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이스는 트위터의 실시간 음성 대화 기능입니다. ‘배동미·남선우의 TGV’는 개봉을 앞둔 신작 영화의 창작자들과 함께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스페이스는 실시간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https://twitter.com/cine21_editor/status/1627685644855287808)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대화들
카페에서 시나리오 작업 중인 김덕중 감독에게 흥미로운 대화가 들려온다. 귀는 열려 있으니 대화 내용을 얼추 다 알아들을 수 있다. 가만 들어보니 대화 속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경쟁심이 여실하게 느껴진다. 김덕중 감독은 이런 순간들에 흥미를 느껴 몇몇 대화를 메모했더랬다. 옆 테이블의 대화를 듣는 느낌으로 영화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그는 “아예 대화를 컨셉으로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실제 대화를 보고 듣는 것 같아 피식피식 웃다가도 뜨끔하게 만드는 영화 <컨버세이션>은 이렇게 탄생했다.
#롱테이크 속 주도권 잡기
찬바람이 부는 겨울, 아늑해 보이는 은영(조은지)의 아파트에서 세 여성이 모여서 담소를 나눈다. 대화의 주인공은 20대 후반 파리에서 함께 유학했던 은영, 명숙(김소이), 다혜(송은지). 먼저 운을 뗀 명숙은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인민박 사장의 으스대는 태도를 고깝게 묘사한 뒤 유학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다. 반면 은영은 결혼 생활의 허무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다른 친구들이 이야기를 할라치면 “잠깐만 들어봐”라고 막은 뒤 한참이나 자기 감정을 쏟아내야 직성이 풀릴 지경이다. 상대의 대사를 자르고 연기를 이어가는 호흡에 대해 조은지 배우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어떤 은밀한 싸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주문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두 친구 사이에 앉은 다혜는 주도권을 잡으려 숨을 습습 들이마시지만 번번이 끼어들기에 실패한다. 김덕중 감독은 송은지 배우에게 “말하기 전 숨을 들이마시는 한국인의 특징”을 넌지시 알려주고 급기야 샹송을 틀게 했다. 자신이 말을 못할 바에야 “모두 말을 못하게” 만드는 다혜의 전술이다.
#프랑스어 대사로 살아남기
파리 시절을 추억하며 프랑스어로 말해보자고 제안한 세 친구.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마주 보니 웃음부터 터진다. 이럴 땐 술 한잔씩 걸치면 프랑스어도 술술이다. 김소이 배우는 많은 양의 프랑스어 대사를 노래처럼 달달 외워가며 소화했다. 영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자로 유명한 그이지만 “이미 외국어로 과부하”됐다고 느껴 “프랑스어를 뇌에 주입시키는 게 두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영화에서 프랑스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송은지 배우는 외국어고등학교 재학 시절 프랑스어를 깊이 공부했던 터라 “비교적 편안하게 프랑스어 대사를 할 수 있었다”고. 김소이의 추천으로 본 프랑스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를 통해 프랑스어 감각을 되살린 덕도 컸다.
#플리커, 고정 카메라, 그리고 앰비언트
세 여성의 이야기가 끝나면 남성들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남성 캐릭터들간의 연결 고리는 곽진무 배우가 연기한 대명이다. 아는 동생 승진(박종환)과 필재(곽민규)를 불러모으는 대명은 ‘사람 좋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물이지만, 곽진무 배우는 대명이 반복하는 “오늘 자고 가”라는 대사에서 외로움을 읽어냈다. 전등이 고장 나 발생하는 ‘플리커’(빛이 지속적으로 깜박이는 현상-편집자)조차 “언제든지 소멸돼도 이상하지 않은 외로운 대명”을 드러내는 장치로 보였다. 김덕중 감독은 고정 카메라로 세 남성의 대화를 담아내는데 “다중 대화 속에서 서로 어떤 관계인지 드러내고, 또 말들은 어떻게 흩어지는지, 누가 누구에게 더 집중하고 있는지에 대해 보고 싶었”기에 보통의 숏/리버스숏 구성 대신 풀숏을 택했다. 그는 “롱테이크지만 숏에 긴장감을 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배우들의 연기, 여러 가지 디테일이 잘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고대했다. 그렇게 낚아챈 마법 같은 숏은 승진과 필재가 유모차를 끌면서 나누는 대화 신. 계획에 없었던 음악이 녹음된 장면이다. 대화가 끝나는 순간 공원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너무나 절묘해 영화에 산뜻한 리듬을 더한다.
#달걀과 녹차로 표현한 마음
여성 셋, 남성 셋의 대화를 마친 김덕중 감독은 남녀 캐릭터 한명씩을 꺼내와 영화의 마지막 대화 시퀀스를 엮었다. 영화의 문을 닫는 은영과 승진은 카페, 극장, 산을 오가며 긴 대화를 나눈다. 카페에서 은영은 커피를 빨리 마시는 벌칙을 수행하고, 영화관에선 승진에게 팝콘을 소리내 먹지 말라고 타박하는데, 소품들이 눈에 띈다. 조은지 배우는 “지금 생각해보니 소품들이 은영의 감정 같다”면서 “급하게 마시는 커피는 이 관계를 빨리 정리하고픈 마음, 영화관에서 승진에게 팝콘을 녹여 먹으라고 말한 건 관계의 속도를 천천히 만들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석했다. 또 엔딩에서 등산을 간 은영과 승진이 아웅다웅하면서 아주 조금 남은 녹차를 나눠 마시는 장면을 두고는 “두 사람이 천천히 나눠 마시던 녹차가 끝을 다했을 때 ‘이 관계가 어떻게 정리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덕중 감독은 조은지 배우의 해석에 만족해하는 한편 “승진이 삶은 달걀을 먹으면서 시작하는 숏”이기 때문에 “열 테이크를 찍으면 달걀 10개를 먹어야” 했던 박종환 배우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