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 메카스의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은 한밤중에 불길에 휩싸인 오스트리아 빈 도심의 광경으로 끝난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마지막 파트는 함부르크의 교외 지역에서 시작해(이곳은 메카스가 2차대전 당시에 갇혀 있던 강제 수용소가 위치한 지역이다) 그가 수용소 수감을 피하고자 떠나려던 빈으로 향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화의 마지막에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불리는 오래된 청과시장이 불타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리투아니아에서 촬영된 영상들이다. 리투아니아 시골 마을의 오래된 집을 배경으로, 메카스와 그의 동생이 25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만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천국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보여주는 작품”(율리우스 지즈)이라는 감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메카스의 고향에서 끝맺지 못한다.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함부르크와 빈에서, 끝내 오래된 장소가 소실돼버리는 순간을 마주한다. 건물이 불타는 장면에서 영화가 끝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불타버린 장소가 영화를 끝내는 조건이라는 뜻이다. 메카스는 이 영화에서 고향의 기억과 유년기를 말하는 자신을 ‘망명자’라고 부른다. 수십 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는 작업에서도 장소에 정착하지 못하는 영화의 비애감이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에 새겨져 있다.
<아마겟돈 타임>이라는 결정체
장소에 정착하지 못하는 영화의 운명은 제임스 그레이의 <아마겟돈 타임>이 환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는 가족이 전부 모인 식사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떠드는 동안, 친척 할머니는 프라하의 중고상점에서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훔친 컵을 발견했다고 화를 낸다. 두 형제의 아버지인 어빙(제레미 스트롱)은 그들의 소란을 듣다가 사레가 들려 콧물을 흘리고 씹고 있던 음식을 뱉는다. 폴(뱅크스 레페타)과 그의 형 테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크게 웃고 그릇에 담긴 음식을 바닥에 쏟는다. 그레이는 식사 장면을 빌미로 삼아,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원초적인 감정과 행동을 영화의 표면에 끌어들인다.
폴의 외할아버지 아론(앤서니 홉킨스)은 스파게티 면을 덜어주며 “피범벅인 벌레”를 먹으라고 농담을 건넨다. 잠들기 직전의 침실에서 아론은 그 농담의 기원을 설명해준다.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난민수용소에서 배급받은 스파게티를 피 묻은 벌레로 오해했다. 별뜻 없이 들려오는 사소한 농담은 우스꽝스러운 표면 아래 잔혹한 역사와 비참한 기억을 전제하고 있다. 아론은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의 후손이고, 그의 어머니는 영국으로 이주해 남편을 만나 자식을 낳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아론은 상점을 운영하던 그의 조부모가 그들의 딸 앞에서 살해당한 순간을 말해주면서 “과거를 절대 잊지 마라, 그들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가 전하는 말은 주문처럼 영화의 화면 내부를 붙잡는다. 이때부터 폴은 가족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웃지 못한다. 폴에게 있어 가족은 웃음을 터트리고 화를 내는 개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집단의 끈질긴 기록이자 구속이 된다.
영화의 중반부, 폴은 어머니인 에스더(앤 해서웨이)와 함께 할아버지와 만나기 위해 공원으로 간다. 자동차 유리창 너머로 벤치에 앉은 아론의 모습이 폴의 시선에 스쳐 지나간다. 두 사람은 약속한 장난감 로켓을 발사하기 위해 공원 벤치에 앉는다. 후경에는 우주선을 닮은 기하학적 건축물이 보인다. 로켓이 발사되면 폴은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낙하산을 향해 달려간다. 늙은 할아버지는 화면 끄트머리에 놓인 벤치에 앉아 아이를 바라본다. 운전석에 혼자 남은 어머니가 그들을 지켜본다. 아론이 말기 암을 진단받았고, 어머니는 그것을 폴에게 알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는 건 얼마 뒤의 일이다. 일순간 숨이 멎을 만큼 이 장면은 아름답다.
아이는 서서히 작아지고 할아버지는 멈춰 있다.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쳐 오른 로켓은 낙하산으로 바뀌어 천천히 추락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말하기 힘든 비애와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단지 아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더는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없으며 어머니가 체감하는 슬픔이 창문 바깥에 전달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후경으로 달려가고, 할아버지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멀리에 있다. 그렇게 풍경은 인물들에게서 멀어지고, 그들이 머무는 위치를 분리한다. 하지만 이 슬픔은 이중적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사라지는 시간을 이토록 탁월한 이미지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던 가족이 차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집에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밤이다.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 제목을 빌리면, 그들은 밤에 산다. 자동차 내부에서 그들은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을 지켜본다. 무심코 사라지는 풍경과 공간이 밤의 부드러운 감촉으로 스크린에 담긴다.
그러나 그 감촉은 지워지고 있다. 밤늦게 귀가한 폴을 기다리던 에스더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희가 내 희망이야. (...) 우리가 다 같이 여기 있잖아.” 물론 이 말은 정확히 반대의 결과로 영화를 이끈다. 아론의 죽음으로 가족을 지탱하던 구심점이 흔들리면서 희망은 훼손되고, 가족은 서서히 흩어질 것이다. 폴의 유년기는 아론이 속삭여준 과거를 돌아보면서, 급격하게 변모하는 현재의 풍경에 몸을 담그는 시간이다. 그 자리에서 그들의 밤은 퇴색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도착한 딜레마를 외면하는 <본즈 앤 올>의 후퇴
<아마겟돈 타임>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다른 개봉작을 경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을 먹는 인간들의 멜로드라마이자 이방인들의 성장영화로 분류되는 <본즈 앤 올>은 또한 미국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진부하고 평면적인 이미지의 조합으로 호들갑을 떠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본즈 앤 올>의 여정은 정적이고 신중하다. 밤거리의 풍경을 담아낸 아름다운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식인으로 삶을 영위하는 ‘이터’들에게 상속되는 혈연의 기록이다. 무의식적으로 식인을 저지른 매런(테일러 러셀)은 아버지에게서 버려진 뒤, 이 남다른 식성을 물려준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본즈 앤 올>은 피범벅이 되는 장면에 공을 들이지만, 정작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원으로서의 피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카메라에 잡히는 장소와 풍경을 계속 변경하면서 바깥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로드무비의 형식은 그런 맥락에서 필수적이다. 미국의 대지를 오가는 매런과 리(티모시 샬라메)의 여행은 숨겨진 과거, 정체성, 운명과 만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매런의 어머니는 두 팔이 잘린 모습으로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일찌감치 매런이 찾아올 것을 예상한 어머니는 15년 전에 매런에게 적어둔 편지를 건넨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의 내용은 단호하다. 사람들의 세상에 인간을 먹는 괴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짐승처럼 계속 사람을 먹거나 자살하거나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편지는 늦은 만남이 전해주는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저주를 매런에게 퍼붓는다. 물론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매런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매런의 어머니가 전해준 질문을 파고들었다면 <본즈 앤 올>은 상속되는 혈연의 기록에 관한 희귀한 탐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즈 앤 올>은 사람을 먹거나 자살하거나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터’의 딜레마를 집요하게 붙드는 대신,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극적 사건으로 플롯을 해결해버린다. 재회한 매런과 리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떠도는 것을 멈추고 한곳에 머물기로 한다. 그들의 삶은 타인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살하거나 정신병원에 갇히지 않는 형태로 지속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집에 침입하는 것은 그러나 이런 현실의 질문이 아니라 매런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식인의 규율을 가르쳐주던 장년 남성 설리(마크 라일런스)다. 설리는 매런의 집에 잠입해 그녀를 위협하고 아이처럼 품에 안긴다. 음험한 아버지처럼 돌아온 그는, 결국 친부에게서 버림받은 매런과 친부를 살해한 리의 손에 의해 칼에 찔리고 몸이 찢긴다.
설리는 단순한 악역이라기보다는 영화가 제시하는 미래의 한 가능성이다.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한곳에 정착하는 이터의 삶이 그와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지, 무엇보다 리와 설리가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은 멀리 있지 않다. 두 사람은 아버지를 먹은 자들이고, 설리가 매런에게 식인을 종용하며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는 것처럼, 리는 가정이 있는 남자를 죽인 뒤 그 사실을 몰랐다며 변명으로 일관한다. 설리는 윤리적으로 파산에 이른 초라한 아버지이지만, 리의 미래일 수 있다. 인간을 먹었다면 우리의 피와 몸에 누적된 책임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가능한 미래다. 하지만 영화는 이 난감한 문제를 통과하는 대신 설리의 침입에 리의 죽음이라는 결과로 대응하면서 남겨진 자들을 낭만화한다.
매런과 리의 삶을 삼켜버리는 끔찍한 비극이 결말에 배치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상대방을 모조리(‘본즈 앤 올’) 먹어 치우는 사랑으로 성급히 귀결된다. 관객은 그 결말에서 설리반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펼쳐지지 않은 시간에 안주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최후로 나누는 격렬한 몸짓과 감정에도 불구하고, <본즈 앤 올>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신음하는 연약한 영화적 초상화에 도달하지 못한다. 과거로부터 전해진 딜레마에 답하는 대신, 극단적인 사건이 일으킨 파장에 숨어 난점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매런과 리가 살던 빈집을 보여주는 결말의 장면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미국인의 방에는 거울이 걸려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기억과 유산이 현실의 삶에서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유년기의 내면적 체험과 과거의 기록은 프레임의 표면과 배후에 공존하며 하나의 이미지에 육중한 압력을 가한다. 끝나지 않은 역사와 폴의 충동적인 반응은 분리되지 않는다. 죽은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폴이 죠니에게 컴퓨터를 훔치자고 제안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제안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초반부의 식사 장면에서 어빙은 도시에 새로 지어진 다리를 설명하면서 “무게중심이 완벽해서 어떤 압력에도 버틴다”라고 말한다. 때마침 카메라는 식탁에 모인 가족들을 강박적인 대칭구도로 배치해 화면의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가족에게 주어진 역사의 흔적과 급격히 변형되는 현재의 압력은 이 안전한 구도에 내파를 일으킨다. 완벽한 무게중심은 이제 무너질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결코 갚을 수 없는 부채를 남겨둔다. 컴퓨터를 훔쳐 팔다가 체포된 폴과 죠니에게 경찰관이 말을 건넨다. “여기선 모두가 친구란다.” 죠니는 대답한다. “아저씨가 내 친구라면 왜 날 도와주지 않죠? 여기서 내 편은 나밖에 없어요.” 그의 대답은 경찰관의 신소리를 받아치는 것이지만, 그 말의 리액션으로 연결되는 것은 폴의 정면을 담은 숏이다. 죠니의 대답을 듣는 것은 폴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죽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처럼, 유치장의 문이 닫힌 뒤에도, 자동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남겨진 장소에 맴돌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다른 영화도 그렇지만 특히 <아마겟돈 타임>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마틴 스코세이지의 흔적은 특별하게 거론된다. 이민자 가족의 역사와 변형되는 국가의 풍경을 겹쳐두는 구조적 유사성에서 오는 연상이지만, <아마겟돈 타임>과 보다 내밀한 연관성을 갖는 장면은 구체적으로 스코세이지의 <성난 황소>에 있다. 복싱 챔피언에서 허접한 코미디언으로 전락한 제이크 라모타가 공연장 대기실 거울 앞에서 반복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이다. 스코세이지의 남자들에게 거울은 해소되지 않는 불안과 상흔을 가둬두는 장소다. 그들의 신체가 거울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면 그 불안과 상흔에 잠식당할 것이다. 그래서 스코세이지의 남자들은 끊임없이 거울에 모습을 비추고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그레이는 스코세이지의 ‘거울 앞에 선 남자’라는 초상을 은밀하게 변주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폴은 세 개로 분리된 거울에 얼굴을 비추고 무하마드 알리를 흉내 내며 주먹을 휘두른다. 이 장면 이후로도 <아마겟돈 타임>의 인물들은 몇 번이고 거울 혹은 유리창 앞에 선다. 거울 앞에서 주체의 불안과 상흔은 극복되지 않지만, 거울을 넘어서면 그것들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된다. 하지만 거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수 있을까? 제임스 그레이는 프레임 내부로 불분명한 형상들을 도입한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폴이 책상에 앉아 할아버지와 재회하는 순간이 그러하다. 폴은 환영처럼 나타난 아론의 목소리에 반응하지만, 유리 액자에 비친 반영을 통해 그의 뒤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들은 거울에 갇혀 불안과 상흔을 호소하는 데도 실패한 존재들이다. <아마겟돈 타임>에서 거울은 지워진 장소다. 우리는 그곳에 모습을 드리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지워진 장소들
마틴 스코세이지는 프리츠 랑의 후기작에서 “실험실의 작업을 지켜보듯,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세계가 작동한다는 것”을 관측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자동차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밤거리의 아름다움을 지나쳐가듯, 아이의 시각에서 변모하는 가족의 시간을 주시하는 <아마겟돈 타임>은 그와 유사한 느낌을 전한다. 온 가족이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모습은 이제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다. 가족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마을의 주택가를 바라보는 광경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들은 영화의 아름다움과 향수를 전하는 지극히 단순한 장면들이지만, 더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비어 있는 교실과 집이 트랙아웃으로 멀어지는 결말의 장면은 친밀한 장소들이 사라져 가는 상태로부터 폴의 현실이 분해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영화가 장소를 잃어버렸다는 피상적인 진단이 아니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거주할 장소를 잃었지만, 그것을 스크린에서 되찾았다.” 공간으로서의 스크린의 역량은 그런 현실의 파열을 감지하고 대체하는 것에 있다.
지난 6월 서울에서 열린 강연에서 요나스 메카스의 아들인 세바스찬 메카스는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이 사적으로 중요한 영화라고 언급하면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아버지가 강제로 떠나야 했던 낙원 같은 고향에서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현실에서 사라지고 없는 낙원이다.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은 그러므로 천국을 만나는 기쁨의 영화이지만, 더는 작동하지 않는 세계의 세부에 감춰진 비애감을 응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제임스 그레이가 작은 농담의 기원에서 역사의 깊은 어둠을 발견하고 아이의 방에 퍼트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겟돈 타임>에서 그레이는 그의 자전적 기록을 영화사의 한 부분에 기입하고 나아가 80년대라는 시기의 집단적 기억으로 전경화한다. 어쩌면 제임스 그레이는 폴 토마스 앤더슨과 더불어 영화에 담긴 풍경의 변화를 관측함으로써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고 국가에 새겨진 거대한 모순과 타협을 되새기는 미국영화의 마지막 작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