭독하던 것과 비슷하게 고다르는 디드로의 문답을 다시 한번 인용한다. “당신은 그것을 어디에서 보고 있죠?” “내 머릿속에서요. 당신과 같이.” 고다르는 편집자에게 편집 중인 영화를 보여준다. 아니, 이런 표현은 우리의 오랜 습관일 뿐이다. 그는 편집자에게 영화를 들려준다. 그녀는 필름을 손으로 만지면서 영화를 듣는다. 여기서 영화는 시각적 체험이 아닌 귀에 들리는 소리와 손에 접촉하는 질감으로 드러난다.

편집자는 고다르가 들려준 영화를 두고 “만들지 못한 영화군요”라고 말한다. 고다르는 그 말에 동의하며 “아무도 본 적 없는 영화예요”라고 답한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아무도 목격한 적 없는 무명의 영화가 맹인 편집자의 손과 귀를 타고 스크린에 전해진다. 우리는 그 필름이, 한번도 나타난 적 없는 과거가 편집기에 감겨 돌아가는 소리를 듣게 될 뿐이다.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역설이 벌어진다. 스크린은 기억에서 지워지고 배제된 영화의 표상을 현재로 불러들이는 장소지만, 그 절차는 시각을 차단당한 눈먼 편집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영화가 비로소 영사되지만, 그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영화다. 고다르는 자본의 승인과 합법적 절차로만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질서가 말소해버린 영상의 가능성을 가져온다. 일차적으로 이는 필름 속에 묻힌 영화를 되비추고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장면에서 고다르는 상영의 체계에서 추방된 영상을 가져와 그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오히려 눈먼 자의 시각을 빌려 보이지 않는 영화의 권리를 주장한다.

맹인 편집자의 목소리를 빌려, 카메라는 실내 공간에서 벗어나 인간이 보이지 않는 풍경을 비춘다. 시각장애인 여성인 클레르 바르톨리는 고다르의 <누벨바그>에 관한 글에서 “눈이 외부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내가 새삼 깨달은 것은 시력을 잃으면서부터이다. 귀는 오히려 우리를 내면의 세계로 데려간다”라고 적었다. 카메라에 비친 풍경은 인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풍경이자 자연의 공간이다. 눈이 뒤덮인 겨울의 풍경이 지나가고 <고다르의 자화상>의 마지막 장면은 바람과 그림자가 담긴 봄날의 풍경에 도착한다. 영화 제작의 중대한 목표를 “움직이는 숏에서 정지된 숏으로 이행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는 고다르가 제안하는 한 가지 결론이 이 숏에 있다. 그는 이미지를 파고들어 다른 목소리, 다른 내면과 결부 짓는다. 이미지는 무수한 파편들로 부서지지만 그가 브레히트를 끌어들여 말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오직 파편들만이 진정성의 흔적을 전달”할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80년대 이후의 고다르 영화들에서 이미지의 충돌은 융합을 향하고 있으며 영화로부터 현실을 돌려주려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처럼, 고다르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눈에 보이는 영화의 흔적이 제거된 미래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단일한 숏의 규칙을 따르는 대신 기계장치에서 풍경으로, 감금된 실내에서 광활한 외부로, 스크린에 비친 영화에서 실현되지 않은 자연의 가능성으로 향한다. 90년대의 고다르에게 자연은 현실에서 훼손된 영화가 향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투사의 장소다. 하지만 <고다르의 자화상>에서 자연을 눈으로 관측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자연의 풍경은 역사적 상흔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흔적을 초과하는 더 거대한 시간으로 스크린에 되돌아온다.

<고다르의 자화상>은 빈 벽에서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벽에 비치는 그림자의 실루엣과 신원을 알 수 없는 소년의 초상을 같은 화면에 보여주는 첫 장면으로 화면을 연다. 영화는 빈 벽과 어둠을 조건으로 삼을 뿐이다. 화면이 열리면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서서히 빛이 새어들어오지만, 그림자의 정체와 초상화의 소년이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고다르는 이 구도를 두고 화가가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자기를 그리는 모습과 같다고 말한다). 네거티브 이미지로 인화된 사진 속 소년이 유년기의 고다르이고, 마부제 박사처럼 실루엣으로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 역시 노년의 고다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이 영화의 주된 피사체인 고다르는 대단히 모호하고 분열적인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모호해지는 것은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시선이기도 하다. 고다르의 그림자와 유년기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관객은 이 순간 영화 속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눈먼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부채의 기록

<언어와의 작별>

<고다르의 자화상>의 마지막 대사는 이러하다.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세계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도록, 사랑함으로써 나를 희생해야 한다.” 21세기 들어 또 한번 사라예보를 방문하는 <아워 뮤직>에서 고다르는 이미지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며 ‘보는 것’과 ‘상상하는 것’의 차이를 언급한다.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춰야 하지만, 상상하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한다고 말한다. 객석을 비추는 부드러운 트래블링의 끝에 강연을 듣는 청중 가운데 유일하게 눈을 감고 있는 팔레스타인 학생 올가의 모습이 나온다. 강의가 끝나고 그녀는 극장에서 자살을 택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무대인 ‘천국’에 진입해 눈을 감고 상상을 이어간다. 그녀는 천국의 한복판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로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영화는 그렇게 도래할 영화를 기다린다.

F.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를 느슨하게 빌려온 <누벨바그>에서 고다르는 작은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는 연인들의 모습을 두 차례 반복한다. 한 번은 죽음의 위협이, 다른 한 번은 구제의 손짓이 그 작은 무대에서 벌어진다. 고다르는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뒤늦게 보았던 무르나우의 영화에 한 가지 이미지를 되갚는다. 수십 년 전에 보았던 연인들의 기록을 변주해 스크린에 드리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시차를 두고 다른 한 번의 기회를 건네는 장치다. 그에게 있어 영화는 죽음과 부활을 오가며 나타나고 사라지는 형상들의 결합으로 성립된다. <경멸>에서 프리츠 랑을 불러들인 것처럼, <비브르 사 비>에서 칼 드레이어를 대면하던 것처럼, <미치광이 삐에로>에서 새무얼 풀러에게 질문하던 것처럼,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에 진 부채를 스크린 위에 갚음으로써 영화사의 마지막 증언자로 남는다.

그림자로서의 노년의 ‘고다르’와 사진적 이미지로서의 유년기의 ‘고다르’가 여전히 <고다르의 자화상>의 첫 장면에 남아 있지만, 현실의 고다르는 그렇지 못했다. 이미지 없이 문자로 전달된 고다르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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