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용무도’(昏庸無道, 세상이 어지럽고 무도하다). 불통의 시대 속에서 일인분의 삶이 소중해졌다. 7개월간 이어진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속에서 38명이 목숨을 잃었고,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정치적 불신이 극에 달한 11월14일 제1차 민중총궐기에서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사망했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제1차 청문회가 어렵게 열렸던 12월, 한일정부간 위안부 협상이 졸속 타결되면서 당사자와 국민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한편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결과와 1인 가구의 상징 ‘이케아’의 한국 상륙으로 국내 1인 가구 수가 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됐다. CGV리서치센터에서는 2015년 1인 티켓 비중이 처음으로 10%를 넘겨 ‘나 홀로 관객’이 늘고 있다고 밝혔고 소소한 일상이 소비, 문화 트렌드로 떠올랐다.
사람들이 극장에 가지 않는다는 요즘 얘기가 무색한 시절이었다. 메르스가 기승을 부리던 2015년에도 극장가에는 천만 영화가 네편이나 나왔다. “그때만 해도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인식이 분명하던 때였다. 대체 상품도 없고 IPTV로 보려고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티켓값이 만원이었지만 통신사 할인까지 더하면 7천, 8천원에 볼 수 있었다”라고 복수의 취재원이 말했다. 비용 부담이 크지 않고 대체재 없는 영화 관람은 국민적 취미 생활이었다. 한해 극장을 찾은 관객수는 2억1729만명. 인구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는 4.22회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극장의 호황은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된 현상은 아니었다. 2014년 마지막 날, 프랑스 <르파리지앵>에는 ‘어떻게 이 많은 관객을 끌어들였나’라는 제목으로 한해 ‘누적 관객수가 2억1천만명에 근접’하다는 결산 기사가 나왔다. 2015년 4월 홍콩 매체 <원후이바오>에도 “올해 들어 100일 만에 일일평균 극장 매출 1억위안을 넘겼다”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해 할리우드도 <쥬라기 월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등 프랜차이즈 영화의 신기록 행진으로 전년에 비해 호황을 누렸다.
엔터테이닝과 시대정신
2015년의 여름도 뜨거웠다. <암살>, <베테랑>(8월5일 개봉)이 2주차로 개봉했는데도 각각 천만명 넘는 관객을 모았다. <암살>과 <베테랑> 사이 <미션 임파서블>이 개봉해 612만명의 관객을 모았으나 이 여름, 한국영화의 흥행을 멈추지 못했다. <도둑들> 이후 최동훈 감독의 신작으로 순제작비 180억원, 총제작비 210억원 규모의 <암살>은 그해 가장 큰 기대작이었다. “무조건 최성수기에 틀 영화였다. 일제강점기를 다뤄서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영화가 나왔을 때 염석진(이정재)을 단죄하며 통쾌하게 잘 풀어냈고, 영화의 메시지 자체가 ‘힘들어도 누군가는 할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게 시대정신과도 부합했다”고 당시 제작 관계자는 설명했다. 반면 순제작비 60억원, 총제작비 95억원 규모의 <베테랑>은 애초에 텐트폴 영화로 기획된 영화는 아니었다. 지난해에서 설날로, <국제시장> 여파로 여름까지 개봉이 밀렸지만 1051억원 매출을 기록하며 대흥행했다. 당시 홍보 관계자는 “액션의 수위가 세고 캐릭터의 엣지가 강한 것은 분명 류승완식 영화가 맞는데 이전 영화보다 오락성이 뛰어났다. 빠른 템포의 사건 전개, 아트박스 사장님으로 등장한 마동석까지, 엔터테이닝 요소를 살린 점이 ‘사이다 영화’라는 입소문과 함께 돋보였다”고 흥행 이유를 분석했다.
19금에도 700만 관객 모은 <내부자들>
설 연휴에 흥행한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나 추석 연휴에 흥행한 <사도> 등 정통적인 성수기에 내건 영화들은 여느 때처럼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웰메이드 영화로 극찬을 받았던 <사도>는 624만명 관객을 모았지만 내부에서는 천만을 기대한 영화였다. “추석 시즌이라 사극이 통하던 시기였고 시사 반응이 워낙 좋았다. 소재가 무겁고 엔터테이닝한 요소가 부족해서인지 600만명에 그쳐 아쉬웠다”고 당시 홍보 관계자는 말했다. 블랙 위도우와 캡틴 아메리카가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도심을 질주하는 등 국내 촬영으로 이슈를 모았던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마블 시리즈의 연례행사처럼 4월에 찾아와 크게 흥행했다.
의외의 스코어를 거둔 작품은 <연평해전>과 <내부자들>이다. <내부자들>은 11월 비수기에 개봉하고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편집본이 재미있었다. 19금 영화는 잔인하다는 인식이 있어 스코어 측면에서 많이 불리하다. 러닝타임도 길어서 400~500만명 정도를 목표로 걸었는데 영화가 더 잘됐다.” 조폭, 검찰, 언론의 커넥션을 다룬 정치 드라마지만 <베테랑> <암살>에 이어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한 개념을 되묻는 영화이기도 했다. 마케팅을 담당한 호호호비치의 이채현, 이나리 공동대표는 “웹툰 원작이라는 점을 살려서 영화가 무겁거나 어렵게 다가가지 않도록 했다. 제작보고회 때부터 윤태호 작가님과 동행했고 작가님이 그린 포스터로 홍보하는 식으로 웹툰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다”고 말했다. 이후 “버릴 게 없었던 편집본”을 활용한 3시간짜리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 12월31일 개봉했다. 초판으로 705만명, 확장판으로 200만명을 모은 <내부자들>은 청소년관람불가였음에도 900만 관객을 이끈 저력을 보였다.
영화를 둘러싼 ‘좌우 논쟁’
‘불통’이 2015년의 키워드로 꼽힐 만큼 정치적 상황에 불만족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큰 해였다. <변호인> <명량>으로 이어진 흥행을 두고 한쪽에서는 ‘좌파 코드’를 운운하면서 영화의 ‘좌우 논쟁’이 달아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회의 자리에서 <국제시장>을 언급하자 수많은 여야 정치인들이 앞다퉈 영화를 보고 코멘트를 내면서 보수 결집의 메시지를 쏟아내기도 했다. 한 홍보 담당자는 “대선과 지방선거 등 특정 시기를 앞둔 기획안이 들어올 때가 있다. 배급 타이밍을 잡을 땐 당연히 상업영화인 만큼 정치적 상황도 염두에 둔다. <연평해전>이나 이듬해 <인천상륙작전>의 경우 영화적 만듦새와는 별개로 정국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빨리 후반작업해서 영화를 내놓자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이런 부분을 긁으면 특정 관객이 확실히 움직일 거라는 얄팍한 기획도 있었을 거다”라고 말했다. 얄팍한 기획을 정치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애국 마케팅을 내건 <연평해전>의 그해 언론보도는 총 80건으로 보수 매체에서 70건, 진보 매체에서 10건 다뤄졌다. 그중 문화면에 게재된 건 5건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