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3000년의 기다림’, 홈통의 시간
2023-02-01
글 : 홍수정 (영화평론가)

<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의 매혹에 대해 떠드는 적당한 범작으로 취급받다 잊히고 있는 것 같다. 내게는 이런 평가를 움직일 만한 힘도, 의욕도 없다. 다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본 뒤부터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그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호흡하듯 이야기하는 정령의 마음으로. 그 장면은 최고의 장면 뒤에 나온다. 지니(이드리스 엘바)의 이야기에 감명한 알리테아(틸다 스윈튼)는 첫 번째 소원을 말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를 원해요. 둘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확인하듯 하룻밤을 보낸다. 피어나는 붉은 증기. 반짝이는 검은 밤. 영화의 하이라이트임을 직감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미지.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몽환적이었던 지난 밤과 다르게 지나치게 선명하고 또렷한 얼굴. 그것은 간밤의 열기와 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채로 티없이 투명한 아침을 맞이했을 때의 민망함을 상기시킨다. 환상에서 일상으로의 아찔한 낙하. 하지만 알리테아는 (내 기분은 아랑곳않고) 평온한 표정으로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한다. 뜨거운 물을 받은 탓인가. 욕실이 온통 증기로 가득 찼다. 그 사이에서 말간 얼굴의 알리테아가 허공을 보며 속삭인다. 자신의 연인이 된 지니에게 전하는 사랑의 밀어. 하지만 카메라는 그 말에 반응하는 지니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상기된 알리테아의 얼굴에서 끝나는 묘한 시퀀스. 이 장면, 이 순간에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의 동공이 떨리던 것을 잊기 힘들다(이 장면을 편의상 ‘장면1’이라 하겠다).

믿음과 기다림

이 장면이 왜 그리도 좋은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순간을 꿰뚫는 정서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불안. 어떠한 불안인가? 밤의 사랑이, 기적 같은 시간이 사실은 한낱 꿈이 아닐까 의심할 때 몸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 아름다워서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그 이미지가 사실은 여자의 상상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그녀에게 그리도 행복한 시간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불길한 감정이다.

하지만 사실 장면1이 좋은 이유는 불안의 정서 때문이 아니라, 그걸 딛고 이어지는 일련의 순간들 때문이다. 알리테아는 지니와의 재회를 믿으며 런던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그와 다시 만난다. 물론 그사이 카메라는 종종 호리병의 시점에서 알리테아를 바라보며, 지니가 그 안에서 그녀를 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지니의 육신이 보이지 않을 때 영화에 드리우는 모종의 불안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 시간을 지탱하는 것은 지니와의 만남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알리테아의 모습이다. 비록 지니가 스크린에 없고 그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아도, 그의 존재를 믿는 알리테아의 단단한 믿음과 기다림이 있기에 영화는 무너지지 않고 지속된다.

비슷한 장면이 또 있다. 알리테아가 퇴근한 어느 날 집 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 먼지 같은 것이, 반짝이는 것들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알리테아는 사라진 지니를 찾아 집 안을 돌아다닌다. 지하실을 향할 때 불안은 최고조가 되지만, 그녀는 곧 지니를 찾는다. 이 장면들은 지니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그럼에도 찾아내겠다는 알리테아의 의지로 지속된다(이 부분을 ‘장면2’라고 하겠다).

장면1과 장면2에서 주목할 것은 영화가 지니의 존재감을 증기나 먼지처럼 흩어지는 미세 입자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지니가 이야기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를 ‘이야기’ 자체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들은 이야기의 연약함을 포착한다고 볼 수 있다. 어디에나 있지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으며 쉽게 흩어지고 바스라지는 이야기의 태생적인 연약함 말이다.

지니가 사라졌을 때, 그가 해주던 연약한 이야기들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쩐지 내게 만화의 ‘홈통’을 연상시킨다. 홈통은 만화에서 칸과 칸 사이 비어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비록 텅 비어 있지만 홈통은 매력적이다. 그것은 다음 칸이 이어지기 전까지 독자가 견뎌야 하는 공백이다. 독자는 다음 칸이, 다음 이야기가 오리라는 믿음으로 이 간극을 건넌다. 내게는 허공을 바라보며 지니를 기다리는 알리테아의 시간이 홈통으로 느껴진다. 다음 이야기를 위한 공백. 이야기 사이를 메우는 공허하고도 포근한 여백. 다른 이야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과 기다림으로 지속되는 간극의 시간.

홈통 같은 장면은 마지막에 한번 더 등장한다. 언덕 위의 알리테아는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지니를 발견한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눈을 뜨면 지니가 앞에 있다. 이 간단한 카운트는 남자가 다가오는 연속적인 시간을 절단해, 마법같이 도약하는 순간으로 바꿔놓는다. 3초의 공백과 불안. 그 순간을 견디는 믿음과 기다림. 다시 마법처럼 이어지는 이야기.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쉽다. 지니는 주변의 소년이 갖고 놀던 공을 발로 차서 돌려준다. 그 순간 공이 전봇대를 촐싹 맞게 오가다가 소년에게 돌아간다. 이 장면은 지니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소모된다. 그러나 앞선 장면들이 그의 존재를 둘러싼 불안과 믿음을 얼마나 아름답게 풀어냈는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없어도 될 사족이다. 관객이 마지막에 안고 가야 할 생각의 짐을 주제 넘게 빼앗아 없애버리고 만다. 그 짐이 실은 선물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래서 나는 영화의 진정한 엔딩을 다른 장면에서 찾고 싶다. 알리테아가 세 번째 소원을 빌고 난 뒤, 그의 품에 안겨 쉬던 그 장면. 둘의 고독이 하나가 된 때. 알리테아가 빌었던 첫 번째 소원은 돌고 돌아 마침내 실현된다. 이때 그녀의 뺨 위에 떨어지는 불그스레한 빛은 지니로부터 번진 것일까. 증기. 먼지. 빛. 사랑. 이야기. 여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거쳐 이 장면은 우리에게 도착한다.

먼지와 증기 그리고 빛

<3000년의 기다림>은 단순히 이야기의 탄생과 영속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이야기가 멈추는 순간의 불안을 고백하면서도 그 순간을 지탱하는 믿음과 기다림, 그리고 마침내 되살아나 영원한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에 대해 속삭이는 영화다. 그리고 이것이 <매드맥스> 시리즈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재현하던 조지 밀러의 영화라면 감회가 색다르다. 영화는 환상적인 이미지와의 짜릿한 접촉 뒤에 이어지는 오랜 믿음과 기다림을 통해 비로소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는 것만 같다. 나는 이 영화가 갈망으로 쓰여지는 이야기이기보다는, 그 사이를 채우는 먼지와 증기로, 그 후에 도착하는 불그스레한 빛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글을 쓰며 마침내 깨닫는다. 욕실에 있던 알리테아의 말간 얼굴이 그토록 잊히지 않았던 이유. 이제는 삶의 많은 순간이 화려한 이야기보다는 막막한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음을 아는 나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홈통을 건너는 내게 새로운 이야기가 찾아오지 않을까. 부른 적 없는 지니를 기다리며 눈을 감아본다.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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