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산국제영화제]
BIFF #6호 [인터뷰] ‘글리치’ 진한새 작가, “믿음의 양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2022-10-11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글리치> 진한새 작가 인터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의 대본을 신인 작가 진한새가 썼다는 정보가 알려지면서 그가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쓸 것인지 일찌감치 관계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스튜디오 329와 다시 조우한 <글리치>는 진한새 작가의 취향과 과감한 상상력이 좀더 직접적으로 드러난, 독창성 면에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가볍게 물리치는 수작이다. 지효(전여빈)는 전자기기 화면이 깨지는 ‘글리치’ 현상과 현대 유니콘스 모자를 쓴 외계인이 별안간 눈앞에 나타나는 환각에 시달린다. 그러다 결혼을 제안했던 남자친구 시국(이동휘)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가 있었던 마지막 장소에 UFO가 왔다 간 단서를 발견하면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UFO 마니아 커뮤니티를 방문한다. 그곳엔 지효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현재 커뮤니티의 수장이 된 보라(나나)가 있었다. 외계 생명체가 나오는 SF 드라마처럼 보였던 <글리치>는 사이비종교의 존재가 드러나고 지효와 보라의 미묘한 관계가 묘사되기 시작하면서 별안간 엉뚱한 곳으로 시청자를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글리치>의 정신은 진한새 작가가 사랑해 마지않는 한국 인터넷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총 10부작 중 4부가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직후 진한새 작가를 만났다.

-<인간수업>이 공개되고 반년쯤 지난 후 <글리치> 제작 확정 소식이 전해진 걸로 기억한다. 언제 처음 떠올렸던 아이템인가.

=본격적으로 기획을 다듬기 시작한 것은 2018년 말에서 2019년 초쯤이다. 아이템 자체는 훨씬 이전에 나왔다. 와이프가 어렸을 때 엄마 손을 잡고 있다가 UFO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연히 나는 말도 안 된다며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웃음) 와이프는 억울해하고, 나는 냉정하게 굴고, 그렇게 옥신각신하다 보니 이 상황 자체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떠오른 아이디어를 디벨롭하다 보니 ‘청춘이라기엔 좀 간당간당한 나이의 인물들’이 주인공이 됐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야기, 누구의 공감도 살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아는 이야기. 이게 결국은 그 나이대 청춘이 하는 고민이지 않을까 싶었다.

-제목은 왜 ‘글리치’로 지었나.

=‘미끄러지다’는 의미를 가진 독일어에서 유래된 IT 용어인데, 게임을 하다 화면이 깨지는 오류도 사람들이 ‘글리치’라고 부른다. 지효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모니터 화면이 깨지는 ‘글리치’ 현상을 보기 시작하면서 그의 인생도 엉뚱하게 흘러가는 걸 상징하는 것 같아 고른 키워드다.

-오타쿠처럼 UFO나 외계인에 심취해있던 것은 어린 지효였는데, 정작 성인이 된 후 외계인 오타쿠가 된 건 보라다.

=‘계승 당한’ 거다. (웃음) 친구가 사라진 자리에서 UFO의 흔적을 발견한 보라는 그날부터 외계인 이야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강제로 지효의 신념을 이어가는 거다. 보라 캐릭터는 어떤 이미지에서 시작했다. 두 어린아이가 놀이터에서 소꿉장난을 한다. 그중 한 명이 그냥 가 버린다. 그런데 남은 한 아이는 계속 놀이를 하고 있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친구를 기다리며 혼자서 친구와 함께했던 놀이를 하는 쓸쓸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극중 대사를 빌려서 묻겠다. 왜 현대 유니콘스인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드라마틱한 팀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지효가 보라를 만나고 가장 강하게 갖는 감정은 향수였을 것이다.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심정이 마치 사라져버린 야구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리치>는 UFO나 사이비종교 소재를 진지하게 접근할 의도가 없는 작품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UFO에 관한 미스터리한 사건과 자신이 납치됐었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의 사례를 진지하게 리서치했다. 하다 보니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대체로 레퍼토리가 뻔하기도 했고. 그래서 UFO는 클리셰로서의 UFO로 묘사하고, 미스터리의 대상을 UFO가 아닌 UFO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뒀다. 실제 팩트 보다는 관념적으로 접근한 거다. 사이비종교 역시 옆집에 사는 흔한 부동산 아줌마가 사이비 행동대장이라면 웃기지 않겠냐며 농담처럼 접근했다. 하늘빛돌림교회에서 외치는 “셀라~”는 사실 인터넷 밈에서 따왔다. “나 성경말투 잘함”으로 시작하는 어느 트위터리안의 글에 등장한다. (웃음) 그런데 사이비종교를 묘사하다 보면 생각보다 그림이 너무 뻔해진다. 하늘빛돌림교회만의 특출한 이미지가 있었으면 했다.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주입하는 것, 그중에서도 최신의 문물을 찾다 보니 VR이 떠올랐다. 다들 VR 기기를 쓰고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무척 재미있었다.

-믿음과 종교, 이성과 비이성의 테마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사이비종교의 수장 문형태는 “근거가 필요하면 그게 무슨 믿음이냐”고 한다. 지효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 지워진 기억 때문이다. 결국 믿음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나.

=믿음의 양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UFO가 지효에게 주는 의미는 믿음이다. 믿음을 뒤틀면 사이비가 된다. 믿음을 잘못 사용하면 많은 사람을 오도하고 끔찍한 결말로 이어질 수도 있다. 보라와 지효가 했던 말처럼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신념을 유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을 믿어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데, 사실 혼자서는 어렵다. 보라처럼 신념을 공유할 만한 동료나 문형태처럼 타산지석을 삼을 만한 거울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도 타인을 통해 성립될 수 있다.

-지효의 머리에 이식됐다고 하는 외계인 칩의 의미는 지효의 아빠가 보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철갑상어 등에 심은 전자태그 이야기로 설명된다.

=지효가 가장 궁금해할 질문은 결국 이거다. 왜 나였지? 외계인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나에게 뭘 원한 거지? 결국 지효 나름의 답을 내린다. 외계인의 의도를 해석하는 것은 결국 지효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연구원이 철갑상어를 풀어주고 네 마음대로 가보라며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았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철갑상어는 결국 가고 싶은 대로 가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는 의미가 된다. 후련한 고해가 되는 것이다. 지효가 자기 얘기를 곧이곧대로 하는 캐릭터는 아닌 것 같아서 돌려서 표현해봤다.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보곤 했다

-지효와 보라의 관계에서 퀴어 코드를 읽는 시청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둘 사이의 감정도 복합적이다.

=사실 지효와 보라의 관계는 인터넷에서 봤던 어떤 ‘짤’에서 시작했다. 제목을 알지 못하는 일본 만화의 한 장면이었다. 굉장히 다른 성향을 가진 아웃사이더 여성 둘이 옥상에서 만나는데, 그냥 이 둘이 주인공인 작품을 보고 싶은 거다. 그런 감성적인 이유에서 출발했다. “빠와 까는 한 몸”이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신념 이야기로 귀결된다. 지효와 보라는 서로를 ‘까면서’ 검증을 해 나간다. 상대를 의심하고, 상대의 믿음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렇게 서로의 ‘빠와 까’가 되면서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믿음을 완성해 나간다.

-지효와 보라의 외적인 케미스트리가 관건이다. 배우 캐스팅에도 혹시 의견을 냈나.

=기획 초기부터 전여빈 배우를 밀었다. <멜로가 체질>에서 상사에게 깨지는 장면의 연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팬이 됐다. 나나 배우는 노덕 감독이 캐스팅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캐스팅이었는데 나나 배우를 만나고 오히려 보라가 어떤 캐릭터인지 내가 알아가게 된 것 같다.

-사실 사라진 남자친구를 찾는다는 로그라인은 ‘페이크’에 가깝다 (웃음) 시국이 돌아온 후에도 지효는 외계인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왜 이 이야기의 시작을 시국의 실종으로 삼아야 했는지 궁금했다.

=지효는 처음부터 솔직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캐릭터다. 지효가 원하는 건 사실 다른 곳에 있었는데, 시국을 대상화하며 자신의 목적이라고 믿는 거다. 어떤 의미에서 슬픈 러브 스토리다. (웃음) 그래서 시국을 페이크 같은 보상으로 놓고 시작했다. 일종의 ‘인간 맥거핀’인 것이다. 그런데 결국 시국은 보상이 아닌 사람이다. 그의 마무리는 꼭 제대로 지어주고 싶었다. 사실 시국은 외계인과 접점이 없는 지효가 만날 법한 남자, 어떻게 보면 자기 불씨를 찾지 못한 평면적인 지효와 같은 존재로 놓고 만들어갔던 캐릭터다. 그런 인물에게 불씨를 하나 떨구고 끝냈다.

-시국이 키우는 고양이 이름은 왜 권지용인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었다. (웃음) 인터넷에서 반려견을 사람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을 봤다. 개한테 성도 이름도 있는 게 너무 이상하고 웃겨서 기억하고 있다가 대본을 쓸 때 툭 튀어나왔다. 그리고 권지용은 멋있으니까. (웃음) 사실 원래 대본에는 고양이가 “지용~ 지용~” 하고 울어서 지용이가 됐다고 설명하는 장면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글리치>의 ‘최애캐’를 꼽자면 사이비종교의 행동대장 서 집사(백주희)다. (웃음)

=사실 나도…. (웃음) 가장 꽂혀서 쓴 캐릭터 중 하나다. 서 집사는 대사를 많이 고민하지 않아도 술술 글이 나왔다.

-서 집사는 공중 부양 현상을 눈속임하는 등 같은 신도들에게 명백한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면 그는 그저 사기꾼일 뿐 신앙심을 갖지는 않을 것 같은데, 누구보다 독실하다. (웃음)

=그게 서 집사의 무서움이다. 눈앞에서 이 모든 게 가짜라는 것을 봐도 믿는 거다. 원래는 “요즘 애들은 이렇게라도 안 하면 믿음을 안 가진다”며 합리화하는 대사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서집사가 누구보다 ‘찐’ 사이비 같다.

-영기(정다빈)의 서사는 사실 짐작의 영역으로 남겨둬야 하는 게 많다. 그가 사이비종교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각성한 것은 역시 젊은 세대의 희망을 상징한 것일까.

=김직진(고창석)과 영기 부녀는 믿음의 안티테제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김직진은 처음부터 의심만 했다면, 영기는 믿음이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할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어린 영기가 받았을 트라우마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가 트라우마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할머니가 육신을 벗어나 천국에 갔다고 믿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그는 할머니의 죽음을 막지 못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기는 믿음을 가져야만 버틸 수 있었다.

-포돌이의 “지켜보고 있다”, 네이트 판, UFO 마이너갤러리 등 한국의 구체적인 인터넷 밈과 커뮤니티 문화가 등장한다. 보라의 ‘달꾸냥 TV’는 트위치 같은 실시간 중계 플랫폼의 생태계를 보여준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인터넷을 통해 세상이 많이 본다. 밖에 잘 안 나간다. (웃음) 내가 1986년생인데 우리 세대엔 이런 분들이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애인이 사라져서 당장 찾아야 한다면 인터넷 검색부터 할 것 같은 거지.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엮여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커뮤니티가 등장해야 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커뮤니티가 디시인사이드였다. 인터넷 밈을 담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연상되고 대본에 녹아든 거다.

-애플 워치와 같은 최신식 기기를 추리와 서스펜스로 끌어오는 대목은 거의 <헤어질 결심> 아닌가. (웃음)

=글을 절박하게 쓰다 보면 당장 주변에 뭐가 없나 둘러보게 된다. 눈앞에 있는 애플 워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걸 갖고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결국 창작자는 주위에 있는 소재를 활용하게 되는 것 같다. <글리치>에 인터넷 밈이 가득한 것도 결국 내가 아는 것을 끌어오게 돼서다. 그런 만큼 평소에 견문을 넓혀야 하는데 너무 어렵고 힘들다. (웃음)

-글로 쓴 대본이 영상화된 결과물을 보면서 특히 좋았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주로 영화계에서 작업했던 노덕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대본이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곧이곧대로 영상화되는 것도 기분이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의외의 결과물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연출 피드백을 가능한 자제하는 편이다. 가령 1부 초반 지효의 회사 생활은 대본보다 훨씬 힘을 줘서 묘사됐다. 노덕 감독은 주관이 매우 확실한 분이다. 처음 아이템을 가져온 건 나였지만 서로의 주관을 계속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감독이 멋대로 헤집어주기를 바랐다. 대본 단계에서도 편집 단계에서도 노덕 감독의 의견이 많이 반영됐다. 4부 엔딩 김직진과 마주치는 장면은 감독의 의견으로 수정했다. 원래 김직진이 지효를 무섭게 쫓아오는 식으로 묘사됐는데 노덕 감독이 “그냥 시크하게 하면 어떠냐”고 의견을 줬다. 사실 중반부 넘어가면서 대본 쓰는 게 너무 힘들어서 노덕 감독에게 많이 기댔다. 죄송스러운 부분이다.

-만약 시즌2를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지효가 해결했다고 생각한 문제를 다시 뒤집거나, 시국이 ‘계승’을 한 이후 이야기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지효는 자기 나름의 성장을 하며 마무리됐으니 후자의 스토리에선 시국의 멘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작품은 가벼운 로맨스로 쓰고 싶다

-<인간수업>에 이어 <글리치>까지 본 사람들은 도대체 작가가 어떤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일지 궁금해할 것이다. (웃음) 원래 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가 대학원을 중퇴했다고.

=원래 건축 디자이너가 되기로 한 이유가 뭐였더라…. 기억이 잘 안난다. (웃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순수 미술은 부담됐다. 타협안으로 골랐던 게 현실적인 건축 디자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에 가보니 재능 있는 친구들이 너무 많은 거다. 열등감을 많이 느꼈다. 또 건축 디자인에 예술을 요구하는데, 나는 굉장히 관념적이고 논리를 따지는 사람이라(웃음) 왜 건물을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전공을 포기했다. 그림 외에 글쓰기도 좋아했다. 글을 쓰는 현실적인 직업을 찾다가 어머니(<모래시계>의 송지나 작가)가 하는 드라마 작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어머니 슬하에 들어가 작가 준비를 시작했다. 작가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워크숍이 있었는데 거기에 쓱 껴서 커리큘럼을 같이 따라갔다.

-작가로 일하면서 어머니에게 배운 것 중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됐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예술적 영감을 받아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는 것. 글쓰기도 노동이고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 어머니가 준 가장 큰 가르침이다. 집에서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익숙하게 봤는데, 내가 직접 일을 해보니까 왜 어머니가 그렇게 힘들어했었는지 알겠더라. 어머니가 했던 고민을 이해하게 됐다.

-송지나 작가가 뉴질랜드로 떠날 당시 떴던 기사를 보면 “평소 상상력이 비범한 아들이 국내에서 고교를 진학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뉴질랜드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상상력이 비범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망상을 좋아하긴 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었으니까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재밌는 콘텐츠도 많이 봤다. 일본 만화와 할리우드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소설에 빠졌다. 특히 ‘텍스트보다 텍스처’라는 평을 받던 이단아 성석제가 ‘페이보릿’이었다. 판소리 하듯 말이 말을 만드는 문체가 좋았다. 고전 소설은 별로 안 좋아했다. 왜 위대한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솔직하게 재미를 느끼진 못했다. 당시엔 참신했던 구조가 지금은 흔한 것이 돼서 책이 잘 읽히질 않았다. 물론 그중에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훌륭한 고전 작가는 좋아했다. 가령 알베르 카뮈는 잘 모르겠는데 프란츠 카프카의 글은 진심 같았다. 원래 작가들은 다 미친 소리를 하는데 카프카는 정말로 미쳐서 쓰는 글처럼 느껴졌다. 카프카는 ‘진짜’라며 열광했다. (웃음)

-드라마 작가인 어머니와 방송국 PD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영상물을 많이 봤다고 들었는데, 영화 취향은 어땠나.

=초등학교 때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이나 <스타워즈> 시리즈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고등학교 때는 스놉 같은 취향이 생겨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봤다. 괜히 있어 보이는 것을 보면서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 하고 혼자 감탄하곤 했다. 그리고 최근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다시 봤는데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힙스터’ 시절에 왜 충격을 받았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웃음)

-평소 대본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아이템을 떠올린 후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

=비주얼이나 개념을 먼저 떠올린 후 내포하는 질문을 찾는다. 그리고 본질적인 키워드를 찾아가며 구체화한다. <인간수업>은 “모범생처럼 보이는 고등학생이 사실 사이코패스 악당이라면 어떨까” 라는 발상에서 시작했다. 이 가정은 “죄는 왜 나쁜가”라는 질문을 포함한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하면 중반까지는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솔직히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5부쯤 되면 감독님들이 “도대체 진 작가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요?” 라고 묻는다. (웃음) 이야기를 깎고 깎고 깎다보면 내가 찾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글리치>는 “우리는 왜 UFO 얘기로 이렇게 싸우고 있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이야기가 뻗어나가다 ‘믿음’이라는 키워드가 남게 됐다.

-혹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나.

=아직 머릿속에만 있는 아이템들만 있다. 다음엔 웃고 떠들면서 작업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마도 로맨스?

-<인간수업>도 로맨스 아닌가. 미친 아이들의 미친 사랑. (웃음) <글리치>도 지효와 보라의 로맨스였고.

=알아봐주셔서 감사하다. (웃음) 10부작 드라마를 연달아 하다 보니 내게 익숙한 포맷이 된 것 같다. HBO 드라마 <배리>가 회당 25분 정도인데, 호흡이 가빠 보이는데도 모자람 없이 잘 간다. 요즘 사람들은 유튜브 영상이 10분만 넘어가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 시청 리듬에 맞추려면 러닝타임이 짧아져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쓰다 보면 늘어지는 게 이야기라 무척 어려운 작업이 되겠지만, 회당 분량이 짧은 드라마 대본 작업을 도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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