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뉴욕타임스>는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통해 “하비 와인스틴이 배우나 직원 등을 호텔 방으로 불러 마사지를 요구하고, 변태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왔다”고 폭로했다. <그녀가 말했다>는 이 기사를 작성한 조디 캔터(조 카잔)와 메건 투히(케리 멀리건)의 보도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범죄 당사자도, 그가 벌인 성추행도 아니다. 마리아 슈레이더 감독은 “탐사보도기자인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가 겪은 일을 관객이 경험하게 하는” 동시에 “첫 보도를 내기까지 두 사람이 감내한 것을 담은 영화”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는 <스포트라이트> <더 포스트>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처럼 뉴스룸에서 일어난 실화를 소재로 한다.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가 진실을 추적하고 보도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기존 뉴스룸 영화와 닮았지만 <그녀가 말했다>에는 탐사보도를 소재로 한 영화 특유의 열기와 고유의 뭉클함이 있다. 두 기자를 포함해 사건에 연루된 여성들 각자의 삶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용기를 내 공론화하기까지의 과정과 어려움을 기자들의 노고 못지않게 공들여 담아낸다. 이로써 진실을 말하고 귀담아들은 그들 모두가 주인공인 영화로 완성해냈다.
#WhyWomenDon’tReport 말한다고 그를 멈출 수 있을까요?
지금의 메릴 스트립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겠지만, 201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는 하비 와인스틴을 신이라고 칭했다. 당시에는 이 말이 그다지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성추문 보도 이전까지 와인스틴은 신이라고 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제작자였기 때문이다. 와인스틴이 마지막까지 몸담았던 ‘와인스틴 컴퍼니’의 전신 ‘미라맥스’는 1979년 와인스틴 형제가 설립한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배급사다. 90년대 미라맥스는 <시네마 천국> 등을 수입·배급해 세계 관객에게 알리고 <크라잉 게임> <펄프 픽션> <굿 윌 헌팅> 등을 제작해 관객과 평단에게 호평을 받았다. 와인스틴은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미다스의 손으로 부상했다.
2017년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에서 와인스틴의 회원 자격을 박탈하기까지 그가 제작하거나 배급한 영화는 오스카 시상식에서 34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고 그중 81개의 트로피를 차지했다. 돈과 권력, 명성을 거머쥔 그의 영향력은 할리우드를 넘어 정치권에서도 유효했다. 와인스틴은 오랫동안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거액을 기부해온 큰손이었고, 2016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대선에 나왔을 때 모금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와인스틴이 업계 안팎으로 절대 권력을 누리는 동안 그의 난폭하고 감정적인 성격과 여성 편력이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다. 와인스틴을 조심하라는 말이 시상식에서까지 공공연히 농담처럼 언급되었지만 대부분 루머로 여겼다.
정말 루머일 뿐이었을까? 2013년부터 직장 내 여성 처우를 취재해온 <뉴욕타임스>의 조디 캔터는 이 루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미라맥스에 제기된 성추행 신고 기록의 조사에 착수했다. 와인스틴과 일한 배우와 영화사 직원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캔터와 투히는 실제 성폭력이 존재했고 피해자의 입막음을 위해 보상금과 함께 기밀유지 서약서가 강요된 사실을 발견했다. 입수한 서약서에는 가족, 심리상담가, 경찰은 물론 ‘현존하는, 또는 앞으로 생겨날 그 어떤 언론사’에도 사건을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피해자들이 이 서명에 순순히 응한 것은 아니었다. 제보하고 고발하기도 했다. 2015년 이탈리아 모델 엠브라 구디에레스는 캐스팅 회의차 그의 사무실에 초대받았다가 와인스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녀는 와인스틴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 파일을 제출하여 그를 성폭행 혐의로 기소했다. 이 사건으로 와인스틴의 성범죄가 처음 공개됐지만 구디에레스는 곧바로 반격당했다. 와인스틴은 언론을 동원해 그녀가 매춘부로 일했다고 거짓 주장하고 캐스팅을 빌미로 자신을 협박했다고 공격했다. 연예계 스캔들로 치부되고 유야무야 종결된 이 사건은 숨죽인 피해자들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남겼다. 캔터와 투히를 만난 피해 여성들은 진실을 말해달라는 그들에게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한다고 그를 멈출 수 있을까요?”
#패턴과_시스템 어떻게 30년 동안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21살, 취업이 간절했던 로라 매든은 촬영장 보조아르바이트로 일을 시작했다. 와인스틴은 그녀의 일솜씨를 칭찬하며 정규직 일자리를 위한 미팅을 제안했다. 24살 로웨나 추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와인스틴의 비서로 채용됐다. 영화 <라운더스> 홍보차 베니스국제영화제를 함께 방문했고 그의 숙소에서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스크림>에 출연한 23살 신인배우 로즈 맥고언은 자신의 신작을 소개하기 위해 선댄스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와인스틴에게 미팅을 제안받았다. 피해자들의 증언은 기이하게 닮아 있었다. 호텔 스위트룸, 목욕 가운 차림의 와인스틴, 마사지 요구. 그들은 유사한 장면을 설명했다. 일종의 수법이었다.
연령대는 제각각이지만 사회 초년생 여성이나 신인배우가 와인스틴의 주 타깃이었다. 그는 업무를 빌미로 그들을 자신의 공간으로 불러들였다. 가해자는 하비 와인스틴임에도 불구하고 피해 여성들은 그 방에 간 자신을, 그를 막아내지 못한 자신을 평생 자책하며 고통에 시달렸다. 피해 사실을 알린 여성들은 이 문제가 와인스틴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를 돕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영화계에 몸담은 30년 동안 성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업계 거물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의 동료와 할리우드가 그의 행위를 방조해왔고 돈과 권력을 이용해 피해 사실을 무마해왔던 것이다.
젤다 퍼킨스, 로라 매든, 로웨나 추 등 과거 와인스틴과 일했던 직원들이 자신이 겪은 피해를 털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오프더레코드’(보도에서 제외해야 할 사항)였다. 각지에 흩어져 있어 서로 만난 적 없는 피해자들은 와인스틴이라는 권력에 맞서는 개인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이 사건이 다시 공론화되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았다. 와인스틴의 진상을 기사로 폭로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의 공식적인 증언과 이를 입증할 증거가 필요했다. 캔터와 투히는 오랫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온 와인스틴의 실체를 고발하기 위해 필요한 증언과 증거를 하나씩 찾아나섰다.
#조디와_메건 <뉴욕타임스>의 뉴스룸
메건 투히는 <뉴욕타임스>에서 10년 넘게 성범죄와 성적 위법 행위를 파헤쳤다. 와인스틴 사건 직전까지 도널드 트럼프의 성추행과 부도덕한 행위를 고발했던 투히는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조디 캔터는 오랫동안 조직 내에서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 여성의 경험을 기록하며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심을 기울여왔다. 기업과 기관 내 성차별을 지적한 캔터의 기사로 아마존, 스타벅스, 하버드 경영대학원 등이 내부 정책을 바꾸기도 했다. 그녀 역시 두 아이를 기르는 엄마였다. 영화에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두 기자의 삶의 풍경이 녹아들어 있다. 마리아 슈레이더 감독은 두 사람이 쓴 기록의 단어 사이의 공간에 담긴 감정과 침묵, 의심, 기쁨까지 모두 담고자 했다.
누군가 자신의 가슴에 평생 묻어둔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익명의 누군가가 협박을 해온 날에도 캔터와 투히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일상을 보낸다. 가족과 나누는 유대감 속에서 행복과 불안을 느끼는 이들의 인간적인 모습은 두 사람을 사건을 해결한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용기를 낸 평범한 여성들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게 한다. 뉴욕 거리를 바쁘게 걷는 군중 속으로 두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이러한 의도가 느껴진다.
조 카잔과 케리 멀리건은 캔터와 투히로 완벽히 변신했다. 덤덤하고도 진실된, 과장되지 않은 두 사람의 연기는 실제 두 기자가 어떤 성품의 인물인지 짐작하게 한다. 뉴스룸에서 그려지는 유능한 동료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대단히 이상적이다. 그중 <뉴욕타임스>의 부편집장 레베카 코벳으로 분한 퍼트리샤 클라크슨은 특유의 존재감으로 등장할 때마다 시선을 사로잡는다. 뉴스룸에서 벌어지는 취재 과정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디 캔터를 연기한 조 카잔은 자신이 진짜 궁금했던 내용은 원작 밖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탐사보도기자는 정보원과 만날 때 회의실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테이블 위에 녹음기는 어떻게 놓는지, 공책 혹은 노트북을 지니고 다니는지, 배낭에 무엇을 가지고 다니는지 등 기자 생활과 관련한 디테일이다. 관객은 캔터가 알아낸 취재 과정의 면면과 더불어 <뉴욕타임스>의 내부 공간도 엿볼 수 있다. 팬데믹이라는 특수 상황으로 <뉴욕타임스>가 재택 근무를 실시한 덕분에 <그녀가 말했다>는 <뉴욕타임스> 뉴스룸에서 촬영한 최초의 작품이 됐다.
#MeToo 다음 사람은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관객은 영화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지만 기자들이 겪는 고비마다 숨죽이며 사건을 따라가게 된다. 감독은 두 기자가 취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취재 과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기사를 발행하기까지 무엇이 필요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서스펜스를 구성했다. 거대한 악을 상대하는 수사 스릴러의 요소를 갖춘 이야기지만 연출도 연기도 과장은 없다. 마리아 슈레이더 감독은 “감정적인 요소를 짜내지 않기 위해 대상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제보자를 만나거나 가해자측 변호사와 협상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한 걸음 떨어져 유리창 너머로 지켜본 후 다가간다. 관객은 기자의 취재 과정에 조용히 동석하게 된다.
영화는 와인스틴의 얼굴을 노출하지 않을뿐더러 여성을 향한 어떤 폭력도 재연하지 않는다. 마리아 슈레이더 감독은 “사건의 진실은 생존자의 목소리와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어야만 했다”고 강조했다. 피해 여성들의 말을 경청하는 캔터와 투히의 얼굴에 오랜 시간 머무는 카메라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사건의 선정적 측면에 주목하는 대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여성들이 용기내고 감응하는 순간에 방점을 둔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 여성들은 하나같이 ‘다음 사람’을 떠올렸다. 내 자식 세대에는, 다음 사람에게는 같은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하나의 마음으로 용기를 내 증언했다. 영화 속 기사 위에서 클로즈업되는 한명 한명의 이름은 그들이 감내한 어려운 시간을 공유하는 관객에게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으로 전달된다.
기사가 보도된 다음날, 캔터와 투히에게 와인스틴을 고발하겠다는 여성들의 연락이 쏟아졌다. 동료들을 불러모아 연락처를 남긴 여성들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정도였다. 첫 보도에 언급된 애슐리 저드를 시작으로 안젤리나 졸리, 귀네스 팰트로, 레아 세두 등 배우들의 폭로도 뒤따랐다. 배우 얼리사 밀라노는 트위터에서 2006년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시작한 ‘미투 운동’을 다시 제안했다. “당신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거나 성희롱을 당했다면 주저하지 말고 트위터에 ‘미투’라고 써달라”는 그녀의 트윗은 전세계로 빠르게 확산됐다. #미투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수많은 여성들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말한 이후, 사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본인을 연기한 애슐리 저드
2017년 <뉴욕타임스>의 첫 보도 당시, 애슐리 저드는 기사에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도록 가장 먼저 허락했다. 보도 이후의 상황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때 그녀는 자신의 연기 경력을 걸고 진실을 밝히는 쪽을 택했다. 이런 그녀를 누가 대신 연기할 수 있을까. 1992년 데뷔해 이듬해 <루비 인 파라다이스>에서 주연을 맡았던 애슐리 저드는 <노마 진 앤드 마릴린> <더블 크라임> 등으로 주목받았다.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97년 하비 와인스틴은 업무상 미팅을 빙자해 그녀를 호텔로 불러 성추행했다. 영화에서 저드는 사건 이후 와인스틴이 자신의 캐스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밝히는데 실제로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 감독은 와인스틴에게 애슐리 저드를 캐스팅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저드는 영화에서 2017년의 자신을 연기한다. 마리아 슈레이더 감독은 “애슐리 저드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거의 현실과 가까워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