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산국제영화제]
BIFF #7호 [인터뷰] 2022 CHANEL X 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 교장 리티 판 감독, "기억할 수 있는, 우리의 기억이 될 영화를 위한 씨앗을 뿌리다"
2022-10-12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2022 CHANEL X 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 교장 리티 판 감독 인터뷰

코로나 이후 세상은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영화를 통해 망각에 저항해온 리티 판 감독은 코로나 기간 중에 겪은 단절을 바탕으로 신작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을 선보였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인 이 영화는 모형과 디오라마로 조각해낸 21세기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의 총합이라 할 만 하다. 스크린을 앞에 앉은 관객은 누군가의 과거이자 우리의 현실이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비범한 영상 에세이를 마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보조장치 삼아 역사의 공백을 메워온 리티 판 감독이 완전 정상화를 선언한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았은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리티 판 감독은 2022 CHANEL X 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의 교장으로 초빙되어 부산을 방문했다. 2022 CHANEL X 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는 9월 27일부터 10월 14일까지 18일간 전문교육 이수 및 멘토링 등을 거쳐 단편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야만의 시대에 영화의 역할을 고심해온 리티 판 감독이 젊은 영화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유산은 무엇일까. 빡빡한 수업 일정 가운데 잠시 시간을 낸 리티 판 감독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교육 현장의 에너지를 전해주었다. 잠시 엿본 아시아 영화의 미래는 실로 믿음직스웠다.

-2022 CHANEL X 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의 교장을 맡았다.

= 나는 언제나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한국의 오랜 팬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1회 때 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 한국을 몇 차례 오가며 한국영화와 부산국제영화제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목격하였다. 코로나로 잠시 발길이 멈춘 사이 한국, 그리고 아시아영화가 어떻게 또 한 번 진화를 이루어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이번에 교장직을 수락했다. 무척 영광스럽고 감사하다. 이런 자리를 통해 젊은 감독들과 소통하는 경험은 내게도 소중한 기회다. 이들의 열정, 생동감, 창의적인 생각들을 접하며 내가 여전히 영화 현장에서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나처럼 나이가 있는 기성 세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탐색해야 하고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동시에 내가 쌓아왔던 경험들을 그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 올해는 35개국 407명의 지원자 중 20명이 선발되어 18일간의 여정에 동참한다.

= 이렇게 배우고 탐색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놀랍다. 기본적으로는 함께 모여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프로세스를 따라간다. 하지만 이번 아시아영화아카데미에서의 경험은 그보다 훨씬 폭넓다. 아시아 문화권이라는 공감대가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국가와 배경, 문화적 토양이 전혀 다르다. 다양한 에너지가 충돌하는 즐거운 현장이다. 오늘날 세계는 현재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인 충돌과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몸으로 겪고 의견을 나누는 경험은 모두에게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가족 같다. 오늘은 시 낭송을 함께 했다.

- 기간이 넉넉하지 않은 만큼 영화제작에 대한 기술적인 교육에 집중할 줄 알았는데 시 낭송이라니, 흥미롭다.

= 파도가 높고 거셀수록 정서적인 공감대가 중요하다. 외부에서는 아시아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교육 수준부터 삶의 방식까지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깔로 빛난다. 다양한 문화, 언어, 감성,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교류하고 소통함으로서 지금보다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어떻게 다른지 마주 보고 이해하는 시간은 소중하다. 물론 그렇다고 반드시 익혀야만 하는 기술적인 부분도 간과할 순 없다.

- 전체 선발 인원 중 여성영화인들이 70%에 가깝다고 들었다. 연출멘토를 맡은 탄 추이 무이 감독과 촬영멘토를 맡은 엄혜정 촬영감독 역시 여성이다.

= 우선 훌륭한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여성들의 시야와 탁월한 감수성은 인류가 아직 탐색하지 못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왔다. 나 역시 그들로부터 새로운 시선과 지도법을 배우고 있으며, 현장에서 쌓은 기술적인 노하우가 자연스럽게 공유되어 서로가 서로의 영감이 되고 있다.

- 이번 아카데미에서 특별히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면.

= 나는 그들에게 자유를 강조하는 중이다. 왜냐면 어떤 국가에서는 자유가 숨 쉬듯 당연한 거지만 어떤 국가에서는 정말 지키기 쉽지 않은 가치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박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무척 어렵고 힘든 길이다. 하지만 때론 긴 시간이 들지않더라도 번개처럼 교감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라오스, 스리랑카, 캄보디아,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다보면 변화의 씨앗을 품고 각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영화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우리를 영화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 또 저항할 것이다.

- 저항은 감독님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크메르 루즈–피의 기억>(2003), <잃어버린 사진>(2013) 등 망각에 저항하며 기억을 복원시켜왔다. 올해 부산에서 상영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는 이런 흐름 속에서도 추상적인 부분이 도드라진다.

= 나는 변화를 즐긴다. 영화를 통해 지워진 역사를 다시 마주 보는 작업은 계속 되겠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건 과거를 복원,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는 코로나 시국에 디스토피아에 대한 상상을 무대로 만든 영화다. 그들은 우리의 과거이자 오늘이고 어떤 길을 들어서느냐에 따라서 마주할지도 모를 미래이다. 오늘날 세계는 무서운 속도로 환경을 파괴 중이다. 국경은 폐쇄되고 갈등은 각 지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예를 들면 미얀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라져가는가. 중요한 뉴스들조차 너무 많은 사건 속에서 빠르게 과거로 밀려나고 있다. 괴물 같은 속도로 소비되는 기억 속에서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이미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닐까. 기술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그 정신없는 속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에 우리의 기억 또한 빠르게 삭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는 이런 극단적인 시대를 마주한 나의 화답이자 미리 살펴본 디스토피아의 한 장면이다.

- 범상치 않은 동화로 시작된 이야기는 은유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기록 필름을 사용했던 초기작들과 비하면 미학적인 상징들이 많아진 듯하다. 예전 인터뷰에서 “나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로 청중을 안내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사운드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왔다”고 설명한 적도 있는데.

= 그런 해석과 접근은 매우 중요하고 언제든 환영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믿는다.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에는 구석기 시대에나 볼 수 있는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건 오늘날 세상이 어떻게 통제되고 누가 사람들을 조정하며 지배하는지에 대한 보편적인 묘사다. 독재자는 어떻게 세상을 파괴시키는지, 극단의 폭력이 도래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어떤 문화권에서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는 제각각 해석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그 씨앗을 던지는 작업이다. 씨앗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 영화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가령 나는 이란여성들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저항하는 움직임에 박수를 보낸다. 내가 직접 그곳에 가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서 당신들의 저항을 지지하고 퍼트리려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는 것 정도는 알리고 싶다.

- 빠른 속도로 나빠지는 세상 속에서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의 미래에 대한 감독님의 견해가 궁금하다.

= 영화제작자로서 나는 다양한 장르를 좋아한다. 러브 스토리, 뮤지컬, 휴먼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는 존중 받아 마땅하다. 동시에 나는 대중영화 속에서 다양한 주제가 다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 대립, 양성 불평등, 여성과 아동에 대한 억압, 빈부 격차 문제 등 조명되어야 주제는 차고 넘친다. 영화는 분명 엔터테인먼트이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영화는 힘이 있고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논쟁적인 이슈에 대한 고찰과 고민이 반영된 영화들이 공존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결합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금 시대엔 스크린에 불이 켜진 뒤에도 기억할 수 있는, 우리의 기억이 되어줄 영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젊은 창작자들의 육성은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에겐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 제대로 마주 보는 시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갖춘 젊은 영화인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2022 CHANEL X 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가 그 씨앗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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