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걸 철칙 삼아 사는 남자, 이 사람은 현실에서 유죄일까? 무죄일까? 이탈리아 출신의 배우이자 패션 모델, 199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그러나 어떤 인연인지 프랑스 배우로 오해받는 일이 잦은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한 <가뭄>의 각본을 쓴 프란체스카 아르키부지 감독의 새 영화가 관객과 만난다. <벌새>(Il colibrì)는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 후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지 1주일도 안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벌새>에서 의사이자 한 가족의 아버지인 마르코 카레라의 삶은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놓친 우연, 놓친 기회, 놓친 길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아내 마리나는 강박적으로 바람을 피우고, 그녀가 어렸을 때 해변에서 만난 이탈리아계 프랑스인 여성 루이사와 바람을 피웠다고 남편을 비난한다. 그녀의 말은 맞는 걸까? 이 영화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잊어라.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다”라며 정신분석가 마르코 카레라에게 질문을 던진다. 마르코가 모든 것을 마주하며 저항하는 것은 마치 날개를 빠르게 펄럭이는 것만으로 공중에 떠 있는 벌새와 비슷하게 보인다. 새 중에서도 가장 작은 몸체를 지닌 벌새는 독특한 어깨 근육과 날개 구조를 갖고 있어 효율적인 비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새들과 달리 빠른 날갯짓으로 공중에서 정지할 수 있으며, 전후좌우를 순간적으로 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생체모방’(biomimetics)은 자연을 닮고 싶어 하는 인간의 노력에서 비롯된 기술을 말하고, 생체를 모방한 사례들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생체모방 사례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벌새’다.
이 영화에는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 라우라 모란테 등 이탈리아의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이들은 영화를 만든 경험이 풍부한 아르키부지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에 자유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말한다. 난니 모레티 감독도 이 영화에 배우로 출연한다. 모레티의 존재는 영화에서 거의 패러디에 가깝게 느껴지는데, 관객을 이야기 밖으로 끌어내는 재주가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탈리아 관객이 힘찬 응원을 보내고 있는 영화의 원작은 산드로 베로네시의 동명 소설이다. 산드로 베로네시는 <조용한 혼돈>(Caos Calmo)과 <허밍버드>(Il colibrì)로 이탈리아의 최고 문학작품에 수여하는 스트레가상을 두번 연속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