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O> EO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 폴란드, 이탈리아 / 2022년 / 88분 / 아이콘
붉은 조명 아래 교감하는 당나귀와 여자 사이의 기류에는 성적인 함의가 가득하다. 이곳은 서커스장이다. 덕분에 뒤이어 등장하는 동물권 운동가들의 동물 서커스 반대 시위나 당나귀 보호소는 다소 복잡한 맥락을 갖지만, 매 순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EO(당나귀 울음소리에서 따온 이름)는 기본적으로 상황의 적극적 서술자가 아닌 신중한 관찰자다. 그리고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했던 당나귀는 폴란드에서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EO>의 여정에서 흡사 예수 수난과 같은 길을 밟는다. 자유의 몸이 된 EO는 역설적이게도 정서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생명체와 강제 이별을 하고 신변을 보호받지 못한다. 안정적인 터전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EO가 길에서 조우하는 축구 훌리건, 동물 밀수꾼, 소시지공장 노동자 등 대부분의 인간은 폭력적인 마초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고통을 전시하는 대신 EO의 내면을 과감하게 해석하고 표현함으로써 예수적 존재의 존엄성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지킨다. 당나귀 시점숏과 드론 촬영, 초현실적인 꿈 시퀀스, 로봇을 활용한 실험적 연출을 주저하지 않는 노장감독의 유려한 솜씨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걸작 <당나귀 발타자르>(1966)의 가장 근사한 재해석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정의 끝에 다다르면 어떤 정치적 코멘트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주인공은 그의 존재 방식을 통해 가장 정치적인 함의를 남긴다. 동물과 동물, 동물과 자연의 해석되지 않는 소통을 담는 데 꽤 성실한 시간을 보내는 <EO>는 시점의 정당성까지 확보한 생태주의 영화다. 동물 출연자들의 동물권 보장을 위해 총 6마리의 당나귀가 번갈아가며 EO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