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얼굴이 한 영화제를 상징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걸 김지석 프로그래머 덕분에 알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지난 10월6일 16시 영화의전당 중극장, <지석>의 특별 상영 전에 관객에게 남긴 말이다. <지석>은 2017년 칸영화제 출장 중에 타계한 고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이하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기리기 위해 만든 다큐멘터리다. 타계 직후부터 만들어 완성한 작품이 영화제가 완전히 정상화된 후에야 처음 공개된 것이다.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비롯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자파르 파나히, 모흐센 마흐말바프, 탄 취무이 등 김지석 프로그래머와 깊은 연을 맺으며 부산국제영화제와 성장해온 아시아 영화인들이 대거 등장해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식으로 진행된다.
상영 전 무대인사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지석>의 김영조 감독, 제작자 소울필름의 김선영 프로듀서 그리고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 함께했다. 김영조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건 제가 아니라 김지석 선생님의 친구들, 그와 기억을 나누며 영화에 출연한 분들이다”라며 “나는 감독이라기보다 이분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메신저가 되고 싶었다”라고 <지석>의 연출 의도를 밝혔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창립부터 김지석 프로그래머와 함께해온 이용관 이사장은 “나도 아직 <지석>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라며 말문을 띄었다. 그리고 “아직 김지석이라는 사람에 관한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다”라고 동료를 떠나보낸 아픔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러니 오늘 <지석>을 보실 여러분들이 나중에 혹시 나를 길에서 만나더라도 영화가 어땠다고 말하지 말아달라. 저 대신 잘 봐달라”고 말했다.
아주담담 [다큐 '지석'과 인간 지석] 현장에서
10월8일 14시 영화의전당 시네마운틴 6층 아주담담 라운지에선 <지석>과 김지석 프로그래머에 관한 대담이 열렸다. 박성호 프로그래머가 사회를 맡고 필리핀의 영화 제작자 비앙카 발부에나,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브래들리 리우 감독, 말레이시아의 탄 취무이 감독, 이란 출신의 영화 제작자 쇼흐레 골파리안, <지석>의 김영조 감독이 자리했다. 해외 게스트들은 김지석 프로그래머, 부산국제영화제와 오래 교류했고 <지석>에도 출연한 이들이다.
박성호 프로그래머는 “김지석 선생님은 영화제가 처음 시작한 1996년 이전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꿈을 가져 실현했고, 이런 꿈에 수천 명 이상의 아시아 영화인들이 혜택을 받아왔다”라고 대담을 시작했다. 덧붙여 탄 취무이 감독은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없었다면 부산국제영화제나 아시아영화아카데미,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도 없었을 거다. 영화제를 찾아온 분들 모두에게 오늘은 소중한 시간이다”라며 대담의 의미를 설명했다.
대담자들은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특별함을 회고했다. 모두의 공통 의견은 권위 있는 프로그래머가 된 후에도 낮은 자세로 영화인들을 대했던 그의 면모였다. 브래들리 리우 감독은 “2012년 아시아영화아카데미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국제적인 행사도 처음이고 영화를 언제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의 나에게 먼저 말 걸어주고, 웃어주고, 손을 내밀며 친구처럼 대해줬다. 이후에도 신진 감독인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단편에서 장편까지 내 커리어 전반에 도움을 줬다”라며 김지석 프로그래머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또 탄 취무이 감독은 “쿠알라룸푸르에 그가 찾아와서 내 아이를 데리고 함께 쇼핑하고 아기 선물까지 사준 적이 있다. (웃음)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다”라며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했다.
쇼흐레 골파리안 프로듀서는 “그는 전 세계의 어떤 프로그래머보다도 특별했다. 경력이 꽤 쌓였음에도 직접 발로 뛰면서 아시아 전역의 영화 제작이나 관련 프로젝트에 손을 벌렸다. 관심 있는 영화가 있으면 편집본이 나오기도 전에 원본을 감상하고 재능 있는 신진 감독들을 발굴했다”라며 프로그래머로서의 김지석을 평가했다. 여기에 박성호 프로그래머는 “김지석 선생님은 단편과 장편을 합쳐 1년에 1천 편 정도의 영화를 감상하셨다. 그러면서 영화제에 어떤 게 필요하고, 어떤 방향성으로 나아가야 할지 끝없이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면서도 영화제가 조금이라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면 본인에게 화를 낼 정도로 현명한 분이었다”라고 첨언했다.
끝으로 탄 취무이 감독은 “그는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여기 있는 우리, 그리고 아시아 영화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라며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영향력을 설명했다. “생전의 그를 미처 만나지 못한 신진 영화인들에게 <지석>을 꼭 보라고 말하고 싶다. 돈 없고 패기만 있던 그와 동료들이 시작한 작은 영화제가 이만큼 세계적인 영화제가 되어온 과정을 보면 창작자들은 엄청난 영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인간 김지석뿐 아니라 영화 <지석>에 대한 추천사도 잊지 않았다. 박성호 프로그래머는 “<지석>이나 올해 신설한 ‘지석’ 섹션 등을 통해 앞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늘 선생님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 보겠다”라는 말로 대담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