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나는 내가 되는 꿈을 꾼다: 박혁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간을 꿈꾸는 소녀’
2023-01-12
글 : 김소미

1월11일 개봉하는 박혁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간을 꿈꾸는 소녀>는 4살 무렵부터 예지몽을 꾸고 타인의 미래를 알려주기 시작한 수진의 성장통을 담는다. 무려 7년여의 작업 기간 끝에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신작으로 공개된 작품이다. SBS <진실게임>, OBS <멜로다큐 가족> 등에 출연해 일찌감치 꼬마무당으로 이름을 알린 수진은 세간의 관심에 동반하는 편견과 침해를 몸소 경험한 이후 일체의 카메라 접촉을 거부하고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간다. 데뷔작 <춘희막이>를 후반작업 중이던 2015년에 충청남도 홍성의 깊은 산속을 찾으며 삼고초려한 박혁지 감독을 일상에 초대한 것은, 그러니 감독은 물론 수진 자신에게도 더 늦기 전에 운명과 대면하고자 한 결의의 표시였다. 그렇게 시작된 <시간을 꿈꾸는 소녀> 속 세속과 신비의 교차를 여기에 추려본다. 꿈꾸듯 여러 시간 사이를 방랑하는 영화의 장면들에 관해서는 박혁지 감독, 출연자 권수진씨가 나란히 앉아 그 틈새를 열어젖혀주었다.

박혁지 감독은 물리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슈퍼파워를 지닌 사람들에게 끌리는 관찰자다. 데뷔작 <춘희막이>의 주인공은 한때 하나의 남편을 공유했던 두 여자였으나 어느새 세간의 상상력을 넘어선 연대의 재능을 발휘해 한집에서 늙어가는 두 할머니들이다. <오 마이 파파>는 한국전쟁의 여파 속에 소년의 집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돌본 소 알로이시오(소재건) 신부에게서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고, <행복의 속도>는 해발 1500m의 오제 화원까지 짐을 지고 이동하는 두명의 ‘봇카’들이 서로에게 삶의 길을 터주는 방식을 고찰한다. 어떤 경우에나 박혁지의 카메라는 그들의 환경적, 직업적 특수성에 심취하기보다 운명의 개척자로 나선 이들에게도 공평히 허락된 인간사의 본질에 주목했다.

<시간을 꿈꾸는 소녀>가 직업 무속인과 평범한 대학원생이라는 기로에 선 인물의 삶에 좌표를 찍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무엇이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신음하는 동안 서서히 그 무엇이 되어간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원형이다. 절대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내내 코끼리를 생각하듯이 신과 함께 사는 삶을 살지 않으려 할수록 수진의 삶에서 신의 존재는 또렷해져만 간다. 평범한 동년배들이 ‘갓생’을 외치며 일상의 리추얼을 행할 때 수진은 신당에서 할머니를 따라 장군신을 모시며 무속의 의식을 행한다. 프로페셔널로서 규율을 실천하고 나면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나머지 시간도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평일에는 학과 대표를 할 정도로 대학 생활에 적극 참여하다가 주말이 되면 택시를 타고 산속으로 올라가는 이중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그러나 수진의 시간은 균형과 논리로 보기좋게 정리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박혁지 감독은 일찍이 한 사람의 내적 갈등을 뚜렷한 인과관계와 닫힌 결말로 정리하는 일이 필연적 실패를 동반하리라 짐작한 듯싶다. 수진이 이미 무속인으로 살아보기로 모종의 결단을 내린 시점에서 오프닝을 여는 <시간을 꿈꾸는 소녀>가 그 형식에서부터 발설하고 있는 바다. 영화는 별도의 내레이션이나 자막 없이 인물의 현재와 근과거, 그리고 7년 전의 10대 시절을 한 호흡에 꿈꾸듯 유영한다. 어떤 시간은 리얼타임으로 분주히 이어지고 또 어떤 시간은 그사이에 펼쳐진 아득한 공백을 짐작할 새도 주지 않은 채 태연하게 접붙어 있다. 괴리가 큰 두개의 정체성을 탐구한다는 점과도 맞물려 <시간을 꿈꾸는 소녀>의 비선형적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 꿈을 이룬다. 최대한 개입하지 않고 긴 시간 대상 옆에서 성실히 잠복하되 그렇게 수집한 조각을 스토리텔링의 재료로 가공하는 데 연연하지 않는 감독의 태도가 대상의 특질과 자연스럽게 공명한 결과다.

무당의 운명을 다루고 있지만 <시간을 꿈꾸는 소녀>는 박찬경 감독의 <만신>과 애니메이션 <무녀도>, 하물며 엔터테이닝 영화 <대무가> 역시 반응한 무속 세계의 매혹에 그다지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려 흥미로워진다. 샤머니즘보다 영화언어의 신비를 믿는 <시간을 꿈꾸는 소녀>를 지탱하는 것은 운명적 삶과 세속적 삶 사이의 갈등이라는 인간의 오래된 명제이다. “갖고 싶다고 가질 수도, 갖기 싫다고 안 가질 수도 없는 능력”을 받아들이고 “운명을 따르되 내 식대로 해석해보겠다”고 끝내 선언하는 수진에게서 몇번이나 자기를 비워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지혜를 엿본다. 꿈은 깨어졌다. 그러나 하나의 꿈에서 깨어났다고 해서 또다시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으므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불현듯 정신을 놓고 깊은 단잠에 빠져 있는 수진의 얼굴을 보여주며 끝맺는다. 영험한 무녀의 꿈과 욕망하는 20대의 꿈은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사진제공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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