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유령’ 미술·의상·분장·무술감독이 말하는 제작기①
2023-01-26
글 : 이자연
스타일리시한 한국형 스파이영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비가 거세게 내리는 어느 밤, 한 우산 아래 차경과 난영(이솜)이 마주친 장면. 차갑고 차분한 차경의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 단조로운 버건디 톤의 의상을 활용했다.

1933년 일제강점기 경성. 조선총독부에 새로 부임한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는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이 조선총독부에 잠식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무라야마 쥰지(설경구),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 박차경(이하늬), 정무총감 직속 비서 유리코(박소담), 암호 해독 담당 천은호 계장(서현우), 통신과 직원 백호(김동희). 그의 임무는 이 다섯 용의자로부터 유령을 찾아내는 것. 첩자의 정체를 의심하고 추리하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담아내기 위해 이해영 감독은 이들을 호텔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몰아넣었다.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적 폐쇄성은 다양한 캐릭터간의 긴장을 팽팽하게 고조시키고, 해방을 꿈꾸는 유령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격추시킨다. 벼랑 끝에 선 서양식 호텔은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지만 6인의 경계와 사투, 불신과 추궁으로 완전한 대비를 이룬다. 김보묵 미술감독, 함현주 의상감독, 김현정 분장감독, 허명행 무술감독과 함께 <유령>을 완성하기까지 거쳐온 미술적 구도를 되짚어봤다.

고증과 상상의 적절한 배합으로 구현한 일제강점기 풍경

<유령>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책임진 김보묵 미술감독은 고증을 바탕으로 경성의 시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1937년에 발행된 <대경성사진첩>을 참고했다. “자료를 통해 1930년대 문화와 생활상 등을 확인해보니 이 시기에 서양식 가옥과 생활 방식이 생각보다 더 보편화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국적인 건축 디자인을 거리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이것이 일본이 대외적으로 꾸리고 싶었던 경성의 겉모습이었으리라 추측했다. 표면적으로 호화로운 이미지가 두드러질수록 속으로 곪아가는 민족의 한을 대비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김보묵 미술감독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 속에서 민중과 새로운 융합을 이루는 문화적 변화를 그려내고자 했고, 당시 경성으로 넘어온 르네상스 양식과 고딕 양식의 건물, 아르데코 스타일의 장식 등을 영화 곳곳에 설계했다. 이러한 면모가 가장 집약적으로 반영된 공간이 바로 호텔이다. 기하학적인 패턴, 반복되는 상승감, 높은 층고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아르데코 양식을 부각했고,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대에 화려한 사치를 누리던 최고위층의 장소로서의 자격을 내세웠다.

호텔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건 바로 로비다. 건물에 들어서는 첫 공간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시각적 위압감을 안겨주는 게 중요한 과제였다. “호텔의 첫인상인 만큼 로비는 설계 단계부터 고민이 많았다. 주철 양식으로 된 기둥 위를 보면 투명한 창 하나가 있다. 거기서 그림자가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어 로비의 미장센을 완성하고자 했다. 로비 디자인을 먼저 한 뒤 거기서 연계하여 각 인물의 방을 고안했기 때문에 결국 호텔 디자인은 로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미술팀은 누군가 언제든 뭉칠 수도 흩어질 수도 있는 광장 역할의 공간을 꾸리며 영화 속 6인의 긴장되는 공모와 연대를 펼칠 수 있게 했다.

호텔 로비에 놓인 분수. 김보묵 미술감독의 의견에 따라, 나비의 자유로움과 생존 의지, 같은 듯 다른 각자의 고유성을 드러내어 항일 운동의 의미를 더했다.

특히 로비 중심에 놓인 분수는 영화의 메시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항일운동을 상상했을 때 김보묵 미술감독은 나비를 떠올렸다. 나비는 먹이사슬에서 최하위 그룹에 속하지만 개체 수가 많고 불규칙적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나비마다 조금씩 다른 패턴을 갖기에, 개체별로 비슷해 보이지만 각자의 고유성을 지닌다. 무엇보다 한쪽 날개를 잃어도 남은 날개 하나로 끝까지 날아가려는 특성은 꿋꿋하고 숭고한 독립정신과 닮아 보였다. 그렇게 <유령>은 나비의 특징인 데칼코마니 문양이나 나비 이미지를 하나의 이스터에그처럼 영화 곳곳에 슬며시 녹여냈다. 책, 파티션, 만화경 등 다양한 소품에서 나비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분수 또한 그렇다. 거대한 분수에 나비 날개를 조각해 분수대 부근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상황들이 나비의 희미하고 강인한 날갯짓처럼 비치도록 조성했다.

섬세한 실내장식으로 호텔의 웅장하고 호화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했지만 지하에 숨겨진 고문실은 이 건물의 음침함과 어두운 이면을 고백한다. 이는 김보묵 미술감독이 일제 치하의 치욕스러움을 공간구조적으로 반영한 결과다. “조선총독부가 멋진 건물도 짓고 도로도 정갈하게 다듬었으니, 누군가는 이 문화적 번영에 대해 일제강점기가 남긴 이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변화와 달리 이것은 궁극적으로 민족의 끈을 끊어놓는 행위와 같다. 아름다운 호텔 아래 고문실을 숨겨놓았듯, 이들의 행위가 얼마나 교묘하고 음침한지 공간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쥰지의 호텔 방. 적이 많은 쥰지의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창을 통해 누가 침입할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커튼을 활용했다.

<유령>의 모든 프로덕션 디자인이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다섯명의 용의자가 암호문을 기록하고 해독하는 데 필요한 소품과 세트는 온전히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특히 통신과의 풍경을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는 조형된 상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에 대해 김보묵 미술감독은 “통신부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체계부터 업무 순서, 소품 등 모두 제작팀이 기획해 만들어낸 것”이라며 과정을 설명했다. “당시 통신 장비는 오직 한 회선으로만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공간마다 연결하는 전화회선이 무수히 많았을 거라 짐작했다. 따라서 이를 관할할 관리자가 필요했을 테고, 수신자가 기록을 마치면 다른 직원이 그 기록을 고위직에게 전달할 거라는 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암호를 해독하는 천은호 계장의 업무를 은밀하고 흥미롭게 조명해야 했다. 그래서 돋보기가 움직이며 숨겨진 글자를 찾아내는 등 여러 장비를 활용하는 모습을 통해 암호 해독 과정을 퍼포먼스처럼 담아냈다.”

사진제공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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