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산국제영화제]
#BIFF 4호 [인터뷰] '지옥만세' 임오정 감독, "세상의 모든 외톨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다"
2022-10-09
글 : 김철홍 (평론가)
사진 : 오계옥
<지옥만세> 임오정 감독 인터뷰

한 소녀가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소녀의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카메라는 서정적인 음악의 템포에 맞춰 소녀를 향해 아주 천천히 줌을 당긴다. 이렇듯 <지옥만세>는 오프닝에서부터 ‘지옥’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극의 어두운 전개를 예상하게 한다. 하지만 영화가 그 예상을 스스로 뒤엎는 데에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화는 기존에 흐르고 있던 음울한 음악을 제대로 끝맺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박자를 끌어올려 경쾌한 얼터너티브 록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다 정신을 차려보면, 화면엔 또 다른 소녀가 마치 무언가를 기원하듯 온몸으로 막춤을 추고 있다. 영화 내내 휘몰아치는 ‘엉뚱 발랄한 엇박자’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받은 <지옥만세>의 임오정 감독과의 대화 역시 예상을 넘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 ‘엉뚱 발랄한 엇박자의 영화’라고 소개되었다. 그 소개가 마음에 드셨는지.

= 대만족이었다. 영화의 후반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객들이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연출 의도였는데, 딱 흥미를 갖게 하는 실마리까지만 적당히 풀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동안 단편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데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닌가하는 고민이 많았는데, 프로그램 노트에 ‘이야기꾼’이라고 적힌 것을 보고 기분이 정말 좋았다.

- 그동안 활발했던 단편 작업에 비해 첫 장편영화는 조금 오래 걸린 감이 없지 않다. 그동안 초조함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 솔직히 많이 지쳤었다. <지옥만세>는 거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만든 영화다. 스무 살 때부터 영화 일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쉬지 않고 이 일에 매달렸다. 그러다 삼십 대 때 현실적인 문제가 절정에 다다라 정말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2018년에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한낮의 피크닉>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를 통해 관객들을 만난 다음 큰 위로를 받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내 영화를 기다려주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엄청난 힘이 됐다. 그때 함께 작업을 한 친구와 동료들도 정말 고마웠고.

-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에선 삼십 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반면, <지옥만세>의 주인공은 십 대 여성, 나미와 선우다.

= 10대 소녀는 내가 늘 괜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대상이다. 그들을 통해 변방에 있는 외톨이들에게 쓰러지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특히 경험상 10대 때는 자신의 외로움이나 불안을 해소하는 적절한 방법을 잘 알지 못해 이상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를 통해 소녀들의 그 불안한 감정을 해소시켜주고 싶었다. 씩씩한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를 선호하는 것도 있다. 코엔 형제의 <더 브레이브>의 주인공 매티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저 해맑게 뛰어다니는 소녀들의 생동감을 보는 것만으로 눈가가 촉촉해질 때도 있다. 그 모습을 꼭 영화에 담고 싶었다.

- 영화는 그 소녀들이 사이비 종교 집단과 얽히는 이야기다.

= 예전부터 뒤틀린 믿음이나 신념으로부터 나오는 광기, 그리고 이를 통해 맞이하는 파국 같은 것들이 흥미롭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13년에 만든 단편 <더도 말고 덜도 말고>에서도 사람들의 의심이 틀렸다는 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발악하는, 그런 집단의식에 대해 묘사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지옥만세>는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두 소재(소녀, 뒤틀린 집단의식)를 접목시킨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지옥 만세’라는 제목 역시 두 가지 뉘앙스가 결합된 느낌이다. ‘지옥’이라는 어두운 소재와 ‘만세’라는 긍정적인 태도의 조합이 인상적이다.

= 평소에 짓던 제목들과 달리 직설적인 화법으로 지어본 제목이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지옥은 그렇게 특별히 힘든 무언가가 아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불쾌하고 불합리적인 사건이 수도 없이 발생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럴 때 종종 ‘지옥 같은 일을 겪었어’라고 표현할 때가 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능청스럽게 살아가보면 어떨까하는 심정을 담은 제목이다.

- 참고한 영화나 소설 같은 것들이 있나.

= 특별한 레퍼런스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정말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펼쳐냈다. 대신 시나리오를 쓰면서 소설 <톰 소여의 모험>의 구조가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것 같기는 하다. 10대인 톰과 허크가 우연히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된 뒤 벌어지는 모험이 풍자적으로 묘사된 소설인데, <지옥만세>의 구조와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영화에 ‘나미와 선우가 반드시 시체를 목격해야 할 것’이라는 뼈대를 세워 놓은 건 그 소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 영화는 그런 나미와 선우가 자신을 괴롭힌 아이의 인생에 ‘기스를 내러 가는’ 이야기다.

= 영화 속 상황을 너무 무겁게 이끌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자살, 왕따, 사이비 종교 같은 소재를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코믹 요소를 많이 넣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아이들의 복수 또한 귀엽게 표현이 됐던 것 같다. 자신들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줬던 사람에게 고작 줄 하나 그어지는 정도인 ‘기스’를 내겠다는 마음을 품는 게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다.

-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훌륭하게 그려낸 배우들이 인상적이었다.

= 주연들 간의 합이 중요했기에 캐스팅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정말 만족스럽다. 나미를 연기한 오우리 배우는 이미 여러 편의 독립영화에 출연한 배우인데, “유서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와 같은 쓸데없이 낭만적인 대사들을 과연 어떻게 살릴까 했는데, 자신의 스타일대로 멋지게 표현해내서 놀랐었다. 또 선우 역의 방효린 배우는 선우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 다른 역의 오디션도 함께 봤는데, 두 캐릭터 모두 스탭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의 연기를 보여줘서 무조건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두 분 덕분에 어두운 영화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톤업시키려는 연출 의도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 같다.

- 영화에 따돌림의 현장이 전시되지 않는 것 역시 영화가 덜 어두워지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돕기 위해 고통스러운 장면을 삽입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미 매스컴을 통해 접한 이미지들이 각자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나. 물론 서사를 위해 필요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영화를 그저 ‘학교 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로 국한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크다. <지옥만세>는 세상의 모든 외톨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영화다. 학교, 직장, 가정 등을 포함한 세상 어떤 집단에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 모두가 이 영화를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느껴지게 하기 위해 특정 폭력 장면을 넣지 않은 것도 있다.

- 그 결과로 따돌림을 주동했던 친구가 그다지 악하게 보이지 않는 측면도 있다. 누군가는 영화의 결말 역시 폭력의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 언젠가 고립감을 느껴본 입장에서 어떤 영화가 나에게 용서를 권유한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다만 그들이 언젠가 가해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상태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꼭 그 사람을 용서하라기보다는 그냥 그 사람과 무관한 삶들을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선우와 나미가 이번 모험을 통해 그런 깨달음을 얻었기를 바라며 영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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