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추모] 故 배우 윤정희(1944~2023)
2023-02-09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시처럼 영화처럼

배우 윤정희는 1960, 70년대 한국영화의 아이콘이었다. 등장하자마자 그녀는 ‘여배우 트로이카’의 일원이 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그녀의 대표작이 이창동의 <시>(2010)로 기억된다는 사실은 놀랍다. 한 시대 특정 장르의 이상적인 표식이었던 한 여배우의 얼굴에서 현대 아트하우스영화의 인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배우 윤정희가 1월19일, 프랑스 뱅센의 자택에서 만 78살로 영면에 들었다.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발표로 현지 시간 오후 5시경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졌다. 그리고 지난 30일 장례 미사 후 그녀의 유해는 인근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지난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서 한국영화사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얼굴을 기억하고자 한다.

다작의 시대에 연기 색깔을 갖춰간

<만무방>

윤정희의 첫 주연작은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1967)이었다. 당시 1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 합격하며 그녀는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 영화는 1967년 관객 동원 1위로 기록되며 신인배우에게 기회를 줬다. 작품의 성공으로 윤정희는 제6회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활발한 활동의 기반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이 파악하는 그녀의 출연작 수는 280편이 넘는다. 유실된 초기작을 고려하면 전체 필모그래피는 300편을 훌쩍 넘는다. 특히 데뷔 무렵의 자료가 다수 유실되었는데, 매해 적게는 30편에서 많게는 50여편까지 60년대 말과 70년대 초기에 그녀는 집중적으로 활동했다.초기작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는 단연 김수용의 <안개> (1967)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원작 삼은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하인숙 캐릭터를 연기한다. 신성일이 연기하는 속물적인 도시 남자 윤기준의 눈으로 바라보는 인숙은 아름답지만 영악한 인물로, 안개 자욱한 지방 소도시에서 현대인의 자기혐오적 근성을 자극하는 캐릭터다. 만일 <헤어질 결심>(2022)에 열광한 관객이라면, 박찬욱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충분히 흥미로울 것이다. 김수용과 윤정희 콤비는 이후에도 꾸준히 많은 작품을 함께했다. <까치소리>(1967), <맨발의 영광>(1968), <순애보> (1968), <일본인>(1968), <동경 특파원>(1968), <주차장>(1969),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1970), <옥합을 깨뜨릴 때>(1971), <미스리>(1971), <작은 꿈이 꽃필 때>(1972), <딸부자집>(1973), <내일은 진실>(1975), <극락조>(1975), <화려한 외출>(1977), <야행>(1977), <화조>(1978), <여수>(1978), <삐에로와 국화>(1982), <저녁에 우는 새> (1982) 등 두 사람은 한국영화사의 한면을 함께 채워갔다.

김승옥의 연출 데뷔작인 <감자>(1968)에서 복녀를 연기했던 윤정희는, 이후 최하원의 두 번째 연출작인 <독짓는 늙은이>(1969)에서 또다시 욕망의 구체화된 형상을 연기한다. 사실 그녀의 연약하고도 조화로운 이목구비는, 드라마의 콘트라스트를 강조할 만큼 강렬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여성의 한’과 같은 집단적 트라우마의 역사를 드러내기 가장 적합한 배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독짓는 늙은이>에서 보여준 윤정희의 연기력은 스스로가 충분히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보인다. 그녀는 다양한 작품에 대한 욕망이 있는 배우였고, 이를 실천했다. 이후에도 열정적으로 연출자가 요구하는 감정의 아이콘으로서, 그녀는 매력적인 피사체의 잠재력을 드러냈다. 가혹하고 사실적인 정서의 전달이 아니라 이상주의적 환상을 전달하는 능동적인 비주체로서 이 여배우는 움직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정진우의 <석화촌>(1972) 같은 영화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석화촌>

한편, 윤정희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개성 있는 배역은 신상옥과의 협업에서 탄생했다. <내시>(1968), <장한몽>(1969), <이조 여인 잔혹사>(1969), <효녀 심청>(1972), <궁녀>(1972), <삼일천하>(1973) 같은 영화에서 윤정희는 주연으로 출연했고, 대다수가 시대극이었다. 아마도 신상옥 감독은 배우 윤정희의 얼굴에서 단아한 한국적 미를 읽었던 것 같다. 특히 <효녀 심청>과 <궁녀>에서 그녀는 극을 이끌며 주제와 맞물리며 시너지를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에서 발견되는 연약한 아름다움은 연출자가 만들어낸 강렬한 상황과 만나며 더 또렷해졌다. 에로틱한 상황이 아님에도 과격하고 촉각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는, 오롯이 배우의 공로처럼 보였다. <궁녀>를 통해 윤정희는 제19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최하원의 <무녀도>(1972) 역시 비슷한 맥락의 작업이었다. 모화 캐릭터를 통해서 윤정희는 서정적이고 폭력적인 열정의 표본을 구현해냈다.

그렇다고 해서 당대 관객에게 윤정희가 고전이나 시대극에 어울리는 얼굴로만 각인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데뷔부터 꾸준히 ‘모던한 여성 캐릭터’에 더 가깝게 인식되었다. 일종의 뮤지컬 희극이라 할 수 있는 <그리움은 가슴마다>(1967)가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주제가 <그리움은 가슴마다>를 남진과 함께 부르면서 탤런트적 재능을 뽐낸다. <애인교실>(1973) 같은 사실적인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공허한 현대인을 연기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이 가진 스타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러한 배역은 어쩌면 ‘실패한 이상주의자’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얼굴을 통해 관객은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진부함을 잊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한국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자연주의적 연약함을 그녀의 캐릭터는 보여주고 있었다.

왕성한 작품 출연도가 급격하게 낮아진 것은 1973년 5월 이후부터였다. 공식적인 은퇴는 아니었지만,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고 발표하면서 윤정희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일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결혼과 함께 사실상 은퇴한 문희나 남정임과 달리,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1973년 12월에 윤정희는 김수용의 <야행>(1977)을 촬영하러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후에도 방학 등의 기간을 활용해서 촬영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결과 <자유부인 81>(1981)이나 <위기의 여자>(1987) 등 중기의 대표작들을 완성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2000년대 이전 그녀의 마지막 영화는 <만무방>(1994)이다. 이 영화로 윤정희는 대종상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국내외의 인정을 받으며 오랜 배우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후 16년 만에 그녀는 <시>로 다시 관객과 만났다. 이창동의 <시>는 여러모로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처럼 보였다. <만무방>의 마지막 장면, 모든 것을 잃고 홀로 선 여자의 얼굴에 보인 시대의 고요함을 우리는 <시>에서 다시 경험한다. 비판적이기보다 감성적으로, 그 얼굴의 사색은 관객의 것이 된다.

이창동의 <시>와 말년의 윤정희

<시>

사실 이창동의 영화가 지닌 낭만주의적 감성의 힘은 묘하게 이 여배우와 잘 맞아떨어진다. 이창동은 혁신을 추구하는 연출자이기보다, 항상 본질을 꿰뚫는 현실주의자다. 그의 영화는 사회적 폭력의 원인을 세심하게 찾아서 하락하는 어둠의 절망을 스크린 속 현실에 드러낸다. 영화 <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미자가 지닌 비극의 원인은 순전히 외부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극중 미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어린 손자의 잘못으로 죄인이 된다. 애초에 발견이 불가능한 최초의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서 이 인물은 고군분투한다. 이처럼 무기력하고 순수한 희생양에 관객은 몰입했다. 죄책감의 전이를 경험했다. 순수하고 도덕적인 죄의 표상을 드러내는 데 있어 윤정희만큼 적합한 배우는 없었다. 맑고 투명하게 나이 든 그녀의 얼굴은, 예술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거울이 되었다.

개인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몽상, 어쩌면 그녀만큼 진실한 감정으로 이를 스크린에 비춘 예술가는 없었을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시간의 아름다움, 이는 만들어지기보다 태어난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시>에 등장하는 <아네스의 노래>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린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떠난 그녀를 상기하며 영화의 한 구절을 읊조린다. 현실과 뒤섞여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보이지 않는 진실의 흔적이, 어느 여배우의 연기를 통해 발현된다. 그녀가 만들어낸 부드러움의 소용돌이가, 긴 아름다움의 거친 움직임 아래 잠든 예술의 심연을 들추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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