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더 웨일’, 숭고함이 침묵하는 공간
2023-03-29
글 : 박지훈 (영화평론가)

<더 웨일>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 다만 그것은 <모비딕>이 고래에 관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스스로 <모비딕>을 인용하고 있는 <더 웨일>은 <모비딕>과의 관계를 통찰할 때 다양한 상징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모비딕>이 그러했듯이 <더 웨일>을 미국, 그리고 현대사회에 관한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다. <더 웨일>을 거울처럼 반전된 <모비딕>이라고 본다면, <더 웨일>의 찰리(브렌던 프레이저)는 고래 모비딕이 아니다. 찰리는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모비딕을 잡으려는 선장 에이해브를 닮았으며,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려 하는 오디세우스와도 유사하다. 내면의 어두운 곳에서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오디세우스의 욕망이 삶보다 거대한 무엇에 대한 갈망인 것처럼, 찰리의 죽음을 향한 갈망 또한 단지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엘리(세이디 싱크)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보다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찾고 있으며, 죽음 이후의 삶을 희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찰리를 안식으로 인도하며, 사악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하는 엘리는 에이해브를 죽음으로 이끄는 모비딕, 오디세우스를 시험하는 세이렌과 유사하다. 그러나 엘리가 궁극적으로 모비딕이 될 수 없듯이, 찰리도 에이해브가 될 수 없다. 찰리와 에이해브는 죽음의 원인부터 다르다. 에이해브의 죽음이 모비딕으로 상징되는 생명, 자연, 미지의 타 문화에 대한 살해를 시도했기 때문이라면, 찰리의 죽음은 절제 없는 과식,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무 많은 것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찰리가 집어삼킨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타인의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찰리가 집어삼킨 것은 무엇인가?

<더 웨일>을 <모비딕>의 변주라고 볼 때 <모비딕>에서 미국을 상징하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함선 피쿼드호는 폐쇄된 찰리의 집과 대응된다. 영화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씨는 찰리가 악천후 속에서 어딘가로 항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에이해브의 욕망을 위해 일하는 여러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피쿼드호의 선원처럼 찰리의 집에서도 찰리의 주체할 수 없는 식욕을 위해 노동하는 리즈(홍 차우)가 있다. 찰리가 집어삼키는 음식은 모두 리즈와 다른 이들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귀를 막고 노를 저어야 했던 선원들의 노동이 필요했던 것처럼, 찰리의 죽음을 향한 갈망도 리즈의 노동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리즈는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점에서 <모비딕>의 일등항해사 스타벅과 대응된다.

여기에서 멜빌의 다른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떠올려보자. <필경사 바틀비>는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법률 문서를 옮겨 적는 필경사 바틀비에 관한 이야기다. 원래 이 사무실에서 일하던 필경사 니퍼와 터키가 있었는데, 니퍼는 소화불량을 앓고 있고, 터키는 알코올중독에 빠져 있었다. 업무가 많아진 변호사는 바틀비를 필경사로 고용했고, 바틀비는 처음에는 변호사의 기대대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어느 날 돌연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점점 업무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먹는 것까지 거부하다가 죽게 된다. <더 웨일>은 찰리가 소화불량과 중독에 빠진 니퍼와 터키에서 능동적 거부를 선언하는 바틀비로 변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니퍼와 터키의 소화불량과 중독은 그들이 일하는 사무실, 즉 건물 벽이 창문을 막아버린 답답한 공간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상징이며, 찰리의 폐쇄된 집도 그렇다. <더 웨일>의 작은 창문은 건물로 막혀 있으며, 그 창문으로는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며, 찰리는 매일 찾아오는 피자 배달원의 얼굴도 보지 못한다. 벽을 두른 미국의 폐쇄성에 관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찰리의 집은 단지 사람 사이의 단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단절도 표현하고 있다. 찰리가 강사로 일하는 공간인 거실은 연극 무대처럼 비교적 정돈이 되어 있지만, 찰리가 일을 끝내고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서 돌아가는 자신의 방은 마치 소화되지 못한 음식들이 널브러진 위장 속과 같은 모습이다. 이 집의 모습은 찰리의 내면인 동시에 연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분열적 내면이며, 비인간화한 노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즉 찰리는 리즈의 노동을 삼키는 사람이지만, 그 역시 리즈와 다를 바 없이 끝없는 노동에 삼켜진 인간이며, 자본주의사회의 소외된 인간이다.

찰리의 잠긴 방은 그가 글을 쓰지 못하는 원인이며, 그를 병들게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찰리는 엘리를 만난 후에 잠가두었던 방의 문을 연다. 방의 문을 연 후에 찰리는 자신은 솔직하지 못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솔직함을 요구하는 자기모순을 직시하기 시작하며, 노동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찰리는 자기 내면의 상처와 마주하면 노동을 할 수 없고, 이 점은 <필경사 바틀비>의 변호사가 니퍼와 터키의 병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와 같다. 권력이 인간의 내면에서 무엇을 배제하고 무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찰리의 죽음은 이러한 배제와 소외를 더는 견디지 않겠다는 바틀비적 선언이며, 자신을 추방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이 점에서 찰리는 에이해브보다 성경 속 추방자의 이름을 따온 <모비딕>의 외부자 이슈마엘과 더 닮아 있다. 또한 찰리와 대비되는 토마스(타이 심프킨스)도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도망쳐왔다는 점에서 도망치듯이 피쿼드호를 탄 이슈마엘과 유사하다. 그리고 학교에서 정학당하고 가족과 친구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는 엘리도 일종의 추방된 사람이며, 또 다른 이슈마엘이다. 그래서 <더 웨일>은 오직 이슈마엘, 추방자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으며, 찰리의 집은 추방자들이 모이는 게토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을 상징하는 피쿼드호와 찰리의 집이 대응된다면, 이것은 미국의 다수가 사실은 추방자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

<모비딕>의 이슈마엘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며 사람과 고래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토마스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자신의 종교를 성찰하지도 못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구원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한편으론 자신이 말하는 것조차 온전히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슈마엘처럼 이야기를 만들 수 없는 토마스는 권력이 다시 자기를 봐주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런 토마스와 달리 찰리는 또 다른 추방자인 엘리를 들여다보고 해석함으로써 자기를 찾고자 한다.

이 점에서 <더 웨일>은 신의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 벌거벗은 인간들, 신을 대체한 자본주의가 버려둔 인간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된다. 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엘리 때문이며, 찰리가 죽기 전에 엘리의 에세이를 듣고 싶어 하는 이유도 그것이 그에게 남겨진 성경이기 때문이다. 찰리의 엘리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은 찰리의 속죄이자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찰리의 신념이다. 찰리가 허무의 나락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다. 타인의 비합리성을 끌어안음으로써 신에게 버려진 나약한 인간이 신의 부재에 대항하는 것이다. 주체가 될 수 없는, 언어를 상실한 인간의 대상 없는 투쟁이다. 싸워야 할 대상을 상실한 찰리는 모비딕의 부재 속에, 숭고함의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어쩌면 찰리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엘리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숭고하지 않은 삶도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삶의 허무에서 벗어날 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