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은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이전되고 물가가 급등해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치솟던 해였다.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과 금융시장이 큰 타격을 입고, 사람들은 보다 신중하게 소비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다시 호황을 겪은 산업도 있지만 10월29일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이태원 참사 이후 긴 추모 분위기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2021~2022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에 오른 손흥민에 열광하며 숨 쉴 구멍을 찾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며 위로받았다.
한편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침체기에 빠진 한국 극장가를 구한 것은 마블이 아닌 마블리였다. 마동석, 손석구 주연의 <범죄도시2>가 <겨울왕국2>(2019년 11월21일 개봉) 이후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칸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송강호가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받는 낭보도 전해졌다. 하지만 모든 한국영화가, 심지어 많은 관계자들의 기대를 모았던 작품마저 점진적인 회복기에 접어든 극장가의 수혜자가 되지는 못한 해였다.
엔데믹과 보복 심리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그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회적 거리두기 조정안도 발표됐다. 사적 모임이 10명까지 허용되고, 극장 영업도 밤 12시로 연장되면서 억눌려 있던 소비 심리가 다시 폭발하기 시작했다. <범죄도시2>는 가장 큰 수혜자다. “해외의 코로나19 확산 추이 데이터를 시뮬레이션한 결과, 5월이면 안정세에 접어들 것이라고 판단했고 5월18일 개봉을 확정했다.”(석지우 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 대표) 이후 <탑건: 매버릭>과 <마녀 Part2. The Other One>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를 염두에 두며 공개일을 맞춘 케이스다. 김세형 롯데컬처웍스 콘텐츠전략 팀장은 “엔데믹에 접어들 즈음이라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될 것이라는 예측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극장 내 정부 규제도 풀리던 와중에 톰 크루즈 내한까지 성사됐다”며 <탑건: 매버릭>이 누린 엔데믹 효과를 전했다.
시리즈 영화만이 먹힌다
2022년 박스오피스 10위권 내에 ‘시리즈’에 묶이지 않는 영화는 단 두편, <헌트>와 <올빼미>뿐이다. <범죄도시2> <탑건: 매버릭> <아바타: 물의 길> <한산: 용의 출현> <공조2: 인터내셔날>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마녀 Part2. The Other One> 모두 “인지도를 높일 필요가 없는” (이시연 흥미진진 대표) 작품들이었다. 전편과 시차가 있는 경우 약점이 아닌 오히려 세대를 아우르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김현철 롯데컬처웍스 배급팀장은 “40대 관객 중심이었던 <탑건: 매버릭> 관객층이 10대까지 내려왔다.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점점 늘어나서 신기했다”며 <탑건: 매버릭>의 장기 흥행의 힘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전했다. “패밀리 타깃과 성인 타깃으로 마케팅 전략을 세분화” (이채현 호호호비치 대표)해 접근한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은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기억하는 관객과 공룡을 좋아하는 어린이 관객이 함께 극장을 찾은 케이스다. 물론 <토르: 러브 앤 썬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치고는 아쉬운 성적을 거뒀고 라미란의 <정직한 후보2>는 전작만 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바꾸어 말해 “기대감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새로움을 보여준” (이시연 대표) 작품들은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엔데믹 시대가 시작됐지만 과거처럼 대중의 선택지에는 극장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OTT 등 대체재가 많은 상황에서 여가 시간이 한정된 관객은 재미가 검증된 상품을 우선시했다. “2022년에 잘된 영화들은 대부분 좋은 흥행을 거둔 전편이 있는 작품들이다. 결과적으로 기존에 검증된 작품성이 신작을 뒷받침해주느냐가 주요한 화두였던 것 같다.”(김현철 배급팀장)
엔터테이닝한 장르영화의 강세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범죄도시2>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르적인 특성을 잘 살려서 관객이 원하는 바를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형 슈퍼히어로 마동석이 범죄자를 응징한다는 단순한 스토리라인하에 타격감을 한껏 끌어올린 오락영화는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이후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상품이었다. 이후 <탑건: 매버릭>은 “CG가 아닌, 모든 배우들이 비행 훈련에 임해 리얼한 연기를 보여줌으로써”(이채현 대표) 액션영화에 거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했으며, <헌트>는 “첩보 스릴러 장르로서 완성도를 보여줬고 이정재, 정우성의 시너지가 더해져 흥행에 성공” (박주석 영화인 이사)했다. 하반기의 깜짝 흥행작은 비수기인 11월에 개봉한 <올빼미>였다. 소현세자 독살 사건의 미스터리를 장르적으로 풀어낸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기획이었다. “주인공이 주맹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운드에 특히 신경을 썼다. 극장에서 봤을 때 훨씬 재미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홍보했고, 사극이지만 현대적인 스릴러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주석 이사)
OTT는 줄 수 없는 차별화된 체험
이제 영화는 동시기 극장에 걸리는 다른 작품은 물론, OTT의 다른 화제성과도 경쟁해야 한다. 이를테면 3월 개봉작의 가장 큰 불안 요소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거의 모든 화제성을 독점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극장영화는 OTT 시리즈로는 만들 수 없는 기획, OTT로 영화를 볼 때는 불가능한 경험을 선사해 다른 플랫폼과 차별화되어야 한다. 특수관 매출이 높았던 <아바타: 물의 길>은 “기술적으로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라는 점을 강조” (박주석 이사)하며 티켓값을 지불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득한 대표적인 사례다. <탑건: 매버릭>을 수입·배급한 롯데엔터테인먼트 역시 “집 안에 갇혀 지내던 사람들이 하늘을 날고 전투를 하는 극장형 경험을 누릴 수 있다보니 그 과정에서 감정적 해소를 경험” (김세형 콘텐츠전략 팀장)한 점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