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유령이 되어버린 스파이를 기억하라 : 이혜영 감독의 ‘유령’
2023-01-19
글 : 송경원

유능한 스파이는 기억되지 않는 스파이다. 성공한 첩보 작전이라면 응당 정체를 들키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아야 하는 일이라고 해서 기억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건 아니다. 얼핏 결과는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기억되지 않아도 좋다는 결의와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해영 감독의 <유령>은 첩보, 액션, 서스펜스 등 흥미진진한 장르적 문법을 빌려 이 메우기 힘든 간극을 넘나든다. 1933년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항일 조직 흑색단의 무장독립운동을 다루는 영화 <유령>은 제목 그대로 유령 같은 스파이의 활약으로 문을 연다.

항일 조직 흑색단은 상하이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지만 꺾이지 않는 저항의 의지로 조선에 새로 부임하는 총독의 암살을 계획 중이다. 그 중심에 누구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파이 ‘유령’이 있다. ‘유령’의 활약에 힘입은 흑색단 행동대원 난영(이솔)은 총독이 조선에 건너온 날 첫 번째 암살을 시도하지만 안타깝게 실패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유령이 존재하는 한 암살의 위협은 끝나지 않는다. 이에 새로 부임한 경호대장 다카무라 카이토(박해수)는 조선총독부까지 침입해 있는 유령을 색출하기 위한 덫을 친다. 카이토는 총독의 동선을 알고 있던 용의자 다섯명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흑색단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다섯명의 용의자가 유령으로 의심받으며 벼랑 끝 외딴 호텔에 끌려와 감금당한다.

밀실 첩보극에서 액션 누아르물로

마이지아 작가의 소설 <풍성>(風聲)을 원작으로 한 <유령>의 출발은 밀실 추리 첩보물을 표방한다. 고급스럽지만 밀폐된 공간에 갇힌 다섯명의 인물 사이에서 피어나는 긴장감은 추리 스릴러 영화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구성의 핵심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면면이다.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인 무라야마 쥰지(설경구)는 일본 명문가의 7대손이자 엘리트 군인이지만 모종의 이유로 좌천된 상태다. 경무국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쥰지는 유령을 잡아 다시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총독부 정무총감의 직속 비서 유리코(박소담)는 조선인임에도 도발적인 매력을 무기 삼아 비서 자리를 꿰찬 야심가다. 당한 건 반드시 되갚는, 거침없고 당당한 성격이다. 통신과 천은호 계장(서현우)은 암호 해독 전문가로 깔끔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다. 총독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인 박차경(이하늬)은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전임 총독에게 비행기를 선물할 정도의 재력가 집안의 딸이지만 명예나 돈보다 소중한 것을 품고 사는 인물이다.

한정된 공간, 다섯명의 개성 넘치는 용의자 등 잘 짜인 게임판처럼 보이지만 <유령>은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출발을 제외하곤 원작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초중반 첩보물을 표방한 영화는 추리보다 돌진하는 액션과 활극에 공을 들인다. 이해영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영화다. 머리를 쓰는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눈이 즐겁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액션, 그리고 캐릭터 무비에 가깝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갔던 인물들의 사연이 드러나고 뜨겁게 부딪치며 의외의 연대를 이어나가는 것으로 관객을 홀린다고 해도 좋겠다. <유령>은 추리, 첩보 장르의 클리셰를 활용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를 파격적으로 부순다.

액션과 미술의 시너지

일련의 파괴적인 쾌감의 핵심에는 두개의 기둥이 서 있다. 하나는 1930년대라는 시공간의 매력이다.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사회상과 근대 문물의 화려한 개화가 아우러진 기묘한 매혹의 시대다. 지금의 을지로에 해당하는 황금정 거리에는 이름 그대로 화려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다. 이야기의 주 무대가 되는 벼랑 끝에 자리한 하도호텔 역시 들어서자마다 화사한 치장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고급스러운 공간이다. 동시에 시대의 이면을 상징하듯 호텔의 어두운 공간이 드러날 때마다 섬뜩하고 기이한 긴장감을 안긴다. 이해영 감독은 흑백의 시대에 화려한 원색을 입혀 입체적으로 되살린다. 여기에 인물들 사이의 숨겨진 사연과 묘한 관계가 더해질수록 영화 역시 입체적으로 변한다. 중반 이후 그간 구축했던 것들을 부서뜨리며 격돌하는 액션은 그야말로 역동적인 쾌감 한가운데로 관객을 안내한다. 부딪치고 쏘고 터트리는 다이내믹한 액션은 세밀하고 꼼꼼한 미술과 어우러져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에서 이미 진가를 발휘한 바 있는 이해영 감독의 미감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위력을 발휘한다. 고급스럽고 화려하고 화사할수록 그것이 부서질 때의 쾌감도 증폭되는 셈이다.

매혹과 혼돈의 시대, 생사를 걸고 절박하게 돌파했던 이들의 거침없는 몸부림을 거쳐 유령은 더이상 투명한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스파이는 기억되지 않아야 하지만 영화 속 스파이는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그 파멸과 추락이 아름답다. 어쩌면 영화이기에 가능한 전복적이고 위험한 상상. 위험하기에 더 매력적인 <유령>은 영화가 허락한 장르적 쾌감을 활용하여 실패와 좌절의 기억을 끝내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로 복원시킨다. 아슬아슬하게 위험하고 더할 나위 없이 화사하며 예상외의 연대 끝에 돌진하는 액션이 주는 쾌감이 상상 이상으로 짜릿하다.

*이어지는 기사에 <유령> 이해영 감독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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