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기후 위기에 대한 소설을 겨우 마무리했다. 고작 100페이지짜리 중편을 쓰는 데 반년을 소진했으니,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시간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원고인 셈이다. 지난해 나는 같은 기간 동안 600페이지짜리 장편을 썼다. 글밥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입장에선 완전 망한 거지. 사실 대부분의 시간을 백지를 펼쳐놓고 보냈다. 문득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져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매일 확증 편향되는 멍청함의 양에 비해 한편의 소설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너무나 미미하고 비효율적이지 않나?
늦은 새벽, 한참 텅 빈 화면을 노려보다보면 문득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아니, 글쎄 내가 소설가라니. 근데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냥 재미난 책이나 읽고 신작 애니메이션이나 챙겨 보던 덕후였는데. 그저 즐겁자고 소설 몇자 끼적였던 것뿐인데. 언제부터 어울리지도 않게 온 세상의 무게를 다 짊어진 양 거들먹거리며 폼만 잡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람? 오만하여라. 세상이 읽어주지도 않을 이야기를 쓰는 주제에. 세상에 대해 아무런 해답도 갖지 못한 주제에. 나 혼자 반쯤 미쳐서는 이야기를 휘둘러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세상은 나를 상대할 생각조차 없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투쟁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 흔한 등록금 투쟁에도 참여해보지 못했다. 애초에 대학 생활을 제대로 지내지도 못했지만. 2013년 겨울, ‘안녕들하십니까’로 시작되는 대자보를 읽기 전까지 나는 언제나 모든 싸움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냈다. 글을 쓸 때만 빼고.
그럼 왜 싸우지? 이유를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연히도 영화 <돈 룩 업>을 시청하던 도중 깨달음이 찾아왔다. 두려움. 나는 이 영화가 너무 무서웠다. 장면 장면마다 견딜 수 없이 소름이 끼쳐 10분 만에 영화 감상을 중단했는데, 그 후로도 수차례 도전했지만 여전히 30분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통령이 주인공의 학벌을 묻는 장면은 토할 것같이 힘들었다.
무섭지 않나? 세상은 내일 당장에라도 망할 수 있다. 이미 망했는데 우리만 모르는 걸 수도 있고. 길을 걷다 범죄를 겪을 수도 있고,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짊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도리어 내가 상처를 주는 입장이 될지도 모른다. 두렵다. 두렵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대안 세계를 모색해야 한다. 그 안전한 도피처에 머물기 위해. 걱정이 해소된 대안 세계를 끊임없이 제시해야만 한다. 다소 허황되더라도. 위태롭고 금세 허물어질 가짜 거처이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모래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자연히 책장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남들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글을 쓰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여전히 글로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소셜 미디어에서, 칼럼 조각 위에서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 치열하게 단어를 조립한다. 세상이 가진 모순의 한쪽 귀퉁이를 물어뜯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다.
<돈 룩 업>을 이어서 시청할 용기는 여전히 없기 때문에, 그보단 조금 덜 무서운 책을 꺼내들었다. 존 스칼지의 <무너지는 제국>. 글을 쓰는 내내 책상 옆에 세워두고 표지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잡는 데 활용한 책이었다. <무너지는 제국> <타오르는 불꽃> <마지막 황제>로 이어지는 상호의존성단 삼부작은 전형적인 ‘존 스칼지 소설’이다. 끝내주게 재미있다는 뜻이다. 왁자지껄한 수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탁월한 페이지 터너. 덕분에 좀 덜 무서웠다. 세상이 망하는 건 매한가지지만.
소설 속 우주에는 ‘플로우’라는 웜홀이 존재한다. 웜홀을 통로로 느슨하게 이어진, 홀로 자급자족할 수 없는 행성들의 제국. 그래서 상호의존성단이다. 하지만 누군가 깨닫는다. 플로우가 서서히 붕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행성과 행성 사이의 교통이 끊어져 모두가 사이좋게 멸종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플로우 붕괴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붕괴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려는 귀족 멍청이들이 끼어들며 제국은 자멸의 가능성을 차곡차곡 높여간다.하하하 바보들. 다 죽게 생겼는데 제국 화폐가 무슨 소용이고 황제가 되는 게 무슨 소용이람. 멍청이들을 실컷 비웃다 어느새 나는 깨닫는다. 나도 그들과 똑같다. 반성해야지. 고기도 좀 덜 먹고.
기후 위기 소설을 쓰는 내내 절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자료를 조사하고 또 조사할수록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세상은 착실히 망해가고 있고, 뭘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쳐버린 거냐며 추궁하는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두들겨맞는 정도가 그나마 남은 선택지라는 망상에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착각이다. 아직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부디 100년 뒤의 누군가가 그 소설을 비웃으며, 그 시절 사람들 참 겁도 많았네 깔깔 조롱하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