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사랑을 위해 우린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보라(김유정)는 심장수술을 위해 잠시 미국으로 떠난 단짝 친구 연두(노윤서)를 위해, 연두의 첫사랑 현진(박정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다. 현진이 어떤 운동과 노래를 좋아하고 학교에선 어떻게 생활하는 학생인지, 보라는 떨어져있는 연두에게 편지를 쓰듯 소식을 전한다. 어느날, 그런 보라에게 현진의 친구 운호(변우석)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20세기 소녀>는 8년 전 영화 <영희씨>로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에 초청됐던 방우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1999년, 지구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눈앞의 사랑과 우정에 흔들리는 청춘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관객들을 만난 <20세기 소녀>는 10월 21일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
- 신설된 ‘한국영화의 오늘: 스페셜 프리미어’ 섹션에 <20세기 소녀>가 첫 타자로 초청됐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 넷플릭스 영화라 극장 상영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부산영화제 덕분에 상영 기회가 생겨서 너무 좋았다. 귀여운 장면이 많은 영화라 그런지 관객들 반응이 좋더라. 행복하고 신기했다. 극장에서 다 같이 웃는 걸 보면서 이게 영화의 힘이라는 것도 체감했다.
- <20세기 소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작품인가.
= 나이가 있다 보니 친구들과의 메신저엔 온통 육아, 아이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한 친구가 우연히 첫사랑을 만나면서 메신저창이 학창시절 이야기로 도배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교환일기장을 꺼내들었고 10대 시절의 추억과 마주하게 됐다. 보라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친구를 위해 한 남학생을 관찰했던 흑역사가 쓰여 있더라. 문득 이 일화를 잘 다듬어 영상화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럼 친구들에게도 선물 같은 영화가 될 것 같았다.
- 친구와 주고받던 교환일기에서 출발해서인지 인물들의 첫사랑만큼이나 우정도 비중 있게 다룬다.
= 학창시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친구 관계이지 않나. 나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사람도 결국 친구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다. 우정과 사랑을 균형있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만큼 어려웠다.
- 사랑과 우정의 중심에 선 김유정, 변우석, 박정우, 노윤서의 합이 좋다. 네 배우를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 김유정 배우는 내 원픽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친구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기를, 그래서 그 친구를 전적으로 응원해줄 수 있기를 바랐는데 김유정 배우가 이 역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첫 번째로 줬는데 빠르게 확답을 준 덕에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운호의 경우 매력적인 첫사랑의 이미지를 지닌 배우를 찾아야만 했고 드라마 <청춘기록> 때부터 눈여겨 봐온 변우석 배우가 떠올라 바로 캐스팅했다. 박정우 배우는 목소리에 반했다. 현진이 굉장히 가벼워 보일 수 있는데 박정우 배우가 현진의 무게를 잘 잡아주면서 입체적으로 그려줄 것 같았다. 노윤서 배우는 유일하게 오디션으로 발굴했다. 김유정과의 케미를 중요하게 봤고, 둘이 동갑이면서도 가진 매력이 달라 같이 해도 좋을 거라 여겼다. 당시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방영되기 전이었는데, 지금은 반응이 너무 좋아서 원석을 일찌감치 발견했다는 뿌듯함이 있다. 1990년대 말을 경험하지 못한 배우들이 있어서 <접속>이나 <미술관 옆 동물원>과 같은 당시의 한국 멜로 영화를 많이 추천해줬다.
- 우회적으로 자기 의견을 표하는 ‘충청도식 화법’이 최근 화제였다. 영화의 배경도 청주여서인지 그런 미묘한 화법과 충청도 사투리가 맛깔나게 등장한다.
= 실제 고향이 청주다. 고향인 도시를 배경으로 설정하는 걸 걱정하기도 했는데 결국 마음을 굳혔다. 사실 충청도는 사투리가 그렇게 강하지 않은데, 배우들이 실제 사용하지 않는 억양으로 연습해오는 경향이 있었다. 어차피 한 포인트만 살려주면 돼서 종종 사투리 교정을 봐준 기억이 난다. (웃음) 학주 역할의 이범수 배우도 청주 출신이라 대본의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응용해 재밌게 써줬다.
- 1999년의 시대상을 그리기 위해 소품과 미술, 의상 등에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느껴졌다.
= 내 일기가 바이블이나 다름없었다. 일기장을 보며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누가 유명했는지 찾아보고 가능한 모든 디테일을 가져와 최대한 많이 구현하려 했다. 다만 너무 과하게 사용하기보다는 생활 속에 녹여내려 했다. 그래서 당시의 통신 장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당시 인터넷을 막 사용하기 시작하고, 공중전화와 삐삐,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혼재된 상황이었다. 보라는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고 운호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는 것도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었다.
- 보라 비디오와 같은 로케이션도 흥미로웠다.
= 그 시절에 비디오 가게를 이용해보지 않은 학생은 아마 없을 거다. 보라가 살고 있는 공간 자체에 그 시절을 담아 보여주고 싶었고, 미술 감독님이 정말 노력을 많이 해주셨다. 보라 비디오 가게는 충주에서 촬영했다. 요즘 청주는 너무 많이 바뀌었더라. 로케이션을 찾으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보라 비디오 가게를 찾은 후엔 옛날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동네의 모습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 결말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 시간이 지난 후에 첫사랑과 제외하는 것과 그냥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 둘 중에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고민이 많았다. 주변 친구들에게 현재의 모습으로 첫사랑을 다시 만나고 싶은지 물어봤고, 그 의견들을 감안해 현재와 같이 결말을 내렸다.
- 여러모로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과 추억이 많이 녹아든 작품이다. 데뷔작임을 감안하더라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작품이겠다.
= 친구들이 “우리 영화야”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지금 극장에서 영화 보려고 다 부산으로 오고 있다. (웃음) 데뷔작으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완성까지 하게 돼서 기쁘다. 내가 학창 시절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한국청춘영화하면 떠오르는 작품들이 적지 않나. 그리고 일본영화나 대만영화와 비교해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20세기 소녀>를 본 관객들에게 한국의 청춘영화답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