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는 <그사세> 대본집에서 신(scene)을 나누고 번호를 붙이는 법, 내레이션 기호([N]) 등 대본집 용어를 습득했다. 회당 20~30분짜리 드라마의 “호흡이 궁금해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빌어먹을 세상 따위>를 보면서 대사를 직접 컴퓨터로 받아썼다./p>
그에게 노희경 작가의 대본집은 ‘실용서’로서의 의미를 뛰어넘는다. 자신의 대본을 쓰다가 막히거나 불안할 때면 <그사세> 대본집을 펼쳐본다. “처음에는 제 작품에서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극적인 사건 없이 흘러가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런 특성을 강점으로 만드는 사람이 노희경 작가예요. 모든 인물의 감정을 잘 살리고요. 그래서 고민이 많아지면 <그사세>의 흐름을 다시 살펴봤어요.”
그의 말대로 <그 해 우리는>을 비롯한 이 작가의 작품에는 엄청난 극적 갈등이나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사랑을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인물, 열등감을 들키기 싫어서 이별을 선택해버리는 인물 등의 감정선이 드라마의 큰 줄기다. 인물의 속마음을 담은 내레이션 비중이 많은데, 삽입 타이밍이 매끄러워 전달력을 높인다. 이 작가는 “누군가의 속마음이 들리면 내가 정말 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좀더 자기 이야기처럼 느꼈으면 해서 내레이션을 쓴다”고 말했다. “만약 <그 해 우리는>에서 내레이션을 다 빼버리면 시청자가 웅이 편, 연수 편으로 갈려서 누가 잘했고 못했는지를 다툴 수도 있어요. (내레이션은) 시청자에게 둘 다 이해시키는 저의 방법이죠.”
“연수야… 우리… 이거 맞아? (최웅이 한 걸음 다가온다) 우리 지금 이러는 게 맞아? (한 걸음 더)” (<그 해 우리는>)
이 작가는 ‘청춘 로맨스를 써온 이유’를 묻는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그 나이이기 때문에” “내가 가장 많이 알고 고민하는 것이라서”라고 답했다. 이런 답변의 의미를 좀더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웹드라마를 쓸 때부터 내가 잘 알고 솔직할 수 있어야 글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쓸 때는 부자연스럽고 부족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제가 10대일 때, 대학생일 때 짝사랑과 가족이나 친구 사이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친구들과 깊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밝은 친구도 자신만의 고통이 있어요. 누구나 어떤 결핍과 고통을 갖고 있다면 지금도 그런 고통을 겪을 사람에게 당신의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걸 담백하게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시청자는 ‘가짜’를 알아챈다. 웹드라마 작가 겸 PD 시절 콘텐츠마다 시청자 댓글에 일일이 답글을 쓰는 등 실시간 소통을 했던 경험에서 배웠다. 이 작가는 자신과 친구들의 ‘진짜’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그 해 우리는> 3회에서 연수가 벚꽃 잎을 손에 모았다가 웅이 머리 위로 흩뿌리는 장면도 작가가 실제 겪은 일.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기록해둔 일기, 휴대전화 메모에서 드라마 속 인물의 속마음(내레이션)을 건져내기도 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도 글감으로 활용한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막상 앞에서는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편지를 쓰면서 정리해요. 막상 편지를 다 쓰고 나면 (상대에게) 건네지 못하기도 해서, 그런 편지를 모아뒀거든요. 제가 받은 편지를 꺼내 보기도 하고요.” 이야기의 개연성·핍진성을 위해 관련 인물을 인터뷰하거나 책·다큐멘터리를 참조하는 등 자료 수집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다양한 ‘마음들’의 역동이다. 이 작가가 인물을 짓는 데 도움받았다며 작가 지망생들에게 추천한 책도 캐릭터의 심리 기제를 정리한 <트라우마 사전>(윌북)이다.
‘[N] 한없이 멀게 느껴지다 한없이 가까이 다가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그 해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