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한 수업에서 학생들과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함께 읽었다. 네번에 걸쳐 나눠 읽으면서 매번 책의 내용과 관련된 토론 주제를 던져주었는데 그중 “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물을 버리고 도망쳤을까? 흉측한 외모 때문이었을까?”라는 질문도 있었다. 나의 예상과 달리 (‘흉측한 외모 때문이었을까?’라고 질문을 덧붙였기 때문에 ‘단순히 외모 때문은 아니’라는 상투적인 답이 나올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괴물’처럼 생긴 창조물의 외모를 탓했다.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버림받은 것도 이후 많은 인간들에 의해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도 다 그의 괴물 같은 외모 때문이라고 봤다. 소설의 중반 이후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비슷한 배우자를 만들어달라고 하는 대목에서 몇몇 학생들은 자신이 괴물이었다면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꾸어달라는 요구를 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여러 SF영화에 등장하는 복제인간이나 사이보그 혹은 안드로이드, 인공지능 로봇 등을 ‘괴물’과 비교하는 시간에도 어김없이 외모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를테면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와 괴물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를 외모라고 꼽는 식이다. “아니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학생들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럼요, 외모 중요합니다!” 나의 답이었다.
겉모습은 중요하다. 나는 외모가 내면의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이거나 추함을 감추는 포장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결국 진짜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외모 역시 또 다른 본질이고 정수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저자 김원영은 “외모라는 실체에 관하여”(인문잡지 <한편> 9호)라는 글에서 “...나의 겉모습은, 불분명한 내적 가치나 ‘영혼’ 따위 이전에 존재하는 ‘나’라는 실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쓴 바 있다. 난 그의 말이 인간이 만든 존재, 기술적 창조물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외모는 반드시 미추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성별, 연령, 인종, 장애 등 다양한 차이를 가진 몸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인간이 아닌 존재의 몸일 수도 있다.
한때 여러 국내외 기관들로 하여금 앞다투어 자동화 기계에 대체되는 직업 순위를 조사하게 했던 ‘알파고’는 중국 남성 바둑 기사의 몸을 빌려서 이세돌을 상대했고, “나의 첫 AI 친구”가 되겠다며 등장했다가 혐오 발언과 성희롱 등으로 논란이 되었던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는 20대 여성의 얼굴을 가졌다. 노인 돌봄로봇으로 각광받고 있는 가상 손주 ‘효돌이’와 ‘효순이’는 귀여운 어린 남녀 아이의 모습이다. 모델이나 인플루언서 등의 역할을 하는 디지털 휴먼 역시 대개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즘 내가 주목하고 있는 괴물은 챗지피티(ChatGPT)이다. 챗지피티는 최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초거대 인공지능 챗봇이다. 사용자의 주문에 따라 척척 글을 써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며 찬사와 우려를 동시에 자아내고 있는 인공지능 챗봇. 이 괴물은 과연 어떤 외모를 갖게 될까? 혹은 사람들은 이 괴물의 몸을 어떻게 상상하게 될까? 아니 어떠한 외형도 없이 혹은 몸이 상상되지 않고 인공지능이 인간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