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조 부탁드립니다. 멈춰 서지 말고 앞으로 계속 가주세요.”
지난 10월24일,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에서 다카라즈카 극장으로 이어진 길에 레드 카펫이 깔렸다. 오전부터 흩날리던 빗방울이 그치고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사람들은 레드 카펫 주변을 기웃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행사팀의 안내에 따라 통행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삼삼오오 자리 잡은 관객은 레드 카펫이 시작되자 스마트폰을 들고 배우와 감독을 촬영했다. 지난해 롯폰기에서 장소를 옮긴 도쿄국제영화제(이하 도쿄영화제)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펼친 레드 카펫이었다. 곳곳에 영화관과 극장이 많이 분포해 있어 시네마타운의 본거지로 불리는 히비야-유라쿠초-긴자 일대에서 열흘간의 영화 축제가 막을 올렸다.
안도 히로야스 도쿄영화제 이사장은 지역 주민과 게스트의 접근성을 고려해 장소를 옮겼다고 말했다. “영화제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에서 즐기는 행사다.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에 초대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제뿐만 아니라 지역의 좋은 레스토랑과 도시를 즐기고 온다.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도 그런 곳이지 않은가. 긴자엔 영화관뿐 아니라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 숍이 많다. 지난해에는 팬데믹으로 게스트를 많이 초대하지 못했고 그들은 영화가 끝나면 곧바로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올해는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근처에 모여 늦게까지 영화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이 점이 제일 중요했다.” 일본은 여전히 방역수칙을 유지하고 있다. 마스크 착용은 물론 실내 공간 입구에서는 체온 체크를 하고 손세정제를 권했다. 팬데믹 이전에는 개막식 직후 열렸다는 외신기자들의 회식 자리도 올해는 없었다. 레드 카펫 현장에도 관객이 모여들었지만 팬들의 환호성보다 행사팀의 통제와 질서가 더 존재감을 드러냈다. 안도 이사장은 “다시 레드 카펫이 깔렸다는 게 중요하다”며 이것이 회복의 첫걸음임을 강조했다.
한국영화 없었지만… 배우 심은경은 심사위원으로
영화제가 전하고자 하는 희망과 도약의 메시지는 개막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개막작으로 상영된 제제 다카히사 감독의 <프레그먼츠 오브 더 라스트 윌>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베리아로 끌려간 군인 야마모토 하타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러닝타임 내내 상황에 굴복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외치는 야마모토의 목소리는 이곳에 모인 영화인들과 관객을 향한 말처럼 들렸다. 이치야마 쇼조 프로그래머는 “이 영화를 개막작으로 초대한 데에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사이에서 꾸준히 작업해온 제제 다카히사 감독에 대한 헌사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더불어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주인공 야마모토 역의 니노미아 가즈나리의 인기 역시 개막작을 빛내는 데 일조했다. 아라시의 멤버이자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해 아이돌 사상 최초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력을 가진 니노미야 가즈나리가 레드 카펫에 섰을 때 기자들의 플래시가 가장 많이 번쩍였다.
15편의 경쟁작 중 3편이 일본영화였다. 일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젊은 영화 제작자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마이즈미 리키야의 <바이 더 윈도>, 마쓰나가 다이시의 <에고이스트>, 후쿠나가 다게시의 <산녀>와 카자흐스탄, 칠레, 스페인, 이탈리아, 베트남, 스리랑카 등 다국적의 영화가 경쟁작에 포함됐다. 42개국의 상영작 169편 중 한국영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치야마 쇼조 프로그래머는 “한국에는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등 훌륭한 감독들이 많지만 이미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명되는 이름이다. 우리는 30, 40대 제작자의 신작을 찾고 소개하겠다는 미션이 있다”며 기자들에게 왜 한국영화가 포함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덧붙였다.
영화제 기간 중 한국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심사위원 기자회견장이었다. 줄리 테이머를 위원장으로 꾸린 올해의 심사위원단에 배우 심은경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심은경은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으로 영화적 감수성을 키웠던 10대 시절을 이야기하며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기분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다른 심사위원에 비해 소양이 부족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며 포부를 밝혔다. 심은경은 폐막식장에서 남우주연상 발표를 앞두고 지난 10월29일 한국에서 일어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포르투갈의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감독, 기타노 다케시와 오래 작업해온 야나기시마 가쓰미 촬영감독, 마리 크리스틴 드 나바셀 전 일본 프랑스 문화원 관장이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지난해 개봉작 중 세계에 소개하고 싶은 일본 신작을 소개하는 ‘닛폰 시네마 나우’ 섹션에는 상업영화와 독립영화가 고루 분포했다. 올해 부산영화제의 ‘일본 영화의 새로운 물결’에서 소개됐던 미야케 쇼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소설을 각색해 감독으로 데뷔한 이토 지히로의 <인 허 룸>, 2013년 부산영화제에 초청됐던 마쓰무라 싱고의 신작 <더 럼프 인 마이 하트>, 음악감독으로도 잘 알려진 한노 요시히로의 <라이트닝 오버 더 비욘드> 등이 포함됐다. 지난 3월 식도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오야마 신지의 대표작 <유레카>와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도 같은 섹션에서 상영됐다. 이치야마 쇼조 프로그래머는 “투병 중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난해 10월만 해도 의사에게 완치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건강해 보였고 영화제를 준비하는 회의를 함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영화제를 통해 아오야마 신지를 추모하고자 했지만 대부분 35mm 필름이라 디지털 시네마용 파일(DCP)이 거의 없었다. 영화제 예산으로 두편을 디지털로 복원했다.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알 수 없는 자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는 팬데믹을 겪은 2022년의 관객에게 묘한 기시감을 안긴다. 영화에 출연했던 미야자키 아오이와 아사노 다다노부, 나카하라 마사야가 상영 후 대담에 참여해 아오야마 신지 감독과의 추억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영화인들의 마스터, 구로사와 아키라와 데뷔 30주년 맞은 차이밍량
도쿄에서 가장 많이 호명된 이름은 구로사와 아키라였다. 영화제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상이 14년 만에 부활한 게 가장 큰 뉴스였다. 심사위원장인 줄리 테이머는 기자회견의 인사말로 “<라쇼몽>은 내 인생을 바꾼 영화이자 감독을 꿈꾸게 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폐막작인 올리비에 헤르마누스 감독의 <리빙> 역시 구로사와 아키라의 고전 <이키루>를 소설가 이시구로 가즈오가 각색한 작품이다. “당연히 영화가 좋기 때문이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점에서도 폐막작으로 적합했다”고 이치야마 쇼조 프로그래머는 덧붙였다.
영화사에 공헌하고 영화산업을 이끄는 영화 제작자에게 수여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상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과 후카다 고지가 받았다. 이냐리투 감독은 도쿄영화제와 인연이 이미 여러 번 있다. 2000년 장편 데뷔작인 <아모레스 페로스>로 이곳에서 그랑프리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심사위원으로 영화제에 참여했다. 이번 영화제의 갈라 섹션에서 신작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를 선보이기도 했지만 그는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의 신작보다 구로사와 아키라에 관한 애정을 더 드러냈다. “<라쇼몽>은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구로사와 감독은 제3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 <란> <이키루>는 <아모레스 페로스> <비우티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만들 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모순투성이의 캐릭터로 인간의 복잡한 본성을 그려내는 게 구로사와만의 장기라고 생각한다.” 이냐리투 감독은 일본 문화를 가깝게 느낀다며 류이치 사카모토, 미시마 유키오, 무라카미 하루키 등 좋아하는 예술가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제 내내 호명된 구로사와 아키라의 존재감을 느꼈는지 폐막식에 선 안도 이사장은 “여러 게스트들의 말처럼 구로사와의 작품은 세계 최고 중 하나다. 하지만 일본의 예술은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화만큼은 다른 나라와 충분히 견줄 수 있다”고 언급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상 공동 수상자인 후카다 고지 감독도 세계에서 주목하는 감독 중 하나다. <하모니움>은 2016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신작 <러브라이프>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됐다. 그렇지만 그보다 팬데믹이 닥쳤을 때 일본의 예술극장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지 않도록 작은 극장 지원(Mini Theatre Aid) 프로젝트를 이끌었다는 이력이 더 눈길을 끈다. 상을 받는 자리에서도 그는 “감독과 배우, 스탭들의 고용 조건이 열악해지고 장시간의 노동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점점 나빠지는 영화 현장에 영화계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후카다 고지는 ‘차이밍량 감독 데뷔 30주년 특별전’의 일환으로 열린 라운지 토크에 대담자로 나서기도 했다. 차이밍량의 오랜 팬이라고 자처한 후카다 고지는 “과거로 돌아가 나 자신에게 훗날 차이밍량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며 차이밍량과 서로의 영화에 대한 덕담을 나눴다. 대만의 2세대 뉴웨이브를 이끈 차이밍량의 데뷔작 <청소년 나타>가 1993년 도쿄영화제 영시네마 부문에서 수상한 이력에서 비롯된 특별전이기도 했다. 특별전에서는 <청소년 나타>와 <물 위를 걷다>, 미공개 단편 등이 상영됐다.
차이밍량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언급하며 “나는 한번도 크게 흥행한 적이 없는 감독이다. 하지만 내가 만든 영화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고 만족스럽다. 내 영화는 유통기한이 긴 것 같다”며 웃었다. 후카다 고지와의 대담은 자연스레 영화산업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대만영화는 최근에 장르영화로 수익을 창출하는 데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내 영화의 상영 횟수를 늘리기 위해 개봉 전에 거리로 나가 스탭들과 직접 표를 팔기도 한다. 10년을 그래왔다”는 차이밍량 감독의 말에 후카타 고지 감독은 “일본보다 프랑스에서 내 영화를 보려는 사람이 더 많아 나 역시 때때로 갈증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영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 밖에도 극장 안팎에서 다양한 대담이 열렸다. 이번 영화제에 상영작이 없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도 애드워드 양의 <독립시대>가 상영된다는 소식에 기꺼이 대담을 수락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여성 동료들의 현장 환경을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회복과 연대의 기운이 완연했던 제35회 도쿄영화제는 11월2일 열흘간의 여정을 마쳤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본 에드워드 양의 <독립시대>
에드워드 양의 <독립시대>는 이틀 밤낮 동안 대만의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시대상을 그려낸 블랙코미디다. 저작권 문제로 대만에서도 오랫동안 상영이 어려웠던 <독립시대>가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도쿄영화제가 반색했다.
에드워드 양의 아내에게 동의를 구해 도쿄영화제 기간 동안 세 차례 상영했고 세번 모두 매진됐다. 상영 후 대담에 나선 하마구치 류스케는 <독립시대>의 감상평을 길게 들려주었다. “그의 전작을 보면 에드워드 양이 대만이라는 도시에 얼마나 애정이 있었는지가 느껴진다. 작품마다 대만의 급격한 도시 변화뿐 아니라 변화된 시대상을 담아냈다. 현대의 대만을 그리면서도 이면의 어두움 역시 생생히 묘사했다. 이보다 3년 전에 촬영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스타일이 달라졌는데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모든 캐릭터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는 점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망원렌즈로 촬영해서 인물의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독립시대>는 캐릭터마다 표정이 생생하다. 인물들이 긴 대화를 혼란스럽게 이어가지만 서로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뒤로 갈수록 화면이 어두워진다. 어둠이 짙어지면 인물들은 그제야 서서히 속내를 보이기 시작한다. <독립시대>를 극장에서 보니 공유하고 싶은 게 많아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다. <하나 그리고 둘>의 보조 제작자였던 구보타 오사무가 <드라이브 마이 카>의 프로듀서를 맡아줬다. 그에게 에드워드 양 감독과 작업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며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하마구치 류스케는 판권 문제로 여전히 상영이 어려운 에드워드 양의 작품들을 언급하며 “특히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스크린에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경쟁부문 수상 결과
도쿄 그랑프리 <비스트>
심사위원 특별상 <제3차 세계대전>
최우수감독상 <비스트> 로드리고 소로고옌
여우주연상 <1976> 알라인 쿠펜헤임
남우주연상 <비스트> 드니 메노셰
예술공헌상 <피콕 라멘트> 산지와 푸쉬파쿠마라
관객상 <바이 더 윈도> 이마이즈미 리키야
아시안 퓨처 부문 수상 결과
베스트 영화상 <버터플라이즈 리브 온니 원 데이> 모하마드레자 바탄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