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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메모리아’, ‘카메라-눈’ 이후 ‘사운드-눈’에 관한 단상
2023-01-18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는 놀라운 장면이 담겨 있다. 놀라움은 단지 감탄의 표현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자극에 의한 원초적 반응을 가리키는 말이다. <엉클 분미>에서 유령이 사람들 사이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공포영화에 맞먹는 서늘함을 지닌다. 다만 유령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여느 공포영화의 문법과 갈라진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엉클 분미>에서 유령은 생전 그대로의 모습을 하거나, 혹은 생전 그대로의 목소리로 나타나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유령과 어울려 대화하고 시선을 맞추며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나아가 인물이 복제된 듯 분화하는 순간도 있다. 외출을 준비하던 통(사크다 카에부아디)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유령이 방금 자신이 있었던 곳에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함을 목격한다. 이 장면은 섬뜩하고 놀라운 동시에 그가 출몰한 곳이 텔레비전 앞이기에, 매체에 영혼을 빼앗긴 존재의 클리셰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유령을 마주한 통은 유령에게 자리를 내어준 채, 쫓겨나는 모양새로 서둘러 퇴장한다. 유령의 표현과 이를 대하는 반응에 녹아든 은근한 유머는 놀라움의 대상을 친밀함의 대상으로 잠재시킨다.

위라세타쿤의 전작에서 놀라움이 이미지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메모리아>에서 놀라움은 단발의 소리에 압축된다. 아직 어두운 가운데 커튼이 드리운 창문과 그 앞에 잠든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러던 중 어딘가에서 둔탁하고 커다란 단발성 굉음이 들린다. 그때까지 실루엣만 보였던 제시카(틸다 스윈튼)가 몸을 일으킨다. 여느 영화라면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탐문했겠지만, <메모리아>는 정체를 드러내기를 유예한다. 소리의 원인이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소리의 반응체처럼 보이는 인물이 즉시 소리의 정체를 찾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제시카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살피는 대신 그저 천천히 움직인다. 카메라는 제시카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제시카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상으로 다시 등장할 때까지 제시카의 움직임과는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패닝한다. 이는 잠과 깨어남 사이의 혼곤한 상태를 표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유예의 동선을 보여준다.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방금 일어난 현상에 집중해보면 이 시퀀스는 어떤 소리가 정지된 이미지를 깨웠음을 보여준다. 곧 사운드가 이미지를 깨운다. 사운드가 이미지에 움직임을 불어넣는다는 설정은 이미지에 비해 덜 중시되어온 사운드를 전면화하며, 그와 동시에 비가시적인 대상인 사운드를 가시화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사운드는 흡사 바람의 작용이 그렇듯 스스로 움직이는 대신 무언가를 움직이게 만든다. 소리에 영향을 받는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다. 다음 숏에서 한밤중 주차된 차들이 동시에 경고음을 작동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차량 경고음은 사람이나 사물에 의한 접촉이 발생했을 때 작동되지만, 여기에서 원인 제공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앞선 장면에 이어져 소리가 단순히 제시카의 내면에 울리는 폐쇄적인 소리가 아니라 편재한 대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란한 자동차 경고등의 움직임 사이로 조그맣고 빨간 빛이 포착된다. 그 빛은 소리가 울릴 때 나타났다가 소리의 중단과 함께 사라진다.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미약한 그 빛은 의도적으로 삽입된 어떤 장치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포착된 현상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지의 존재를 자극하는 영화에서 발견된 두개의 빛은 사소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작은 신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두개의 나란한 작은 빛은 <엉클 분미>에서 정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던 존재가 빛내던 빨갛고 둥근 두눈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분명한 존재의 형상은 아니지만, 두개의 점만으로 존재를 떠올리는 일은 위라세타쿤의 영화라면 용인될 만한 상상이다. 실제로는 영화에 접속하려고 애쓰는 성실한 관객이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잡게 되는 연약한 지푸라기에 불과할 테지만 말이다.

주의! 녹음 중

관객을 마주 보는 위치에 놓인 두개의 붉은 점이 관객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가정할 때, 그 시선은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숏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그 시선의 모양은 <엉클 분미> 속 유령의 시선과 유사하지만, 이를 중심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영화 속 장면은 <열대병>의 시선이다. <열대병>의 오프닝 크레딧이 제시되는 사이, 그 오른편에는 배우(반롭 롬노이)가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는 장면이 롱테이크로 담긴다. 이 시퀀스는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난폭하게 교차하는 시퀀스 다음 등장했기에 더욱 각별하다. 시선의 대상에서 소외된, 혹은 소외되어야만 하는 카메라가 비로소 시선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마치 카메라가 눈길을 주고받는 은밀한 대상인 것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마주 보며 흘깃거리기를 반복한다. 그 시선은 카메라 뒤의 감독을 가리키거나 그 너머의 관객을 바라본다. 혹은 영화에 등장하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 반(半)존재 혹은 중간 존재를 예고하는 대상으로 카메라를 보여준다.

반면 <메모리아>의 붉은 점은 중간 존재보다 더 모호하고, 비인칭적이다. 붉은 점을 녹음 중이거나 촬영 중임을 표시하는 신호라고 이해해본다면, 두개의 빨간 눈은 카메라나 붐마이크를 대체한 영화 제작 현장의 표식이다. <메모리아>에서 녹음실은 영화 제작 현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장소인데, 영화는 녹음이 이뤄지는 부스 안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믹싱이 이뤄지는 바깥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게다가 그곳은 출입이 통제된 곳이 아니라 원한다면 열린 문으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다. 이러한 설정은 위라세타쿤이 견지해온 영화 만들기 방식을 암시한다. 감독의 초기작인 <정오의 낯선 물체>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며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영화 만들기의 기원에 관한 느슨한 반영일 수 있다.

모호한 붉은빛은 그 자체로 사운드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운드적 시선처럼 보인다. 소리의 정체나 본질을 찾는 대신, 소리의 부피와 질감을 묘사해야 하는 제시카의 상황은 사운드의 미묘함과 포착의 난감함을 드러낸다. 에르난(후안 파블로 우레고)이 소리를 들려주면 제시카는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묘사하고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된다. 이러한 작업은 영화를 위한 사운드를 찾는 과정과 일치한다.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 역시 영화 <메모리아>의 음향효과의 일부임을 염두에 둘 때, 영화 제작 과정을 역으로 보여주는 작업처럼도 보인다.

이때 관객은 제시카와 함께 소리를 체험한 바 있기 때문에 소리를 기억하는 일에 관한 자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했던 소리는 방금 들린 믹싱된 음향과 얼마나 유사한가. 그 소리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목적은 단지 사운드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기 위함이 아니다. 영화는 비슷한 소리를 탐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소리를 뒤섞는 데로 나아간다. 이는 관객에게 필요한 사운드 이후의 시간을 암시한다. 에르난은 제시카가 묘사한 소리를 찾아주는 데서 나아가 그 소리를 혼합해 만든 미지의 음악을 제시카에게 들려준다. 이 음악은 에르난의 휴대전화와 블루투스로 연결된 헤드셋으로 제시카에게만 송출되기 때문에 화면 바깥의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제시카에게 들리는 모든 소리를 관객이 듣는다는 가정은 위태롭게 된다. 이는 제시카만 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이 담긴 레스토랑 시퀀스와 대조된다. 두 장면을 번갈아 생각할 때, 관객은 제시카에게 들리는 소리를 듣거나 현장음을 듣는다는 가정 모두 애매해진다. 그렇다면 소리의 진원지는 화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화면 바깥, 관객과 가까운 어딘가일 수 있다. 제시카가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잠든 기억의 소리를 듣는 안테나임이 드러나는 후반부를 염두에 둔다면 터무니없는 가정만은 아니다. 제시카가 듣는 굉음은 내부의 소리가 아니라 외부의 소리다. 다만 그 소리는 제시카에게만 들린다.

사운드의 짧은 존재론

인식의 차원에서 존재를 생각할 때, 있음과 없음의 상태는 빛과 연관된다. 빛을 받았을 때는 보이는 것이 빛을 받지 않았을 때는 시야에서 감춰진다. 비존재는 눈에 잠시 보이지 않을 뿐 늘 존재하는 상태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존재의 상태를 소리의 차원에서 풀이해보면 이미지의 차원에서 가능한 영속을 사운드의 차원에 적용하기 어려움을 알게 된다. 사운드의 지속을 상상하기보다 난감한 건, 지속을 재현하는 일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존재한다면 듣는 이에게 고문이 된다. 사운드의 존재 양식은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밤벌레 소리로 풀이된다. 밤벌레 소리는 시야가 제한될 때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리의 차원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밤벌레는 소리의 지속이 아닌 중단의 순간에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엉클 분미>에서 전기채로 벌레를 잡는 장면에서 ‘타다닥’ 하고 울리는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내는 단발의 비명과도 같다. 소리와 함께 존재감이 드러나는 동시에 대상은 사라진다. 이는 음성 존재가 지닌 가혹한 운명을 요약한다. 사운드는 존재하는 동시에 곧 사라져야 한다.

<메모리아>에서 소리는 소음의 상태(단발의 굉음)이거나 음악의 상태(에르난의 제시카만을 위한 음악, 합주실의 음악)로 거칠게 분류된다. 영속하는 존재를 나타내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요소는 낮과 밤이라는 자연현상과 조명의 켜고 끔이라는 외부 작용에 의해서다. 여기에 더해 인간의 생리현상에 의한 잠이라는 현상이 존재를 켜고 끄는 중요한 매개 변수가 된다. 특히 잠(혹은 잠에 준하는 행위)은 영속하는 사운드를 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더 각별하다. 잠은 위라세타쿤이 작품을 통해 애정을 드러내온 행위인데, <메모리아>는 잠에서 깨는 장면으로 시작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영화는 소리에 의해 깨어난 제시카의 여정을 통해 사운드가 영속할 수 있는 다른 차원과 조건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억하려는 존재의 의지 혹은 기억하는 상태이다. 제시카가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에르난을 만나는 장면 이후 제시카의 모든 행위는 소리를 기억하기 위한 여정과 행위로 번역된다. 그중 제시카가 오래된 유골의 두뇌 부위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왜 눈이나 입의 구멍이 아닌 두뇌의 구멍인가. 사운드로 촉발된 영화를 상상할 때 중요한 지점은 받아들이는 반응체, 즉 두뇌이다. 악귀를 보내기 위한 풍습으로 새겨진 구멍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잠재된 이야기에 관한 상상을 촉발하듯 사운드는 부재로 인해 기억에 저장된다.

사운드를 중심에 두고 영화를 생각하는 일은 곧 관객을 중심에 두고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가 ‘키노 아이’ 이론을 주창하고 이를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 녹여내며 카메라를 든 촬영자로서의 정체성과 카메라가 새롭게 연 시각적 가능성을 예찬했을 때, 카메라가 지닌 하나의 눈은 그에 대응할 또 다른 눈을 줄곧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는 사운드나 관객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아닐지라도 사운드적 인식이 곧 관객을 중심에 둔 영화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시간성과 허구

사운드와 이미지의 자리를 이리저리 바꿔보면서 기존의 인식을 재고하게 한 영화는 영화의 현장성 혹은 실시간성에 관한 의문을 숙제처럼 남겨둔다. 롱테이크가 지닌 실시간성은 영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다. 롱테이크는 진실을 보존하는 기법이었지만, 이음매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잘게 이어 붙여 하나의 숏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법인 원 컨티뉴어스 숏이 그렇듯 기술을 통해 롱테이크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롱테이크는 사실성을 담보하는 기법보다 허구의 기법에 가깝다. 그러나 진실의 기법으로서의 롱테이크는 완전히 폐기되진 않았다. 대신 질문이 남았다. 무엇을, 왜 롱테이크로 보여줄 것인가. 혹은 롱테이크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위라세타쿤은 믿을 수 없는 두개의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하나는 눈을 뜬 채 잠든 사람의 얼굴을 그가 깨어날 때까지 보여준다. 에르난은 제시카가 만난 사운드 엔지니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다. 혹은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이미지적 분신의 차원 대신, 이름과 호명의 차원에서의 분신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혹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유령이나 신처럼 존재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에르난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눈을 뜬 채 순식간에 잠이 들고, 카메라는 눈뜬 채 잠든 얼굴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 얼굴은 숨도 쉬지 않고 미동도 없기 때문에 죽었거나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 숏은 한 사람이 눈을 뜨고 정지해 있기에는 너무도 오래 지속되기에 놀라움과 함께 의심이 피어오른다. 물론 그 시간은 신기한 장면을 순진하게 믿을 수 없게 된 관객이 자신을 들여다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이와 비슷한 감정은 숲에 가려져 보호색을 띤 비행 물체가 막 이륙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순간에도 겪게 된다. 그래픽 이미지임이 분명한 비행체가 추진력을 얻기 위해 기체를 내뿜었을 때 울리던 육중한 소리는 제시카와 관객이 오랫동안 찾아온 이명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지만, 발견의 기쁨이나 정체를 알고 난 뒤의 허탈감보다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게 된다. 비행물체가 실제의 풍경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도넛 모양의 기체 잔여물이 천천히 옅어지며 파장이 잦아들 때, 그 지속은 관객의 믿음을 시험하는 카운트다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낯선 비행체라는 도달점은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사람들이 이어 들려준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가 결국 외계인의 이야기에 도달했음을 기억하게 한다. 이야기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과장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총체로서 외계를 상상하는 것일 테다. 이야기가 나아가고 이미지가 따라잡으며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서, 허구가 실제를 비웃는 조작의 시대다.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쯤은 간단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럴듯한 이미지로 현혹하는 시대에 저항하는 방식은 그럴듯하지 않은 이미지를 새기는 것이 아닐까. 영화 속 비행체가 터무니없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것이 영화가 지닌 과오나 실수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용인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그럴듯하지 않은 이미지를 발굴하고 실험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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