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산국제영화제]
#BIFF 4호 [인터뷰] '빅슬립' 김태훈 감독, “잠든 모습만큼은 정말 잘 찍고 싶었다”
2022-10-09
글 : 조현나
사진 : 백종헌
<빅슬립> 김태훈 감독 인터뷰

고등학생 길호(최준우)는 매일 밤 불안한 걸음으로 밤거리를 서성인다.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맞는 것보다 밤길을 거니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던 까닭이다. 공장 직원인 기영(김영성)은 평상 한켠에서 잠을 청한 길호를 자신의 집으로 들인다. 차가운 밤공기와 다른 가출 청소년들의 위협을 뒤로 한 채, 길호는 기영의 집에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빅슬립>은 ‘인디포럼 2014‘ 폐막작으로 선정됐던 단편 <명희>를 연출한 김태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타인의 슬픔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 주인공의 선택을 세심한 필치로 묘사한 작품이다. “인물들에게 빛나는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김태훈 감독의 바람대로 기영과 길호는 긴 갈등 끝에 잠이라는 깊은 평온을 얻는다.

- 가출 청소년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빅슬립>의 출발점이 됐다고 들었다.

= 같이 영화했던 감독들을 모아 ‘시내버스’라는 교육 업체를 차린 적이 있다.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같은 곳과 연계해 아이들과 영화를 찍는 수업을 여러 차례 진행했다. 그때 만난 아이들이 대부분 탈학교 청소년들, 소년원 혹은 쉼터에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 중에 수업 시간마다 항상 자는 아이가 있었다. 하루는 깨워서 ‘왜 맨날 자냐, 내 수업 재미없냐’고 물었더니 술에 취한 아버지가 무서워서 밤마다 길거리를 헤맨다고, 밤에 잠을 못자서 졸려서 그런 거라고 답하는 거다. 그 뒤로 그 친구를 깨운 적이 없다. 항상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들, 예전의 경험이나 내가 만난 사람들이 뒤늦게 찾아와 영화가 되는데 은연 중 그 친구가 내게 남았던 것 같다. <빅슬립> 또한 그 결과물이다.

- 일찍부터 제목을 정하고 시작한 셈이다.

= 영화는 제목 따라간다던데 괜찮은 건가 싶기도 했다. (웃음) 제목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의 소설에서 가져왔다. 소설의 ‘빅슬립’에는 죽음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 의미를 영화적으로 확장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가능할 것 같더라. 그렇게 작업을 시작했다.

- 아이들이 머리에 쓰고 다니는 랜턴을 주의 깊게 봤다. 아이들과 빛을 연결 짓는 매개체로 느껴졌는데, 실제로 가출 청소년들이 랜턴을 많이 사용하나.

= 이 질문을 해줘서 굉장히 감사하다. 예전에 한밤중에 길거리에서 아이들과 라이트 페인팅 수업을 했었다. 아이들이 랜턴으로 그림을 그리면 카메라의 장노출을 이용해 기록하는 식이었는데, 그때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예전에 한 단관 극장을 잠시 운영한 적이 있어서 내겐 영화를 상영할 때, 그러니까 빛이 투영될 때의 감각 같은 게 있다. 카메라 뒤에 서서 랜턴으로 빛을 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아이들이 마치 영화처럼 느껴지는 거다. 흔히들 가출 청소년을 어둡게 묘사하지 않나. 나는 반대로 수업할 때의 감각을 살려 아이들을 빛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 프리 프로덕션 때 배우들과 대화를 자주 나누며 시나리오를 고친다고 들었다. 자기 의견이 반영되어서인지 배우들의 에너지가 굉장히 좋던데, 그만큼 캐스팅도 신중하게 했겠다.

= 그렇다. 실제로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일지 유심히 보는 편이다. 길호 역의 최준우 배우는 촬영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다. 길호 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는데 그만한 배우를 찾기 어려워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김영성 배우는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걷는 폼 하며, 그냥 기영이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들어오자마자 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더라. (웃음) 영성 배우는 정형화된 연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들어와선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를 틀고 의자에 다리를 기댄 채 누워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또 영화 말미에 기영이 아이들에게 화내는 신이 있다. 당시엔 대사 없이 상황만 주어졌는데, 김영성 배우의 연기를 보고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일어나 같이 소통하고 있었다. 그때 느꼈다. 이 사람이다! (웃음) 당시의 쾌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기영은 첫 시나리오 때부터 직업과 성격 등이 가장 많이 변모한 인물이다. 김영성이란 배우를 만난 뒤로 기영에게 그의 감수성과 스타일이 그대로 스며들었고 그렇게 현재의 거칠면서도 다정한 기영이 완성됐다.

- 기영과 길호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의견을 확실히 드러낸다. 그런 캐릭터를 선호하나.

= 그렇다. 태도가 드러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내가 다루는 캐릭터들이 불쌍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 또한 내겐 굉장히 큰 화두다.

- 기영과 길호의 관계가 주요하게 그려지긴 하지만 그만큼 기영과 부모님의 관계도 밀도 있게 다룬다. 기영이 부모님을 만날 때마다 애증의 감정이 확고히 드러나는데, 그 감정이 기영이 공들여 키우는 화분들과도 묘하게 연결되더라.

= 기영에겐 아버지라는 결핍이 있지만 반면에 어머니라는 집착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계속 드러내는데 어머니에 대한 것들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러다 화분이 생각났다. (사진을 보여주며) 부모님이 오랫동안 꽃들을 키우셨다. 아마도 그런 내 개인적인 경험이 영화에 녹아든 것 같다.

- 고된 하루를 마친 인물들이 곤히 잠든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온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방황하는 <빅슬립>의 인물들에게 평화가 깃드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 잠든 모습만큼은 정말 잘 찍고 싶어서 조명 감독님, 촬영 감독님께 계속 말씀을 드렸다. 누구에게나 잠이 필요하고, 잠든 순간의 편안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각이지 않나. 내가 굳이 설명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 순간을 잘 담아내면, 이 인물들에게 잠이 얼마나 필요한지 관객들이 곧바로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기영과 길호가 잠든 장면으로 끝내도 괜찮을까 걱정하긴 했는데, 그래도 보신 분들께 그 감각이 잘 공유가 된 것 같다.

- 원래 공대생이었다고 들었다. 영화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건 언제부터인가.

= 형이 엄청난 영화광이라 어릴 때부터 형을 따라 영화를 많이 봤다. 대학교 1학년 때 군대에 갔는데 거기서 내가 뭘 하고 살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그랬더니 영화가 남았다. 수능이 6개월 남은 시점에 전역을 했고 모아 둔 돈으로 재수를 해보겠다고 부모님께 울며 말했다. 그리고 바로 노량진으로 갔다. 재수학원에 등록하러 갔는데 거기에 장재현 감독이 있는 거다. 장재현 감독과는 고향에서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한 형동생 사이다. “형, 형이 여기 왜있어?” “나 영화하려고.” “나도야!” 죽었다고 생각하고 6개월간 같이 열심히 공부했다. (웃음) 영화과에 진학해 단편을 제작하고 장재현 감독이 <검은 사제들>, 내가 <빅슬립>을 연출할 때까지 서로 영화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빅슬립>을 준비할 때도 장재현 감독에게 사소한 부분까지 많이 물어봤다.

- 계획된 차기작도 있나.

= 사실 내가 영화를 계속 해도 되는지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과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도망치듯 살아왔는데, <빅슬립>을 통해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됐다. 19회차 만에 <빅슬립>의 촬영을 끝내야 해서 아쉬움이 남았었다. 하지만 후반 작업을 하며 마음을 많이 회복했다. 내가 천천히 고민하고, 작업을 뒤엎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음악 감독님과 음향 감독님이 같이 견뎌주셨다. 그때 영화를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우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빅슬립>을 잘 선보인 뒤에 천천히 다음 작업을 생각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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