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나 오는 플랜B에서 <옥자>, <미나리>, <더 킹: 헨리 5세> 등을 프로듀싱 하며 커리어를 쌓은, 할리우드의 실력 있는 제작자다. 현재 안나푸르나 공동 총괄부사장으로 재직 중인 크리스티나 오가 한국감독들을 만나기 위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올해부터 영화산업의 중요 관계자들과 신인 감독을 연결시키는 ‘인더스트리 커넥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한정된 공간과 딱딱한 방식을 벗어나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는 만남과 교류의 장이 새롭게 열린 것이다. 인더스트리 커넥션을 위해 부산을 찾은 크리스티나 오는 한국독립영화의 역동성과 신인 감독들의 에너지에 박수를 보냈다. 크리스티나 오를 만나 과감하면서도 세심하게 첫발을 디딘 인더스트리 커넥션의 후일담을 짧게 전한다.
-바쁜 일정 중에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다.
=3년 전인 2019년, 플랜B 프로듀서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더 킹: 헨리 5세>를 들고 온 적이 있다. 그 이후 <미나리>라는 아주 작은 영화를 했고.(웃음) 지금은 안나푸르나에 몸을 담고 있다. 팬데믹 이후 직접 와서 보니 영화제의 에너지를 실감할 수 있어 너무 좋다. 방금 전까지 야외무대를 둘러보고 왔는데 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고 마침내 돌아왔구나 싶은 마음에 순간 환호를 지를 뻔 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인더스트리 커넥션’을 처음 선보였다. 세계 유력 산업관계자들과 한국의 신인 감독들을 직접 연결하고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여기 직접 참여하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고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 박도신 프로그래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취지를 듣고 나니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한인 2세로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어떤 다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는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뉴 커런츠 부문의 한국영화 2편과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의 한국영화 12편 중 몇 편을 볼 수 있었고, 그 중 세 편의 작품을 만든 분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이미 몇 차례 미팅을 했는데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떤 감독들을 만났는지 궁금하다.
=<지옥만세>의 임오정 감독, <공작새>의 변성빈 감독, <Birth>의 유지영 감독을 만났다. <공작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영화였다. 퀴어, 무용 등 다양한 소재를 어우르는 가운데 세대 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핵심적인 드라마가 와닿았다. <지옥만세>도 새로웠다. 쉽게 설명하기 힘든 에너지가 보는 내내 기분 좋은 긴장감을 준다. 물론 둘 다 완벽하진 않다. 하지만 젊고 역동적이고 새롭다. 영화제에서 만나고 싶은 건 다듬어진 세련됨이 아니라 갈고 닦고 싶어지는 가능성들이다. 특히 한국독립영화들은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남다르다. 틀에 박힌 표현 없이 공감의 폭을 넓히는 에너지에 절로 매료된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이 ‘다시, 마주보다’이다. 2019년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걸 너머 새로운 방향으로 다양한 만남의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인더스트리 커넥션’도 그 중 하나다.
=완전 동의하고 응원한다.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가 제작자와 미팅을 직접 주선하는 건 신선하고 좋은 아이디어다. 이런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영화제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온 몸으로 실감하고 간다. 굳이 사례를 찾아보자면 독립영화의 활성화에 주력하는 선댄스영화제의 모델이 떠오르는데 올해 부산은 그보다 훨씬 역동적이면서도 편안하다. 스트레스나 압력 없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만날 수 있도록 세팅을 해주셔서 더 감사하다. 올해는 일정이 촉박하여 많은 감독들을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내년에는 훨씬 많은 분들과 만날 수 있길 고대한다.
-<지옥만세>, <공작새>가 눈에 들어왔다고 하니 가족적인 이야기에 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듀싱했던 <옥자>나 <미나리>도 그렇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장르나 소재에 제한을 둔 적은 없다. 음악, 미술, 디자인, 연기까지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이 된다. 내가 하는 작업은 그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조합을 찾아내는 거다. 굳이 말하자면 내 심장은 진정성에 반응하는 것 같다. 액션에는 액션 나름의 감각적인 진정성이 있고, 드라마에는 드라마 나름의 감성적인 진정성이 있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직접 보았을 때 확인되는 것들이 있다. 연출자를 직접 만나는 게 중요한 이유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북미시장에서 <미나리> 이후 한국영화, 아시아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한 가운데에서 맹활약 중인데.
=맞다.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있어 <미나리> 등의 영화가 조금이나마 기여를 한 것에 대해 더없이 영광스럽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느낌? (웃음) 한국영화는 비로소 자신의 때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여전히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 내가 여기 와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번에 돌아가면 스튜디오들을 만나서 부산에서의 경험을 나누게 될 것이다. 가보니 이런 재능있는 감독들이 있고, 시장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들이 있고, 흥미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지 않을까 기대한다.
-플랜B에서 10년 넘게 일하다가 최근 안나푸르나 공동 총괄부사장으로 선임됐다.
=플랜B에서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고 내 삶의 소중한 페이지다. 브래드 피트와 함께 일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고 나의 업무 능력은 물론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내 삶에서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시기에 안나푸르나 쪽에서 긍정적인 기회를 제안했고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야 할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만감이 교차한다고 해야 할까.아름답게 헤어지는 커플 같았다고 할까. 떠나는 날 차에서 이별 노래를 들으며 엉엉 울었다. (웃음) 지금은 안나푸르나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몇 개 맡으며 기분 좋은 흥분 상태다.
-<미나리> 이후 정이삭 감독과 진행하던 다음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 중인가. 뉴욕과 홍콩에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라고 들었는데.
=그게 플랜B를 떠날 때 가장 슬픈 일 중 하나였다. 플랜B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쪽에서 잘 진행하고 있을 거다. 정이삭 감독님과는 계속 연락하면서 소통하고 있다. 머지 않은 시간에 다시 함께 작업하길 고대한다.
-최근 아시아 콘텐츠에 대한 할리우드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나.
=물론이다. <미나리>를 통해 이민자의 삶과 진실을 다루는 필요한 이야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했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책임감은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좋은 이야기와 창작자니까. 그럼에도 내가 지나온 문화적 유산과 피로 연결된 경험들을 바탕으로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단기적으로는 새로운 목소리를 찾는 게 목표이고, 길게 보면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