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3000년의 기다림’, 과장되고 화려하다. 욕망의 서사로 재구성한 천일야화
2023-01-04
글 : 김수영

서사학자 알리시아(틸다 스윈튼)는 인류의 모든 이야기에 관심이 있지만 정작 이야기 외엔 무관심한 사람이다. 가족도 욕망도 없이 홀로 지내는 삶에 적당히 만족감을 느끼는 알리시아는 이스탄불의 골동품 상점에서 신비로운 유리병을 발견한다. 호텔 스위트룸에서 유리병을 닦던 알리시아 앞에 거대한 몸집의 정령 지니(이드리스 엘바)가 나타난다. 유리병의 정령 지니는 알리시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빌라고 제안하지만 신중한 서사학자는 우연한 행운으로 소원을 비는 이야기들의 결말이 대부분 비극적이었다는 걸 기억해낸다. 주인의 세 가지 소원을 이뤄야만 자유의 몸이 되는 지니는 알리시아에게 소원을 보챈다. 깊은 사랑과 어리석은 갈망 때문에 두번이나 유리병에 갇히고 3000년 만에 세 번째 주인을 만난 지니는 알리시아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지 밀러 감독의 7년 만의 신작 <3000년의 기다림>은 A. S. 바이엇의 단편소설 <나이팅게일 눈 속의 정령>을 바탕으로 감독과 그의 딸 어거스타 고어가 다시 쓴 <천일야화>다. 유대교 전설 속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 고대 오스만제국의 신화 등을 배경으로 한번쯤 들어봄직한 이야기들이 시간과 장르를 초월해 흥미진진하게 엮인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거나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그 행위 자체로 또 다른 의미가 생성되고 이전에 없던 감흥을 경험한다는 데에서 <3000년의 기다림>은 신화와 우화, 종교와 역사까지 포괄해 스토리텔링이 가진 마법 같은 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 자체는 정교하지 않지만 비주얼은 압도적이다. 얼룩말 무늬의 기린, 마법으로 연주되는 악기, 거미로 변하는 사람의 머리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이미지가 눈을 사로잡는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바뀌는 의상과 색감 톤은 인간의 열망과 탐욕을 다채로운 색깔로 펼쳐낸다. 이야기 자체의 매혹보다는 시각적인 즐거움으로 충만하다.

틸다 스윈튼은 공감 능력은 없지만 이야기에 관한 열정으로 가득한 서사학자 알리시아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얼핏 지니의 청자에 불과해 보이지만 예민한 지성인 알리시아는 말 한마디로 지니를 기쁘게도 하고 때론 좌절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주인공이다. <토르> 시리즈에서 아스가르드의 문지기인 헤임달로 얼굴을 알린 이드리스 엘바는 판타지와 현실 세계 양쪽에 발 딛고 있는 지니를 그려냈다. 진중하지만 호기심 많고 대화를 사랑하는 정령은 카리스마부터 사랑스러움까지 다채로운 매력을 과시한다. 과학과 기술이 신화의 자리를 대체한 첨단의 시대, 조지 밀러는 현대의 알리시아 이야기까지 신화의 한장으로 밀어넣어 극중 ‘3000년의 기다림’이라는 또 하나의 우화를 완결 짓는다. 영화 중반 이후 새롭게 자각한 알리시아의 갈망과 지니의 갈망이 비로소 합해지는 동기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따라 엔딩에 이르기까지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조지 밀러의 우화 밖으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소원에 대한 이야기는 다 경고성 이야기예요. 해피 엔딩이 없죠. 웃긴 이야기마저 결말이 안 좋아요.”

세 가지 소원을 빌라는 제안을 거부하는 알리시아의 말. 서사학자는 3000년에 걸친 지니의 이야기를 통해 내면의 감정을 새롭게 알아차린다.

CHECK POINT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감독 타셈 싱, 2006)

부상당한 스턴트맨 로이는 사랑도 잃고 꿈도 잃고 병원에 누워 어린 소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알렉산더 대왕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다섯 전사의 예측 불허 모험담으로 흘러간다. 급기야 청자인 알렉산드리아가 이야기에 개입하면서 로이의 이야기는 시작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하는 영화라 보는 내내 눈이 즐거운 영화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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