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모가 떠난 자를 위한 세리머니라면, 애도는 남겨진 자들을 향한 질문의 시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상실의 커다란 구멍 앞에서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발버둥친다. 누군가는 현실을 부정하고, 어떤 사람은 빈자리를 메우려 애쓰고, 또 다른 사람은 그저 흘려보내기도 한다. 당연하지만 우리가 답에 도달하는 일은 없다. 이건 정답을 찾는 풀이가 아니라 질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애도의 방식을 선택하는 건 곧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일을 증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블랙 팬서>의 속편이 제작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모두의 머릿속엔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채드윅 보즈먼, 아니 블랙 팬서 없는 블랙 팬서가 가능한 건가.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채드윅 보즈먼을 CG나 대역으로 되살리진 않겠노라고 공언했다. 이제 남겨진 자들은 위대한 블랙 팬서, 와칸다의 수호자인 티찰라 왕의 유산을 이어받아야 할 사명을 짊어졌다. 질문은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페이즈4의 끝자락에 있는 <와칸다 포에버>는 어떻게 선대의 유산을 이어받을 것인가. 페이즈4가 ‘어벤져스’의 후예들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걸 중요한 가닥으로 삼았음을 상기해보면 <와칸다 포에버>의 역할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요컨대 <와칸다 포에버>는 추모와 애도, 그리고 계승에 대한 영화다.
뭉클한 애도와 합당한 계승의 정석, 160분이 필요했던 이유
티찰라(채드윅 보즈먼)가 세상을 떠난다. 킬몽거(마이클 B. 조던)에 의해 심장 모양 허브가 모두 불타버린 터라 더이상 블랙 팬서가 나올 수도 없다. 와칸다의 수호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서방 강국들은 음지에서 와칸다의 비브라늄을 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블랙 팬서가 사라져도 여전히 최강의 기술을 지닌 와칸다를 공략하는 건 쉽지 않고, 서방국들은 와칸다 이외의 지역에서 비브라늄을 탐색한 끝에 마침내 실마리를 잡는다. 그런데 발굴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바닷속에서 미지의 존재들이 나타나 탐사대를 몰살시킨다. 잠시 뒤 해저 세계 탈로칸 왕국의 쿠쿨칸(테노치 우에르타)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존재가 와칸다에 나타나 슈리(레티티아 라이트)와 라몬다 여왕(앤절라 배싯)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자신들 역시 비브라늄을 바탕으로 바닷속에 문명을 세웠다고 밝히는 쿠쿨칸은 티찰라 왕으로 인해 비브라늄의 존재를 전세계가 알게 되어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위기에 처했다고 말한다. 이에 비브라늄을 탐사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한 과학자를 자신들에게 데려올 것을 요구한다. 슈리는 오코예(다나이 구리라)와 함께 라몬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MIT에 재학 중인 천재 리리 윌리엄스(도미니크 손)를 만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다섯 단계가 있다. <와칸다 포에버>는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고스란히 서사화했다. 오프닝은 위대한 티찰라 왕, 강력한 블랙 팬서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배우 채드윅 보즈먼에게 바치는 장대한 장례식으로 문을 연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마블 로고와 함께 <블랙 팬서>의 영상들이 제시될 때부터 추모의 한가운데에서 이야기의 문을 연다. 라몬다 여왕은 유일한 혈육인 딸 슈리를 끔찍이 아끼며 국왕의 빈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낸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후에도 슈리는 오빠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한 채 분노를 누르며 자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와칸다 포에버>는 전반적으로 슈리의 성장담을 감정의 기둥 삼아 구성된다.
슈리에게 분노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건 또 다른 비브라늄 문명 탈로칸의 리더 쿠쿨칸이다. 자신에게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며 적들에겐 네이머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쿠쿨칸은 남미 원주민 문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마블 코믹스의 오래된 캐릭터 중 하나다. 강력한 힘을 지닌 돌연변이로 발목에 달린 날개를 활용하여 바다와 하늘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쿠쿨칸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소개처럼 티찰라와 킬몽거의 고뇌를 한몸에 지닌 인물이다. 서구 식민지 문명에 의해 학살당한 남미 원주민들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는 백성을 지켜야한다는 굳건한 사명감을 지녔다. 다만 믿음은 의심과 공포, 배제로 이어져 공격당하기 전에 지상 문명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에 쿠쿨칸 아니 네이머는 와칸다에게 문제의 싹을 제거하고 동맹을 맺을 것을 요구한다.
블랙 팬서의 후계를 세워야 할 <와칸다 포에버>는 할 일이 많다. 본래 히어로의 정체성은 적을 통해 만들어지는 법이라 새로운 블랙 팬서에게 행동의 동기가 될 만한 빌런, 그러니까 적대 세력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탈로칸은 영리한 선택이다. 와칸다가 아프리카 문명을 기반으로 한 대안적 상상력을 선사했다면 탈로칸은 남미 원주민 문명을 바탕으로 고대 아틀란티스가 연상되는 해저 문명을 선보인다. 위대한 왕으로서의 면모와 폭력과 복수의 화신으로서의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네이머는 1편에서 두명의 블랙 팬서가 보여줬던 질문을 다시 되풀이한다. 강력한 힘을 지닌 문명이 적대 세력 앞에서 취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티찰라가 와칸다의 존재를 공표하며 화합의 길로 나선 데 반해 아직 블랙 팬서가 될 준비조차 되지 않은 슈리에겐 너무 먼 질문이다. 그래서 순서가 필요하다. 슈리에게 분노와 복수의 대상이 필요하고, 영화는 이를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와칸다 포에버>는 여성, 그리고 신세대가 이끌어간다. 와칸다에는 여러 부족과 장로들이 있지만 전면에 나서 활약하는 건 여성들이다.
라몬다 여왕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고결함으로 블랙 팬서 없는 와칸다를 안정적으로 이끈다. 와칸다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최고의 전사 오코예는 여전히 맹활약한다. 동시에 이건 계승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슈리는 블랙 팬서를, 리리 윌리엄스는 아이언맨을 이어받아 자신만의 슈트인 아이언 하트를 제작한다. 하지만 이건 단지 선대의 유산을 안전하게 이어받는 승계 작업과는 결이 다르다. 선대가 영감을 제시했을지라도 이들이 걷는 건 각자의 길이다. 리리 윌리엄스는 독자적인 방식에 와칸다의 기술을 더해 아이언 하트를 완성하고, 슈리는 맥이 끊어진 심장 모양 허브를 자신의 힘으로 복원시킨다. 선대의 성공한 유산을 이어받되 새로운 것들을 추가하는 건 <와칸다 포에버>를 대표로 한 페이즈4 영화들의 목표처럼 보이는데, <와칸다 포에버>는 이를 안정적으로 달성한다. 그 중심에는 죽음과 복수를 바탕으로 한 애도의 서사가 있다. 애도에는 순서가 필요하다. 분노와 발산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위한 작업이자 방향을 찾기 위한 질문이다. 슈리에겐 제대로 된 분노가 필요했고, 갈림길의 선택을 통해 어떤 영웅이 될 것인지를 증명해야만 한다. 160분에 달하는 긴 상영시간은 애도와 추모부터 빌런의 탄생, 영웅의 계승까지의 빌드업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와칸다, 아니 마블은 ‘포에버’ 할 수 있을 것인가
<와칸다 포에버>는 준수하다. 상실과 애도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충분히 설득되고, 라몬다, 오코예 등 캐릭터들의 고뇌와 감정선도 잘 살려냈으며 심지어 빌런인 네이머까지 매력적이다. 지금껏 마블이 해왔고, 지금 할 수 있는 자산으로 최선을 다해 짜낸 결과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동시에 한편으론 힘에 부친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굳이 짜냈다는 표현을 쓴 건 이 영화가 보여준 성취가 지금 현재 마블 영화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영화의 문제는 더이상 이 장르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여지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에 있다. <블랙 팬서>에서 아프리카 문명과 이색적으로 결합한 전투 방식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에는 해저 문명을 볼거리로 선사하지만 옆 동네 DC의 아틀란티스와 미묘하게 다르면서도 익숙하다. ‘계승’이 키워드인 만큼 완전히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가운데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변주쪽에 가까운데 비주얼적인 충격과 쾌감은 확실히 덜하다(혹은 어색하다). 심지어 전투 시퀀스의 배치 방식은 정답지를 미리 본 것마냥 정해진 길을 따른다. <와칸다 포에버> 역시 대단원의 거대한 전투를 후반부에 세팅했지만 이미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선보인 그 이상의 상상력을 구현하진 못한다. 안정적인 승계는 달리 표현하면 여전히 전작과 이전 세대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마블 특유의 구멍들은 여전하다. 가령 와칸다에서 해저 세계인 탈로칸까지 방대한 공간을 무대로 하는 만큼 마블 특유의 ‘그렇다 치고’ 스페이스 점프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반복된다. 아니, 캐릭터의 전사나 설명이 많아져 상영시간이 길어진 만큼 단점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무엇보다 캐릭터간 매력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전반부 라몬다 여왕은 유엔 연설이나 오코예 앞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 등에서는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이는 캐릭터와 서사의 매력도 있지만 대부분 배우의 공이다. 반면 이를 이어받아야 할 슈리와 리리의 존재감은 다소 희미하다. 그나마 리리 윌리엄스는 뜬금없는 등장과 빈약한 서사 탓이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다. 아이언 하트의 등장은 필연적인 이유가 제시되지 못한 채 그저 이어받아야 한다는 강박만이 남는다. 슈리의 경우 영화 전체를 끌고 가야 하는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오히려 빌런인 네이머의 존재감과 매력이 더 도드라진다는 점에서 이번 계승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의문이다. <와칸다 포에버>에서는 새로운 블랙 팬서가 탄생했지만 여전히 블랙 팬서 없는 블랙 팬서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와칸다 포에버’였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이게 전략적인 선택이라는 느낌도 있다. 영원이 된 블랙 팬서, 채드윅 보즈먼을 대체하는 블랙 팬서를 내세우기보다는 와칸다라는 집단을 선택한 셈이다.
강조하건대 <와칸다 포에버>는 깔끔하고 견고하고 우아하다. 액션과 볼거리에만 매달리지 않고 애도를 중심으로 한 다소 무거운 서사를 잘 풀어냈으며 식민주의 역사와 환경과 정치적 불균형 문제까지 인식을 확장해 설득력을 더했다. 단점이 없진 않지만 장점이 더 도드라진다고 해도 좋겠다. 마블 페이즈4의 아쉬운 행보를 되돌아볼 때 이 정도의 깔끔한 서사와 멋들어진 추모라면 계승 작업의 마무리로서 대체로 만족스럽다. 한편으론 그렇기에 이번 영화의 완성도가 한계까지 짜낸 마블의, 아니 히어로영화의 현주소를 증명하는 것 같아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다. 이쯤에서 히어로영화를 떠나보낼 것인가. 아니면 슬픔과 분노를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쪽이건 <와칸다 포에버>의 흥행 결과는 향후 마블, 아니 히어로영화의 분기점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비주얼보다 오디오, 귀로 듣는 스펙터클
<와칸다 포에버>가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는다면 그 공의 팔할은 음악이다. 마블 영화가 보여주는 시각적인 완성도는 어느 순간부터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거대한 집단 전투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것도 이미 익숙해진 상황에서 새롭게 돌파구를 제시하는 건 루드비히 고란손의 음악이다. <블랙 팬서>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는 루드비히 고란손은 “<블랙 팬서>의 테마와 고유의 드럼 소리를 제외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음악은 새롭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나이지리아, 메소아메리카 문화에 영감을 받은 이야기의 감성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녹음 장소마저 라고스, 나이지리아, 멕시코 시티 등지로 고르는 등 귀로 듣는 스펙터클을 제대로 구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