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결산
2023-03-10
글 : 한주연 (베를린 통신원)
황금곰상은 <아다망 위에서> 니콜라 필리베르 감독
<아다망 위에서>의 니콜라 필리베르 감독(왼쪽에서 두 번째)이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영화제는 축제라기보다 놀라움을 선사하는 곳이다!” 지난 2월16일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 2월16~26일)의 출발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한 말이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은 니콜라 필리베르 감독에게 돌아갔다. 파리 센강 물 위에 떠 있는 정신질환 치료기관 ‘아다망’의 환자들과 치료사를 포커스 삼은 다큐멘터리 <아다망 위에서>(On the Adamant)를 만든 공로다. 당사자조차 “미친 것 아니냐”며 놀라움을 표했다. 또 은곰상 주연연기상이 <2만종의 벌들>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소년의 섬세한 감정선을 보였던 8살 최연소 배우 소피아 오테로에게 돌아간 일도 이례적이다. 그 밖의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독일영화가 강세였고 엇비슷한 수준에서 각기 개성을 자랑하는 아트하우스영화에 골고루 상이 돌아갔다. 성소수자를 연기한 배우들이 나란히 은곰상 주연연기상과 조연연기상을 차지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아다망 위에서>는 영화제의 근본 화두를 건드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정신질환 치료기관인 아다망에선 정신질환자들이 미술, 음악, 예술 활동을 하고 토론을 하거나 커피를 마신다. 카메라는 관객에게 별다른 코멘트 없이 이들의 말과 표정을 전해주며 편견 없이 그들을 받아들일 것을 설득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다. 영화 속 환자들이 그린 그림이나 들려주는 음악이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예술의 전부다. 대부분의 현지 언론은 이번 황금곰상 작품이 수상에 합당한가에 대해 의아해한다. 그런데 독일 일간 <타츠>는 이번 황금곰상 선정에 대해 “세련된 해결”이라고 논평했다. 왜냐하면 경쟁부문에 나온 나머지 18편의 아트하우스영화들이 우열을 가릴 것 없이 엇비슷한 수준의 평작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후 규제 없이 진행된 첫 영화제라서 현지 언론의 기대는 사뭇 컸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평작이 대부분이었다.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영화제의 전반적 약세는 독일영화의 강세를 뜻한다”고 썼다. 경쟁부문에 오른 총 5편이 독일영화였고, 그중 3편이 수상했다. 이들 세명 모두 베를린파로 알려진 감독들이다.

독일영화의 강세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어파이어>에 심사위원대상이 돌아간 것에 대해선 마땅한 수상이라며 기뻐하는 분위기다. 페촐트 감독은 최근 몇년 동안 베를린영화제에서 <트랜짓>(2018)과 <운디네>(2020)를 선보이며 호평받았지만 <운디네>로 파울라 베어가 최고연기상을 수상한 데 그쳤기 때문이다. ‘시적 비극 코미디’(<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어파이어>는 주인공이 여름에 친구와 바닷가 별장에 소설을 쓰려고 갔다가 겪는 일들을 가벼운 터치로 그렸다. 여름휴가 분위기에 코미디영화와 공포영화 요소가 모두 있다. 편견을 깨는 반전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소설을 쓴다고 폼 잡고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주인공과 부지런하고 친절한 여자주인공 사이에 긴장이 감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다가오는 산불을 감지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자기중심적인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 경쟁부문 최고의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앙겔라 샤넬레크의 <뮤직>은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극도의 거리감과 모호함으로 점철됐다. 오이디푸스 신화처럼 수수게끼를 풀듯 따라가야 한다. 황량한 그리스 섬 풍경과 느린 화면의 움직임으로 관객은 인물의 행동과 관계를 짐작만 할 뿐이다. 게다가 음악은 중반부쯤 처음 나온다. 일간 <베를리너 차이퉁>은 “샤넬레크의 예술적이고 사실적인 화면을 통해 인간의 영원한 고통이 배어나온다”고 썼다.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의 누아르영화 <틸 디 엔드 오브 더 나이트>에서 트랜스 여성을 연기한 테아 에레는 최고조연연기상을 받았다. 범죄물과 멜로드라마 장르를 넘나들며 진실과 거짓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마약조직을 파헤치기 위해 파견된 형사 로버트와 마약전범 트랜스 여성인 레니는 연인 관계를 연기하기로 설정되었지만 이들의 연기가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이들이 다가가는 마약조직의 우두머리와의 관계에서도 우정과 사랑과 배신의 경계가 아슬아슬하다. 마초 성향의 게이 로버트와 게이였던 트랜스 여성 레니의 사랑 이야기는 기묘하다.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으로 영화제에 초청받은 변성현 감독과 배우 전도연, 김시아가 레드 카펫에 섰다.

타인의 입장 되어보고 이해하기

경쟁부문작 중 상호이해, 존중, 친절, 배려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눈에 띄었다. 한국계 감독인 셀린 송의 <전생>과 장률의 <섀도리스 타워>가 바로 그런 영화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작가다. 셀린 송의 <전생>에선 상대방의 과거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심도 깊은 관계를 볼 수 있고 <섀도리스 타워>에서도 주인공이 누구에게나 예의와 거리를 갖추고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를 부각한다. 롤프 드 히어의 디스토피아 SF <서바이벌 오브 카인드니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도 관계와 이해에 중점을 둔 작품이다.

셀린 송의 <전생>은 영화제 내내 <스크린 데일리>에서 3.6점으로 선두를 달렸지만 수상엔 실패했다.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였기 때문에 그럴 거라 짐작된다. 베를린영화제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자질은 월드 프리미어다. 영화는 감독이 실제 겪은 자전적 이야기를 다뤘다. 셀린 송은 초등학생 때 부모와 캐나다로 이민 가서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 좋아했던 나영과 해성은 어른이 되어서도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를 찾고 인터넷으로 교류한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살다가 해성이 문득 뉴욕에 나영을 만나러 간다. 아내의 첫사랑 스토리를 잘 알고 있는 나영의 남편도 이 상황을 감내해야 한다. 이 셋이 자아내는 팽팽한 긴장감에 유머가 녹아 있다. 과거의 나와 이별해야 하는 해성과 나영의 내적 혼란과 슬픔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영화는 베를린영화제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은 영화로 1년 안에 유수의 영화제를 제패할 것”이라고 점쳤다.

한편 장률 감독의 <섀도리스 타워>의 주인공은 맛집 칼럼을 쓰는 이혼한 홀아비 작가다. 이야기는 주인공의 가족, ‘썸’을 타는 중인 젊은 동료 사진작가 등 주변 인물과의 여러 관계를 통해 대화와 일상에서 주저하는 지식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주인공의 여정은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 찾기로 귀결된다. 관객은 생략된 장면과 대사, 롱테이크를 통해 주인공의 공감과 이해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다. <버라이어티>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언제든지 멈춰 세우는 복잡하게 얽혀 있 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고 위로를 얻는다”고 평했다.

숀 펜의 <슈퍼파워>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황금명예곰상

베를린영화제는 동시에 세 마리 토끼 잡기를 꿈꾼다. 첫째는 수준 높은 작가주의영화로 가득 찬 경쟁부문, 둘째는 레드 카펫을 장식해줄 할리우드의 별들, 셋째는 대중의 호응이다. 일단 두 마리는 잡았다. 경쟁부문 수준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레드 카펫을 빛냈고, 3만2천개 최대 티켓 판매로 대중을 영화관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

실제 하이라이트는 스페셜 갈라에서 선보인 숀 펜과 아론 카우프만의 <슈퍼파워>였다. 숀 펜은 2019년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원래 배우였던 것에 착안하여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 일정이 미뤄졌다가 인터뷰날 전쟁이 터졌다. 베를린영화제 개막식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화상으로 참여했다. 숀 펜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현장에서 진실을 찾아 보여줬다. 바로 우크라이나의 단결이었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의 미국적 관점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라고 했다. 또 하나 빛나는 순간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황금명예곰상 수상이었다. 76살의 노장 스필버그의 회고전에서 회고작 및 최근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가 베를린 스크린에 올랐다. 그는 “베를린에서 명예상을 받는 이 순간이 내 삶의 최고 순간”이라며 “팬데믹을 거치며 내 개인적 이야기를 할 용기를 얻었다”고 신작을 소개했다. 개막작인 리베카 밀러 감독의 <쉬 케임 투 미>에 출연한 앤 해서웨이, <TAR 타르>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자를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 <세네카>의 존 말코비치 등 베를린은 매일 적어도 하루에 1명의 할리우드 스타를 레드 카펫에서 맞이했다.

트레이드마크인 정치적 모양새도 잘 갖췄다. 우크라이나와 연대하는 우크라이나 관련 영화가 수많은 부문에 포진했다. 인카운터스 부문의 <이스턴 프론트>를 비롯해서 단편부문, 파노라마, 포럼, 제너레이션 부문에 총 7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이란 민주화 지지와 연대의 상징으로 심사위원단에 프랑스에 거주 중인 이란의 여배우 골시프테 파라하니가 위촉됐다.

경쟁부문 주연배우상(은곰상)은 영화 <2만종의 벌들>에 출연한 8살 스페인 배우 소피아 오테로에게 돌아가며, 영화제 최연소 수상 기록을 세웠다.

베를린영화제는 공사 중

축제 장소 주위를 둘러보니 2020년에 문을 닫았던, 2년 예정으로 공사에 들어갔던 쇼핑몰 아케이드가 문을 열었다. 점포의 반은 개업을 준비 중이고 반은 영업 중이다. 매년 티켓 판매로 장사진을 이루던 진풍경은 사라지고 영화제 기념품 판매대만 눈에 띈다. 모든 티켓 판매는 인터넷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를리너팔라스트 근처 포츠다머 광장 주위가 온통 공사판이다. 베를린영화제의 은유적 실사판이다. 팬데믹이 끝나고 과연 영화산업은 부흥할 것인가. 이 시대의 영화와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이번 베를린영화제도 영화의 참신성은 차치하더라도 수많은 토론과 생각 거리를 던져준다.

제73회 황금곰 축제가 끝났다. 이번 수상 메시지는 분명하다. 소수자와 공감하라. 편견을 버려라. 그게 평화의 고리다

취재진 앞에서 황금곰상 트로피를 들어 보이는 니콜라 필리베르 감독.

*이어지는 기사에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어파이어>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한국계 감독의 화제작 <전생> 셀린 송 감독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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