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돌아왔다. 2014년 <버드맨>, 2015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로 2년 연속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정점을 찍은 후 무려 7년 만의 복귀작이다.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이하 <바르도>)를 둘러싼 반응은 실로 흥미롭다. 이냐리투의 작가적 야심이 발휘된 대작이라는 평가와 자의식 과잉의 불친절한 실패작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쏟아졌다. 극명하게 갈라진 호불호의 목소리를 들은 뒤 이냐리투는 3시간에 가까운 영화를 재편집해 새로운 버전으로 내놓았다. 넷플릭스의 과감한 투자로 제작된 이 기묘하고 야심찬 프로젝트는 이냐리투의 자전적 기억이 반영된 사적인 고백과도 같다. 동시에 과거와 현재, 멕시코의 역사, 정치와 예술 등 논쟁적인 주제들을 중층적으로 녹여낸 현학적이고 심오한 작품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영화가 이냐리투의 최고작으로 기억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마땅히 이냐리투의 야심작으로 기록될 만하다. 오는 12월16일 넷플릭스 공개에 앞서 한달 전인 11월16일부터 극장에서 먼저 상영된 <바르도>의 성취와 한계를 살펴보았다. 두 세계를 배회하는 한 남자, 아니 영화의 운명에 대한 기이한 꿈. 명백한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되어야 마땅할 실패다.
헛되고 헛되다.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혼란스럽다. 꿈에서 있었던 일들은 초 단위로 빠르게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건들이 희미해질수록 반대로 어떤 감정과 느낌들은 고스란히 남는다. 제대로 정리되지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는 꿈은 과연 나의 꿈이 맞기는 한 걸까.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이야기이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세밀한 사건들은 알코올처럼 휘발되어 날아갈 때 반대로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인상들은 알알이 뭉쳐 묵직한 앙금처럼 가라앉는다. <바르도>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건 다시 재현하고 설명하지 못할 한바탕 꿈에서 깨는 것과 비슷하다. 무언가를 목격했는데 정확히 서술하는 건 어렵고 기억은 빠르게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남는 어떤 감흥들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무척 곤혹스럽다. 관객에게도 다가와 어떤 질문을 남기고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는 촉매라기보다는 창작자가 토해낸 의식의 덩어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바르도>는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사적 기억과 상념들을 영화라는 물질로 뭉쳐놓은 결과물이다. <바벨> <버드맨> <레버넌트> 등을 연출한 이냐리투 감독은 넷플릭스의 투자로 기회를 얻은 자신의 신작 <바르도>에서 이미지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장대한 모험을 시도한다. 이것이 사적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사적 경험이 일정 부분 투영되기 마련이고 작품은 작가의 창틀로 바라본 세계의 풍경이다. 다만 그 시도가 서사라는 최소한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이미지로 투사될 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접어든다.
삶도 영화도 한바탕 꿈이어라
화면에 불이 켜지면 허허벌판 사막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자가 비친다. 아니, 추락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과 멕시코 국경으로 짐작되는 황량한 사막에서 끊임없이 뛰고 있는 남자의 뜀박질은 점프인지 추락인지 헷갈린다. 남자는 하늘로 승천하고자 하지만 중력의 족쇄에 붙들려 끊임없이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어 무대는 갑자기 산부인과로 바뀐 후 한 남자가 등장하고 그의 아내가 출산을 한다. 그런데 의사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다. “아기가 다시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해요.” 이윽고 의사는 아기를 자궁 속으로 밀어넣는다. 아니면 의사의 말처럼 아기가 자궁 속으로 기어 들어간 걸까. 태어나는 걸 거부한 아이의 이미지와 국경의 사막에서 점프를 반복하는 남자의 그림자는 묘한 기시감과 함께 겹치는 듯하다. 황당하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난무하더니 드디어 장면이 전환되고 아기의 아버지인 남자 실베리오(다니엘 지메네스 카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멕시코 출신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실베리오는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해왔다. 어느 날 미국 저널리즘협회에서 수상한 실베리오는 잠깐 고국인 멕시코로 돌아가는데 그 과정이 달갑지만은 않다. 멕시코 친구들은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일군 실베리오의 성공을 시기하고 미국인들에게 실베리오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실베리오는 미국에서 딸 카밀라와 아들 로렌소를 낳았지만 아기 마테오를 잃은 아픈 기억도 있다. 장성한 아이들은 아직도 이방인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실베리오의 품을 벗어나 자신이 택한 삶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실베리오의 여정은 그리 복잡할 것이 없다. 하지만 영화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간 길을 잃고 헤맬 것이다. 길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다. 실베리오의 여정이 그의 경험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 기억과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정신없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이냐리투는 마치 서사와 인과관계의 사슬을 다 끊어버리기로 작정한 듯 이야기의 시간과 순서를 뒤섞는다. 비단 시간만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표현과 이미지들이 불쑥 삽입되고 뒤엉키면서 어디까지가 실베리오의 여정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어디가 과거이고 어디가 현재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엔딩 시퀀스에 이르기 전까지 관객은 혼란스러운 여정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이미지에 쉴 틈 없이 노출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폭력이다. 어떠한 정보와 설명 없이, 서사의 사슬에서 풀려나 날뛰는 이미지를 긴 시간 무작정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 이미지가 더할 나위 없이 호사스럽고, 우아하며, 아름답다는 점이다. 영화의 흐름에 집중하기 힘든 것과 별개로 시퀀스마다 펼쳐지는 이미지의 향연은 그야말로 화려한 미장센의 향연 그 자체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감흥만은 정확하게 쑤셔넣는, 기묘하고 환상적인 꿈. 꿈의 작동 방식을 그대로 스크린에 판화처럼 찍어낸다면 이런 그로테스크하고도 매혹적인 무늬가 만들어지는 걸까.
<바르도>는 사실 불친절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데 반해 조감도로 이야기 전체를 조망하고 나면 허탈할 정도로 내용은 단순하다. 제목인 바르도는 사람이 죽고 나면 죽음과 윤회 사이에서 49일간 잠시 머물고 가는 중간계를 칭하는 티베트 불교 용어다. 엔딩 시퀀스에 이르면 실베리오가 어떤 상태인지 밝혀진다. 실베리오는 현재 뇌졸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다. 영화는 앞뒤의 결말을 뒤집어놓았을 따름이다. 관객이 지금껏 목격한 이미지들은 실베리오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경험과 현실, 실베리오가 내내 겪었던 문제의식과 후회로 남은 사건들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 중이었을 따름이다. 얼핏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실은 감독만이 알 수 있는 작위로 꽉 채워진 이 기이한 여정은 제목 그대로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다. 실베리오의 후회와 혼란으로 채워졌다는 점에서 진실, 그리고 연대기 자체는 사실이 아니라 만들어진 무의식의 흐름이라는 점에서 거짓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르도>의 제목은 이렇게 수정될 수도 있다. ‘거짓된(허구의) 연대기를 거쳐 도달하는 약간의(수줍은) 진실’이라고.
경계를 가로지르는 과잉의 수사학
이토록 단순함에도 <바르도>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이 야심찬 연대기에는 현실과 의식(혹은 무의식), 두 세계 사이의 구분점이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 경계인으로 살았던 실베리오는 곧잘 자신의 작업에 대한 비판들을 듣는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아닌 실베리오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향한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든 것에 대해 미국인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실베리오는 억울하다. 자신은 미국 커뮤니티 안에 속해 있다고 느끼고 그 안의 문제들을 작품 속에 반영한 것인데 돌아오는 답은 여전히 이방인 취급이다. 이런 답답함과 억울함이 <바르도>에서는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일어났던 언젠가의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전투가 진행된다. 전투 장면은 이냐리투의 전작 <레버넌트>를 연상시킬 만큼 스펙터클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갑작스레 언젠가의 전투가 진행됐다가 사라지는 편집은 아무런 전조도 설명도 없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바르도>의 상당 부분은 감독만이 알 수 있을, 혹은 이냐리투를 잘 아는 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사적인 기록과 상징들로 가득하다. 영화는 현실과 의식, 두 세계를 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냐리투가 지나온 길이라는 제3의 세계까지 무작위로(정확히는 감독만이 이해하고 있을 작위로) 넘나든다. 당황스러운 게 당연하다. 어쩌면 그걸 바라고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냐리투 본인의 삶을 대리 체험해보라는 듯이.
<바르도>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에 대한 영화다. 이냐리투 본인, 그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극중 실베리오는 경계 위를 방황하는 인물이다. 그는 멕시코에서 태어나 멕시코를 사랑하지만 멕시코 정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저널리스트의 삶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넘어갔다. 내심 미국이 ‘돈에 환장한 나라’라고 경멸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미국을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멕시코에서도 미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미국 저널리즘 협회에서 준 상을 영광스러워하면서도 친한 친구가 진행하는 멕시코 토크쇼는 욕 먹을까 두려워 펑크를 내기도 한다.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헤맸던 실베리오의 생은 이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지나온 기억들을 되짚으며 헤맨다. 태어난 지 30분도 되지 않아 떠나보내야 했던 자식 마테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리운 아버지 등 자신과 관계된 여러 인물들이 던지는 질문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멕시코인으로 태어나 미국인으로 사는 삶은 어떠한가. 혹은 예술적 야망과 이미지의 착취 사이에 일말의 진실이 스며들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그동안 이냐리투가 해왔던 영화 작업과 비슷하다. 이냐리투는 스타일이 의도를 앞서고 알맹이 없는 시각적 쾌감과 예술적 허영에만 매달린다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다. <레버넌트>는 물론 <버드맨> 역시 과잉된 상징의 추구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바르도>는 이에 대한 극단적인 답변이기도 하다. 오프닝에서 남자=그림자=실베리오는 아무리 점프를 해봐도 결국 땅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수많은 질문과 후회를 마주한 뒤 나름의 매듭을 지운 후에야 집착을 벗어던지고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 하늘을 나는 것이 거짓이라면 허구를 창조하는 영화도 거짓이다. 다들 영화의 진실은 땅에 붙어 있어야 찾을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일부 미학자들은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포착하는 카메라의 숭고함이라고 말한다. 이냐리투는 거짓을 진실인 양 설득하기를 포기한다. 대신 더 힘차게 허구와 환상의 영역으로 날아오른다. 그리하여 실패하더라도, 거짓된 연대기로 기억되더라도, 끝내 추락하더라도 하늘로 날아오르려 안간힘을 쓴다. 이냐리투는 과잉된 이미지와 해체를 거부하는 상징의 덩어리를 던져놓고 슬며시 반문하는 것 같다. 영화야말로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라고. 그 뒤엔 아마도 이런 항변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거짓(이라고 쓰고 영화의 환상이라고 읽는 것)이 왜 나쁘냐고.
장대한 실패와 다시 없을 도전
<바르도>는 장대한 야심으로 가득한 도전이자 믿을 수 없을 만큼 얄팍한 실패다. 장단점이 이만큼 명확한 영화도 드물다. 무의식을 넘나드는 실베리오 영혼의 방황은 그야말로 현란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상상을 물질로 옮긴 듯한 생생한 비주얼과 상징과 의미로 꽉 찬 미장센은 그 자체로 개별 미술 작품을 보는 것처럼 호사스럽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기교를 퍼붓는 다리우스 콘쥐 촬영감독의 손길은 가히 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이냐리투가 전달하는 사유의 깊이는 매우 개인적이고 심지어 빈곤하다. 메시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도리어 메시지는 가득한데 그것이 반복적이고 지나치게 길다는 게 문제다. 마지막 20분의 엔딩 시퀀스에서 퍼즐처럼 짜맞추기 위함이라고 보기엔 140분 동안 지속되는 방황은 그저 장황할 따름이다. 그저 경계에 걸친 자로서 정체성의 갈등이 있었고, 힘들었다는 투정처럼 들리는 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지나치게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바르도>의 난점은 내러티브를 해체한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영화는 장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가 될 수 없다. 서사의 사슬을 끊어내고 상념과 이미지의 물질성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이야기로 돌아간다. 엔딩에서 실베리오는 그 모든 발버둥을 지켜본 뒤에야 죽음의 문을 열고 사막으로 걸어간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땅을 걸어가는 실베리오의 모습은 결국 이냐리투의 진심도 땅의 진실에 집착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처럼 보인다. 애초에 <바르도>는 과잉과 상징의 덩어리였기에 그는 차라리 하늘로 날아올랐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냐리투는 끝까지 이냐리투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알맹이가 빈약하더라도 최대한 화려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기교가 본질을 압도하여 그 자체가 본질이 되어버리는 기묘한 성과는 <바르도>에서 정점을 찍었다. 비록 환상과 허구의 세계에 끝까지 투신하지 못했을지라도 <바르도>는 그 자체로 장대한 야심과 과잉의 산물이다. 넷플릭스 자본으로 이토록 사적이고 불친절하며 호사스러운 일기장을 쓰는 일은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마치 과정이 기억에 남지 않는 꿈처럼 자의식으로 가득한 이미지의 파편들. 서사의 중력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매혹적인 장면. 당신의 동의와 이해조차 바라지 않는 이냐리투의 욕망만은 진실되고 진실되다.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에 반영된 이냐리투 전작의 흔적
실베리오의 무의식이 투영된 환상적인 장면들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전작들에서 그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단 실베리오는 미국 협회에서 상을 받는 멕시코 감독이라는 점에서 <버드맨>과 <레버넌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한 이냐리투의 분신이라 할 만하다. 한편 실베리오는 삶의 피로에 찌들어 회의에 젖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아모로스 페로스>(2000)의 엘 치포(에밀리오 에체바리아)와 닮았다. 조각난 장면들이 하나로 수렴되는 전체적인 서사 방향은 2006년작 <바벨>에서 이미 시도한 바 있다. 오프닝에서 허공에 떠오르는 그림자(혹은 추락하는 남자)는 <버드맨>에서 공중 부양하던 리건 톰슨(마이클 키턴)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실베리오의 영화는 칭찬도 받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원주민의 시체가 쌓여 있는 장면에서의 놀라운 미장센은 <레버넌트>의 롱테이크 시퀀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놀라운 시각적 충격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