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 <비닐하우스> 이솔희 감독,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불투명”
2022-10-27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자신을 의심하는 자만큼 믿음직한 사람도 없다. 비관주의자의 역설은 가장 괴롭고 어두운 바닥에서 끝내 희망을 본다는 데 있다. <비닐하우스>속 인물들의 삶은 어둡다. 소년원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문정(김서형)은 비닐하우스에 삶의 터전을 꾸린다. 노부부의 요양사로 일하는 문정에게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쳐오고 선의를 지닌 인물들의 삶은 바닥까지 추락한다. 그럼에도 이솔희 감독은 <비닐하우스>를 따뜻한 드라마로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여지는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 사이의 거리, 의도와 결과, 절망과 희망 그 사이 어딘가에 영화의 가능성과 진실이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단호하게 내뱉는 이솔희 감독의 언어는 자신의 영화를 닮았다.

- CGV상, 왓챠상, 오로라미디어상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 감사하다. 선생님들이 상을 받으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일 테니 조심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반대로 땅이 꺼지는 기분이랄까. 뭔가 위축되고 걱정이 많아져 아직은 혼란 속에 있다. 시작할 때도 ‘망할 거야’라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자주 들었는데 수상하고 나니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다양하게 들려온다. “너 이제 큰일났다”, “진짜 망할 거야”,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잘 봤다” 등등. (웃음)

- 잘될 거라는 신뢰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격려처럼 들린다.

= 혹시나 들뜰까 봐 걱정해주는 말이란 거 잘 안다. 원체 성격이 그런 것과 거리가 멀고 겁이 많은 편이라 불안이 쉬이 가시진 않는다. 장편영화를 이렇게 빨리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석달가량 시나리오를 썼고 나름 재미있게 나온 것 같아 아카데미 장편지원 과정에 응모했는데 덜컥 뽑혔다. 솔직히 처음엔 준비가 안됐다고 말씀드리고 포기하려고 했는데, 선생님들이 지금 망하나 나중에 망하나 어차피 망할 거면 조금 더 일찍 경험해보는 게 좋지 않냐고 용기를 주셨다. 돌이켜보니 망한다는 이야기 속에 둘러싸여 작업한 셈이다. (웃음)

- 첫 장편의 부담에 대한 완충 작용이 됐을 것 같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허락처럼 들리기도 한다.

=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늘 충돌한다. 아버지가 영화 일을 하셔서 어릴 적부터 당연한 듯 영화를 접했고 영화는 내게 당연한 일이었다. 미디어 스쿨에서 영화를 만들고 대학교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했으니 밖에서 보면 영화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아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내 안에서는 ‘이것 아니면 안돼’, ‘꿈을 좇아가야지’ 하는 식으로 절박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나는 계속 도망치는데 영화가 나를 따라오는 느낌이다. 이번에 첫 장편을 만들고 수상까지 하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무게와 책임을 새삼 실감하는 중이다.

- 사람마다 상황을 자각하고 느끼는 속도가 다르니까 당연한 일이다. <비닐하우스> 역시 감정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조금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 실생활에서도 나이 드신 분들이 더 편하고 친하다.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가 잠깐 우리 집에 머무신 적이 있는데 외할머니를 돌보는 엄마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평소엔 무뚝뚝하신 분인데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외할머니 앞에서 당신이 평생 담아왔던 감정들을 열심히 쏟아내셨다. 엄마는 이제야 속내를 말할 수 있을 때가 왔는데 정작 외할머니는 제대로 듣지 못하는 아이가 되신 거다. 처음엔 그런 관계에 흥미를 느껴 이야기를 짜나갔는데, 여기 남자 노인 태강의 캐릭터가 들어오면서 지금의 이야기로 다듬어졌다.

-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장르적인 표현이 도드라진다.

= 장르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 없다. 많은 분들이 서스펜스, 스릴러를 이야기해주시는데 편집이 끝날 때까지도 장르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게 따뜻하고 조용한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연약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벌어지는 지독하게 아픈 이야기로 다가가길 원했다. 이번에 관객의 반응을 접하며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인물을 괴롭힐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나의 의도와 관객의 감상 사이 존재하는 거리를 마주할 수 있었고 지금도 곱씹으며 소화하는 중이다.

- 의도와 무관하게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나고 인물들이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이야기다. 화면의 톤이 서늘하고 카메라가 인물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드라마’를 강조하니 흥미롭다.

= 인물을 바라보는 시점의 차이인 것 같다. 가령 첫 장면에서 문정이 스스로 뺨을 때리면서 시작한다. 거기서 집중하고 싶었던 건 ‘자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그건 문정에겐 그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정도의 습관 같은 행동이었고, ‘이 여자에게 왜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이유를 같이 찾아가보자’는 정도의 권유였다. 문정은 이기적이지만 그걸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괜찮은 척하는 사람이다. 욕망 덩어리인데 그걸 들키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이 분출하는 걸 막지도 못하는, 요령 없는 바보다. 억제와 분출, 그 틈새로 새어나오는 감정들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 그건 어쩌면 배우의 힘 때문이기도 할 텐데. 김서형 배우는 그간의 강한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 만나기 전엔 나도 무서웠다. (웃음) 첫 미팅 자리에 조금 늦게 왔는데 다리 다친 비둘기를 구해주다가 늦었다는 설명을 열정적으로 하시는 거다. 강해 보이는 기존 이미지와 달리 순수하고 솔직하고 엉뚱한 일면이 마구 새어나왔다. 그 사랑스러운 온도 차를 보며 ‘이분이 문정이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되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 <비닐하우스>가 따뜻하다는 표현이 이제 이해가 간다. 모든 걸 잃은 후에야 솔직해질 수 있는 인물이 바닥에서 희망을 보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있겠다.

= 투명한 듯 보이지만 사실 불투명한, 비닐 같았던 문정은 완전히 벌거벗겨진 뒤에 현실을 마주 본다. 선량한 사람들이 진짜 절박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드러나는 이기심을 파헤쳐보고 싶었다. 늘 그런 억눌린 감정에 호기심을 느낀다. 첫 작품이라서 어딘지 자화상 같은 느낌도 있고 내 히스테릭한 감정이 녹아든 부분도 있다. 그래서 부끄럽고 더 특별하다. 다음 작품은 나와 조금 거리를 두고 분리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이번엔 진짜 따뜻한? (웃음)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장르적으로는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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